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포착한 미나미 타카유키의 영감
일본 브랜드 특유의 여유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그라프페이퍼
평범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브랜드 『그라프페이퍼』.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오버사이즈드 셔츠가 30,000엔을 밑도는 가격으로, 브랜드에 대한 웬만한 애정 없이 구매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라프페이퍼는 여느 브랜드보다 그 철학이 돋보이는 브랜드로, 알고 나서 달리 보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라프페이퍼는 스웨트셔츠, 무지 티셔츠, 슬랙스같은 베이직한 일상복을 주로 다룹니다. 무심한 듯한 그라프페이퍼의 일상복은 무엇보다 세심하게 만들어졌고, 볼드한 실루엣은 여유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지요. 특히 셔츠의 만듦새는 디렉터 미나미 타카유키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디렉터 미나미 타카유키는 헤럴드 제먼의 전시 『When attitudes become form』에 영감을 받아 그라프페이퍼를 만들었습니다. 해당 전시에서 큐레이터는 제한적이었던 역할 영역에서 벗어나, 최초로 작품에 의미를 더하는 인물로 발돋움하죠.
큐레이터와 마찬가지로, 미나미는 미술이나 의류 전공자가 아닙니다. 그의 예술은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에서 출발하죠. 그는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보다는, 기존의 일상과 예술을 해석하는 것에 더욱 주목합니다.
그의 큐레이팅에 가장 큰 영감이 된 것은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와 헬무트 랭, 그리고 산업 디자이너 디터람스. 남성복의 풍성한 테일러링을 보여준 꼼 데 갸르송, 밀리터리 의류를 미니멀라이즈 한 헬무트 랭은 미나미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미나미는 그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라프페이퍼 또한 볼드한 실루엣과 미니멀리즘을 보여줍니다.
그의 영감이 어디까지나 일상에 뿌리를 둔 것처럼,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양합니다. 그는 “컬렉션 브랜드는 재구매가 안 되는 물건이 많다. 마음에 들었는데 다음 시즌에 가면 살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우리 손님에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라프페이퍼의 철학이 가장 잘 묻어나는 제품은 단연 셔츠입니다. 셔츠는 일반적으로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어지는 품목이죠. 하지만 미나미에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습니다. “자는 것을 좋아해 침대 시트를 입고 싶다”는 그는, 침대 시트와 가장 비슷한 원단으로 셔츠를 제작하려 합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일리 있는 발상이죠?
그렇게 드레스 셔츠의 품격이 어느 정도 유지된, 하지만 동시에 가장 편안한 순간이 느껴지는 캐주얼 셔츠가 탄생합니다. 미나미는 이 캐주얼 셔츠를 티셔츠처럼 무심하게 입길 바라죠. 그는 이 셔츠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과한 케어는 필요 없다. 신경 쓰지 않은 듯 툭 걸치면 그만인 옷이다."
한편, 그의 의도가 옷에 투영되는 과정은 세심함의 극치. 침대의 편안함을 구현하기 위해 부드러운 면소재를 찾아 나섰고, 몸에 가장 편안한 패턴을 연구했으며 마구 빨고 건조기를 돌려도 유지되는 내구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특히나 겨드랑이 부분은 절대 불편하지 않도록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라프페이퍼에는 일반적인 브랜드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F'사이즈가 있죠. 어디선가 FREE 사이즈를 본 적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라프페이퍼의 F 사이즈 개념이 아닐 겁니다.
고가의 의류를 구매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 중 하나는 디렉터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가 자신의 취향과 얼마나 잘 맞느냐는 것입니다. 그라프페이퍼의 F사이즈에는 디렉터 미나미 타카유키의 취향이 듬뿍 담겼습니다. 그렇기에 F사이즈 옷들은 디렉터를 가장 잘 이야기하며, 실제로 모든 사이즈 중 가장 인기가 좋습니다.
미나미는 자신과 같이 풍채 좋은 착용자부터 마른 체형의 착용자까지 모두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체형이 다르다는 것은 신장, 팔 길이, 어깨너비, 가슴둘레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그는 '입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무작정 큰 F사이즈'가 아니라 모두에게 훌륭한 패턴을 찾아냈습니다.
그 이면에는 치열한 패턴 연구가 있었습니다. 가령 마른 사람이 큰 옷을 입어버리면 어깨 부분이 툭 튀어나와서 보기에 좋지 않기에, 옷들의 어깨에는 적절한 경사를 주었습니다. 또 사이즈가 커진다고 셔츠 뒤편의 요크를 무작정 키우지 않았지요. 사실상 사이즈만 달라도 패턴을 다시 만든 셈.
이런 점에서 그라프페이퍼의 피스는 충분한 메리트를 지닙니다. 디렉터의 예술 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제품의 의도를 높이 평가한다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 가장 중요한 건, 그라프페이퍼의 피스들은 소모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조: graphpaper 공식 홈페이지 미나미 다카유키 인터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