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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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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Dec 29. 2021

이 집 사극 잘하네, <옷소매 붉은 끝동>

  사극은 고정 시청자 층이 두터운 드라마 장르이다. 뼈대만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해 극이 전개되므로 우리가 상상해야 할 몫이 풍부해진다. 더불어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 영•정조 시대는 ‘이제는 새로 쓸 거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극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이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이 성군을 만나 다시 한번 기틀을 바로잡은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젊은 시절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데, 눈에 띄게 좋은 시청자들의 반응으로 MBC 드라마의 부활을 알리며 산뜻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옷소매 붉은 끝동>을 4화까지 감상한 후기를 몇 가지 특성을 중심으로 작성하고자 한다.           



첫째, “튜닝의 끝은 순정”, 정통 사극의 깊이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이것저것 고치고 손을 본 것보다, 본래의 순수한 상태가 더욱 뛰어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로맨스에 중점을 둔 퓨전 사극이 인기를 끌었지만, 시청자들의 선호는 다시 정통 사극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퓨전 사극은 현대적인 감성과 유쾌한 분위기로 1020세대까지 사로잡았지만, 일각에서는, ‘사극이 아니라, 한복만 입은 것 아니냐’라는 시선 또한 존재했다. 사극에서 현대인의 말투가 쓰이며,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 아랫사람이 양반에게, 심지어 신하가 왕에게 성질을 부리는,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반면, 본 드라마에서는 미디어 매체의 잦은 고증 오류로 잘못 알고 있던 조선시대 호칭을 바로잡았다. 이전에 본 여러 사극에서는 ‘마마’ ‘마님’이라는 호칭이 다소 무분별하게 사용된 반면, 본 작품에서는 보다 예법에 맞는 적재적소의 호칭들이 사용되었다. 특히 ‘마노라’와 ‘자가’라는 표현을 새로 배울 수 있었다. 흔히 사극에서 높은 사람을 칭할 때 쓰이는 ‘마마’라는 표현은 사실 왕, 중전, 대비, 세자에게만 사용 가능했다. ‘마노라’는 이에 더하여 세자빈에게까지 적용 가능하다. ‘자가’는 정 1품 빈 이상 후궁, 공주, 옹주에게 사용 가능하며, ‘마마님’은 상궁, 양반의 양첩에게 사용하는 표현이며 양반과 왕족에게는 사용 불가하다. 후궁에게도 ‘마마’라고 칭하는 사극들도 많은데, 이렇게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서도 세심하게 고증을 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한 드라마를 보며 ‘항아’라는 호칭도 알게 되었다. 이는 ‘달에 사는 선녀들’이라는 뜻으로 궁녀들의 호칭이다. 신하와 바깥사람들이 궁녀를 부를 때 ‘항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냥을 ‘타위’라 칭하는 등, 그동안 사극을 꽤 보았는데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표현들이 많았다. 퓨전사극이 한동안 유행하면서 사극으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랑에만 치중하지 않고 철저한 고증에도 관심을 둔 묵직한 극이 기대가 된다.


겸사서가 ‘항아’라고 칭하는 장면 - 출처: 옷소매 붉은 끝동 4화




둘째, 원작보다 더 재밌다, ‘드잘알’ 각색!


  3화의 끝부분에서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탄성이 나오게 하는 명장면이 탄생했다. 세자는 겸사서로 자신을 속이고 서고를 드나들며 여자 주인공인 덕임과 친분을 쌓게 된다. 덕임은 높디높은 세자 산의 얼굴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므로, 시중을 들 때 세자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기에 의심 없이 그를 겸사서로 받아들인다. 그러던 중 덕임은 연못 근처에서 신하들의 보필을 받는 세자를 마주치게 된다. 세자는 자신이 신분을 속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부채로 얼굴을 가리지만, 그의 얼굴이 연못에 비쳐 정체를 들키고야 말았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오직 사극에서만 가능한 설정일 것이다. 이 장면은 소설 원작에 있던 것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새로 추가된 부분인데, ‘사극’이라는 장르에서만 가능한 설렘을 잘 살려 시청자들의 유입을 늘렸다.


연못에 비친 세자의 모습 - 출처: 옷소매 붉은 끝동 3화




셋째, 가슴이 웅장해지는 감독의 연출 


  드라마의 연출 또한 뛰어나 극의 재미를 더한다. 특히 3화에서의 용병풍 장면은 압권이었다. 궁궐로 호랑이가 들어와 사람을 해치자, 산은 궁녀들을 지키기 위해 허락 없이 사냥을 나가 호랑이를 잡았다. 이는 왕에 대한 역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였고, 산은 영조에게 사죄를 하고자 며칠 동안 무릎을 꿇었다. 둘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신하들은 병풍을 들고 와서 주변을 감싼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병풍을 담은 공중 쇼트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병풍 안에서 영조는 산을 껴안으며 안전을 확인하고, 그런 둘의 모습은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이는 영조가 다른 이에게는 강인한 왕이지만 동시에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가지고 있음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영조에게 사죄를 청하는 이산 - 출처: 옷소매 붉은 끝동 3화




이와 같은 장점 덕에, <옷소매 붉은 끝동>은 1화에서 4화를 단숨에 몰아볼 정도로 흡입력 있고 훌륭한 드라마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보완한다면 보다 접근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등장인물이 많은 사극의 특성을 고려할 때 자막을 좀 더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휘는 자막으로 상세히 깔아주었으나, 인물을 설명하는 자막은 없었다. 청연군주, 청선군주, 화완옹주의 관계와 역할이 헷갈려 인물 설명을 읽어 보고서야 이해가 갔다. 장벽을 조금 더 낮출 수 있도록, 화완공주(영조의 막내딸, 산의 고모)와 같이 인물을 간단히 소개하는 자막을 활용하면 좋을 듯하다.

또한 몇 인물들은 본명을 쓰지 않고 자()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막을 꼭 넣어줬으면 한다. 특히 훗날 역모를 꾀하는 홍국영은 ‘홍덕로’로 자를 사용하는데, 덕임이가 양녀라는 설정이 있어 일부 시청자들은 “이름이 비슷하니까 덕로와 덕임이가 입양으로 헤어진 남매 사이가 아닌가”라는 엉뚱한 추측도 남겼다. 이처럼 사극은 인물이 많은 데 더해 사람을 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만큼, 좀 더 많은 부분을 자막을 통해 짚고 넘어가는 것이 보다 명확한 느낌을 줄 것이다.


동덕회의 일원들 (많은 등장인물들의 정리가 필요한 장면) - 출처: 옷소매 붉은 끝동 4화




  <검은 태양>부터 <옷소매 붉은 끝동>까지, 오랜 부진을 겪은 MBC 드라마가 이제는 도약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고 의빈 성씨와 정조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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