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당일 친정으로 가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늘 반겨주시지만 반찬으로 뭘 해줘야 모르겠다며 반찬거리 걱정에, 집도 좁아서 사위 보기 민망하다는 엄마의 과한 걱정이 나에겐 마치 빨리 집에 돌아가라는 재촉으로 들린다.
엄마에게 부담과 불편을 주기 싫은 나는 간단한 국수가 먹고 싶다고 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친정 앞 식당에서 미리 식사를 하고 간다. 그러지도 못하면 엄마가 상을 차리고 치우는 옆에서 굉장히 열과 성을 다해 돕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이번 미션도 무사히 완료한 나는 서둘러 집에 돌아온다.
엄마에겐 조금의 불편과 부담을 지워드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엄마의 무거운 짐을 지기도 싫다.
어릴 때부터 늘 듣고 자란 말이 있다.
“너희들 때문에 산다.”
그 말을 듣고 자라면서, 삶의 이유인 나는 엄마에게 조금의 슬픔도 주어서는 안 됐다. 엄마가 울면, 엄마가 떠날까 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엄마가 또 우실까 봐 불안했다.
엄마를 울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가 외출한 사이 물이 아직 흥건한 걸레로 마룻바닥을 닦거나, 용돈을 모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안개꽃 한 다발을 사드리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와 옅은 미소뿐이었기에 나도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 능력으로 엄마의 웃음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무의식적으로 늘 생각했던 것 같다. 결론은 공부밖에 없었기에 죽어라 공부했고,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그 결과,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하여 많은 부모님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정작 엄마와 나는 졸업식 날 집으로 돌아오는 눈길을 걸으며, 서러움에 울고 있었다.
그 긴 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막내딸이었던 나는 엄마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고, 자식들 중에서 가장 걱정을 끼치지 않는 장녀 같은 딸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다른 자식들에게 미처 하지 못한 걱정거리를 나에게 토로하셨고, 나는 내 걱정은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엄마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려야 했다.
그렇게 늘 잘해야 했고, 나 혼자 자라야만 했다.
나의 강박과 불안이 성장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부모님에 대한 내 분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부모님, 특히 엄마의 충격은 내가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그냥저냥 도리만 하는 관계로 살자. 하기엔 이따금 엄마에 대한 원망이 엄마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과 함께 몰려올 때마다 늘 괴로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도 평소엔 좀처럼 연락을 하지 않으셨고, 나 또한 모르는 척 감정을 가라앉히며 지낸 지 오래다.
이번 명절도 감기가 심해져 도저히 하룻밤을 보내기보다는 집에 얼른 내려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점심에 친정에 가서 저녁 버스를 타고 집에 올 예정이었다.
어버이날 이후 5개월 만에 만난 엄마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다. 한 달 내내 감기로 고생하셨다 오늘에야 일어나 앉으셨다고 했다. 나는 또 불안했다. 아픈 몸으로 반찬을 해주시느라 또 아프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수저를 나르고 상을 닦고 반찬을 재빨리 나른다. 점심만 먹고 일어서야 하나 고민하는 나에게 엄마는 내 몸 상태를 보시곤 비도 오는데 자고 내일 내려가라 하셨다. 그런데 나에게 안방을 내어주시면 거실에서 주무셔야 하고 나 때문에 신경 쓰시느라 병이 다시 나실까 걱정도 되고, 내 마음도 불편하여 집에 내려가기로 했다.
버스 터미널까지는 도보 20분. 남편과 딸은 다시 시댁으로 갔고, 혼자 걸어가겠다는 내 말에도 한사코 엄마는 아빠를 대신 보내며 꼭 버스 출발하는 걸 보고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것마저 부담스러웠던 나는 사실 버스가 출발하자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를 보내놓으면 가슴이 아린다는 말씀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나의 잘못도,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리 서로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린 걸까?
평생을 풀지 못할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