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몇 개월 후 대학생활을 앞둔 수험생 동생이 내가 대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술을 적당히 마시겠다”라고 대답했다. 반년에 한 번 술을 마실까 말까 하는 지금과는 다르게, 대학교 신입생 때는 일주일 중 6일은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마신 술은 수많은 흑역사의 원천이 되었다. 이불킥을 불러올 기억들을 수없이 쌓아가면서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게, 주변에 비슷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분명히 즐거웠던 신입생 시절의 기억은 어느 순간 삭제하고 싶어졌다. 졸업 학년이 된 지금 우리는 간혹 신입생 때의 이야기가 나오면 함께 눈을 질끈 감는다. 그렇게 흑역사를 억지로 다시 머릿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그때의 무절제는 청춘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었다고 반성해왔다.
M드로메다 스튜디오의 웹 예능인 <해장님>은 그 흑역사들을 다시 불러낸다. <해장님>은 술을 해장하는 갖은 방법들을 리뷰하는 예능으로, 개그우먼 이은지 씨가 술을 마신 다음 각기 다른 해장거리로 숙취를 푸는 과정을 담는다. “영상에서 술 냄새나요”라는 댓글처럼 술자리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은지는 음주에 있어 엄청난 텐션을 보여준다. 술을 마시고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은 기본이고, 다음날 해장을 할 때마다 “해장을 제대로 했을 때는 반주가 생각나거든요”라며 해장거리를 안주 삼아 다시 술을 마셔버린다. 해물라면으로 해장하고 나서는 소주를, 햄버거로 해장하고 나서는 맥주를 마시는 식이다. 동료들과 “내 인생에서는 한 번에 되는 일이 없었다”며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펑펑 눈물을 흘리고, 다음날에는 왜 울었는지 기억을 못 하기도 한다. <해장님> 속의 에너지 넘치는 술자리들과 그 여파로 퀭해진 다음날의 얼굴을 보면, 걱정은 일단 제쳐두고 놀던 신입생 시절 나와 친구들이 겹쳐 보여 수많은 실수와 흑역사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사실 이은지의 모습을 친숙하게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과하게 신이 나 있던 지난밤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진 경험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을 법하다. 그러나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술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해장님>은 술이 만드는 공기를 잘 담아낸다. 이은지는 길고 힘든 회의가 끝나고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이때가 제일 행복하다”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오가는 대화와 함께 일상의 긴장이 풀린다.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따스한 기운이 피어나고, 그들은 그 순간의 즐거움에 충실하게 녹아든다.
<해장님> 특유의 분위기에는 이은지뿐만이 아니라 제작진들도 일조한다. <해장님> 무한 연장 소식에 제작진들은 파티를 준비하는데, 신이 나서 이은지가 오기도 전에 이미 한 병을 비운다. 제주도 당일치기를 계획하고 떠났다가 급하게 1박으로 촬영 스케줄을 바꾸어 술을 마시신다. 안주들의 인서트를 찍는 것을 잊기도 하고, 횡설수설하며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화면 너머까지 넘치는 즐거움이 전해진다. 구석구석 빈틈이 보이는 듯도 하지만, 특유의 활발하고 팡팡 튀는 분위기와 즉흥적인 전개는 나까지 들뜨게 한다.
물론 <해장님>에 술을 마시고 선을 넘은 실수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어지럽고 정신없던 내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화면 속의 이은지와 제작진들의 텐션에 정신없이 웃다 보니, 철이 없었다고 창피해하기만 하던 과거의 나를 나름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당연히 일정한 선은 지켜야 하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그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엔 그만의 가치와 기쁨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길 요구받는 직장이나 학교 속 일과의 끝에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잠시 힘을 풀어보는 순간은, 끊임없이 이어질 날들에 지치지 않게 해주는 에너지를 준다. 똑 부러지고 깔끔한 신입생 시절을 남기지 못한 것이 마냥 이유 없고 의미 없는 무절제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간순간을 웃음으로 채우며 재밌게 놀고, 그로부터 남은 힘든 기운은 잘 풀어주어 또 하루를 힘차게 달릴 준비를 하는 <해장님>은 현재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깨운다. 그리고 나는 술기운을 없애는 법뿐만이 아니라 ‘흑역사’를 해장하는 법을 배웠다. 과거의 흐트러짐을 창피해하기만 하거나 진심으로 즐거웠던 순간들을 잊지는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했던 면도 있었지만,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스무 살을 즐기고자 하는 열정을 나름대로 분출하는 하는 과정이었다. <해장님> 덕분에 이제는 과거를 떠올릴 때 숙취와도 같은 불쾌한 기분은 날리고, 미래를 더 유쾌하고 개운한 기억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