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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Oct 04. 2023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좋아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건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조지오웰의 ‘동물 농장’을 통해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이 작품은 동물들의 이야기면서도 꽤나 체제에 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담고 있다. 따라서 얼핏 아동용으로 보이는 책이 결코 아동용이 아니라는 것은 내용의 깊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왜 굳이 이 사회적 정치적 이야기를 동물들의 이야기로 설정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정치적인 목적을 예술적인 목적과 융합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동물들이 인간의 횡포에 저항을 하며 혁명을 단행하지만 결국 그들도 인간과 똑같아졌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괴물과 싸울 때 가장 경계해야할 점은 괴물과 싸우는 동안 그와 닮아가는 것” 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작품에서도 동물들이 혁명을 할 때 경계했던 점이 바로 “인간과의 싸움에서 우리 동물들이 결코 인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하는 일이 불가능한 결말을 낳고 말았다. 


작품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혁명 후 지도부가 내세웠던 일곱계명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변질되어가는 가에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을 높게 두어야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가 바뀌는 과정이다.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하는 순간 국민은 정부가 허울좋은 말속임으로 자신들을 농락하고 이용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돼지들에게 속아 자신이 핍박받는 줄도 모르고 충성을 다해 일하다 결국 도살장으로 끌러가는 '복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토록 충격적인 정부의 횡포에 관한 이야기가 어찌 구소련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이상 사회를 구현하고자 출범했던 정부들이 변질되어가는 모든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22년 미국에서는 '로 대 웨이드'법이 폐지가 되면서 연방법상 낙태가 불법이 되었다. 미국의 연방법은 대법원 판사들의 표결에 의해 결정이 되는데 보수진영의 대법원 판사가 과반으로 넘어서 보수파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자 공화당은 이를 활용해 기다렸다는 듯이 법을 뒤집어 버렸다.  


그런데 사실 레이건, 부시, 트럼프 이들 공화당 전 대통령들의 낙태에 대한 초기 입장은 지금의 보수 공화당과 상반된다. 그들은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라며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가 임박해오자 어떠한 이유에서든 태아의 생명권 침해할 수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철회해버린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정치인이 인기에 연연해 눈치로 정치를 하는 포퓰리즘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박에 없다. 그야말로 작품 속에서 나폴레옹이 풍차 건설을 반대하다가 사실은 자신이 원래 하려고 했던 계획이었다고 말을 바꾸는 모습과 흡사하다.


미국은 생각 이상으로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정치계에서도 대통령의 종교가 기독교냐 아니냐가 문제가 될 정도로 기독교적 신앙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념과 대치하는 정치색을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선거철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태아의 생명 보호와 존중”을 위해 “공화당에 투표를!” 이 구호만 봐도 그렇다. 이는 낙태 금지의 프레임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공화당의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평등을 내세우던 돼지들은 자신들 스스로 ‘엘리트 계급’이 되어 특권을 누린다. 이 자가당착의 상황에 대해 돼지들은 이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무거운 책임을 지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피력하며 합리화시킨다. 이런 상황은 매번 반복된다. 돼지들의 치부가 드러나나 싶은 상황에서도 늘 돼지들은 권모술수로 위기를 모면해간다. 사건을 조작하고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빼다 박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돼지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동물들에게 중상모략으로 처형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러시아가 혁명 이후 부패해 가는 과정 그 역사적 사실만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머어느 시대든, 어느 국가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유추적 상황이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이 동물 농장에서 그나마 공동체를 위하며 용감하게 동물들을 위해 싸웠던 돼지 스노볼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나폴레옹이 용의주도하게 만든 경찰호의대, 개떼에 의해 축출을 당하고 만다. 이후 돼지들은 동물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던 스노볼을 깎아 내리기 시작한다. 스노볼이 '외양간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운 사실을 조금씩 왜곡한 것이다. 스노볼은 인간 존스와 내통하면서 첩자 노릇을 해왔고 그는 사실 알고 보면 동물들을 패배시키고 파멸시키려 했던 적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 존스가 쳐들어왔을 때 스노볼은 도망쳐버렸고 존스의 다리를 이빨로 물어뜯었던 동물들의 영웅은 나폴레옹이었다고 이야기를 바꿔놓는다. 따라서 스노볼의 부상은 인간과 용맹하게 싸워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한테 물려 생긴 상처였다며 일어난 사건에 인물을 바꿔치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내용을 만들어버린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바로 스노볼이었다는 황당한 결론으로 끝맺게 된다. 국민을 저버리고 자기혼자 살고자 했던 권력자는 어느새 영웅이 되어버리고 국민을 위해 힘썼던 지도자는 절대악이 되버버렸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스노볼의 풍차 건설 계획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의 것을 훔쳐간 것으로, 나폴레옹이 이를 반대했던 것은 위험인물인 스노볼을 추방하기 위해 위장 전술을 펼쳐야했기 때문이라고 거짓을 말한다. 이러한 모략들은 스노볼을 악인으로 재창출해냈다. 부실 공사로 무너져버린 풍차는 스노볼이 밤에 몰래 와서 무너뜨린 것이고 곳간 열쇠가 없어진 것은 스노볼이 우물에 던져서 그런 것이고 스노볼은 그간 어둠을 틈타 농장으로 잠입해 식량을 훔치고 온상을 짓밟고 우유통을 뒤집어엎고 달걀을 깨뜨리는 듯 온갖 몹쓸 짓을 해댄 국민 역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모두 '권력'이 한 곳으로 모여지고 이것이 장기화되고 절대화 됐을 때 국민들을 우민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잘못한 것을 덮어씌울 비난의 대상을 만들고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렇게 격분을 팔고나면 국민들은 국가에 충성을 하게 된다. 실제로 나폴레옹으로 묘사해놓은 독재자 스탈린도 모든 정보를 통제 검열하고 국민들이 진실을 접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차단해 자신들이 제공하는 거짓 정보를 현실로 믿게 만들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런데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 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은 곧 ‘불평등’하다는 뜻이다. 말 속에 있는 ‘평등’이란 단어에 현혹되어 이것을 평등을 보장한 계명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 속에서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특별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것과 ‘특권층에서 제외된 다른 동물들은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는 속뜻을 읽어내야 불의한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해볼 문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권력은 왜 부패하는가? 


독재는 왜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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