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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Oct 19. 2023

50000이 아닌 500

어느새 나는 예준이와 500일 기념일을 앞두고 있었다. 나에게 500일 기념 선물로 좋은 걸 해주고 싶다던 예준이는 숙대 입구쪽에 있는 커다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세상 누구보다 착하던 예준이에게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못되게 굴었다. 그땐 그래야하는 건 줄 알았다. 남자친구를 못 살게 하고 질투 나게 하고 괴롭혀야 나 때문에 애가 닳고 이것이 사랑이 오래 유지하는 방법인 줄 알았다. 너무 좋아했지만 나는 그에게 늘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했다. 100일 선물로 장미꽃 100송이를 사오면 나는 짜증을 내며 

“나 이런 거 싫어해. 꽃 정말 싫어.”라며

상대방의 성의를 묵살해버리기도 했다. 내가 자기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에 대한 마음과 사랑이 식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들은 그렇다고 알고 있었고. 그래도 나는 예준이가 정말 좋았다. 그 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유난히 두텁고 큰 내 손을 작고 앙증맞게 만들어주는 예준이는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그렇다고 말로도 확인시켜줬다.

“나는 네 손이 좋아. 작고 예뻐.”

그러면 나는 그냥 웃다가 굳이 또 학창시절 별명을 꺼내 확인을 시켜주었다.

“예준아, 나 고등학교 때 별명이 뭔지 알아? 경동시장 족손이야. 이렇게 책상위에 손을 오그라트려서 올려놓으면 족발 같다고. 나 진짜 여자 치고 손 엄청 큰 편이야.”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면 예준이는 양손을 좌우가 겹치는 방향으로 흔들며

“아니야. 이렇게 작고 귀여운데 경동시장 족손이라니 말도 안 돼.”

하며 반달눈 웃음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마주잡은 손 위로 힘줄이 불끈 솟아오른 팔을 볼 때면 든든했다. 그래서 나는 곧 잘 깍지 낀 손을 풀쳐내고 그 아이 팔뚝위에 손을 얹어 팔짱처럼 끼고 다녔다. 


내가 못되게 해도 나에게 착하게 했고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러지 말아달라고 매달렸다. 물론 나는 그 애와 헤어질 생각이 없으면서도 채찍처럼 그에게 헤어지잔 말을 주기적으로 내뱉었다. 공연히 그 애를 울리기도 했다. 나는 이게 그 애를 내 옆에 천 년 만 년 둘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마음에 있는 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했고 그걸 비틀고 쥐어짜서 그를 괴롭히며 전달했다. 그래도 그 애는 나를 귀하게 대해 주었다. 토라져 있으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나는 그 품이 좋았다. 그렇게  그 애는 그 애의 모든 걸 아낌없이 주었고 나는 모든 걸 아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단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너에게 이유도 없이 모질게 하고 함부로 대했던 철없고 부족했던 그리고 많이 나빴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이야기 하질 못했다.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고 내가 많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해주지 못했다. 


우리는 서울은 물론 근교까지 유명한 데이트 장소를 다 다녔다. 공원은 물론이거니와 박물관, 각 대학 캠퍼스 맛집, 탐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너무 잘 맞았다. 그래서 내가 갔던 모든 동선 속에는 그 애와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특별한 곳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참 행복했다. 커피점에 마주 앉아 아무 말 않고 있기만 해도 마냥 좋았다. 불쑥 그 애의 혀를 타고 전해지는 체리차의 달콤함이 말초신경을 타고 중추신경으로 전해질 때 나는 그 애가 나를 향해 하는 모든 행위가 좋았다. 그 애는 늘 나를 만족시켜줬다. 내가 일부로 이 행복들을 비틀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애가 너무 좋았던 탓에 그 애를 잃을까봐 불안해했던 것 같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예준이가 오후에 알바가 있어서 우린 짧은 만남을 가졌다. 강남역에서 만나 오락도 하고 밥도 먹고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나는 그 어떤 이상 기류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워 나는 예준이가 일하는 호프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그 애와 눈을 마주치려면 나는 올려다 봐야했다. 나는 이 각도와 높이가 좋았다. 서있어도 좋았고 나란히 앉아 있어도 좋았다. 내가 고개를 그 애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아늑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그 날도 나는 너무도 완벽한 높이와 각도에 위치하고 있는 그 애의 얼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애는 여느 때처럼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애의 전화기가 울렸다. 통화를 하지 않고 바로 끊길래 누구냐고 물어봤다.  

“응, 호프집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 남자야 남자~”

굳이 남자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고 굳이 전화를 급하게 끊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이상하다 여긴 나는

“그래? 발신자 번호 좀 보여줘.”

내 눈에 들어온 이름 세 글자.

김지우.

남자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애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다시 걸어봐.”

“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니, 이상하잖아.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를 다시 거는 게.”

“나는 네가 이러는 게 더 이상한데?”

나는 예준이의 전화를 빼앗고 send를 눌렀다. 

“여보세요?”

김지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은 여자의 것이었다.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다는 얘기인가? 그것도 내 500일 선물을 사주겠다고 일을 시작한 그곳에서 만난 여자 아이와? 머릿속이 수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0,1초 동안의 과부하를 감당해야했다. 계속되는 추궁과 실갱이 끝에 예준이는 지우의 존재를 실토했고 그 애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나와의 관계도 여기서 끝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 애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다. 지우는 1000일도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아이였는데 그래도 그냥 그 애가 좋다는 것이었다. 둘은 각자가 애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난 데 없는 이별 통보에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여자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는 예준이의 옆에 서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막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남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하의 기온을 뿜어내고 있었다. 몹시도 차가웠다. 가지말라고 울며 애원하고 싶었지만 나는 보내줄테니 마지막으로 지우를 한 번 보게해달라고 했다. 먼 발치에서 보고만 가겠다고 했다. 누군지 궁금했다.  예준이도 당황하고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해도 물러설 내가 아니란 걸 예준이도 잘 알았던 것 같아. 그 애는 별 말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예준이가 일하는 호프집 문까지 갔다. 지하실에 위치한 호프집은 유리창 건너로 내부가 환히 보였다. 

“저기 서 있는 애가 지우야.”

나는 상상 속에서 키크고 늘씬하고 예쁘고 세련된 아이를 그렸다. 그런데 유리창 너머로 서 있는 여자애는 작고 뚱뚱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미안해. 나 이제 들어가 봐야해. 늦었어.”

그게 예준이와 마지막이었다. 예준이는 나와 이렇게 끝내더라도 미련이 남지 않은 것처럼 횡하니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그 애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애를 이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50000까지 세고 떠나겠다던 예준이는 500일도 못 채우고 나를 떠났다. 그 애가 나에게 왔던 방식 그대로 그 애는 다른 여자한테로 떠났다. 나는 그 애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이젠 더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애한테 했던 모든 것들을 천 배 만 배로 돌려받았다. 죗값을 달게 받을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쓰디쓰게 치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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