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향 Dec 13. 2023

시작의 무게

'일상의 글쓰기' 글감 - [시작]

내게 ‘시작’은 때론 무거움, 때론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무거웠던 건 대표적으로 연애였다. 감히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평생 연애 못 해 볼 것 같아.”라고 친구에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다행히 내 단점은 다 가려지고 장점만 보이는 남자가 기적적으로 나타나서 첫 연애를 시작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그 나이가 되도록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용돈을 모아 손톱깎기세트 선물을 주며 고백했던 교회 친구를 비롯해서 대학 이후에 정식으로 고백했던 남자 두 명과 은근슬쩍 마음을 비쳤던 서넛이 있긴 했다. 게다가, 혼자 숨어서 짝사랑했던 남자도 여럿 된다. 나를 좋아했던 남자의 마음은 모른 척하고, 내가 좋아했던 남자에게는 표현을 못 했다. 그들 중 한 명과도 시작하지 못했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연애가 실패할 수도 있고 도중에 싫어지면 헤어질 때 불편할까 봐 일어나지도 않을 부정적인 결과를 미리 걱정하며 시작도 못 해 본 것이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꾸만 밀어내는 나에게 지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적극적으로 다가와 나를 구해 준 그 남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결혼도 못 해 보고 늙을 뻔했다.
 
승진 준비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어려운 자리에서 일을 해내야 하고, 수년간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해도 잘 될지는 모를 일이다. 편한 일상을 포기하기가 망설여졌고, 많이 노력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나 자신이 못났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겁났을 것이다. 주변 동료들이 열심히 달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며 게으름을 피웠다. 시작이라는 한 발을 떼기가 너무나 무거워 미루고 미루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망설임을 떨쳐 내고 조그만 용기를 내어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만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배우는 일에는 쉽게 나서기도 한다.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잘 덤벼들고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하지만 호기심과 의욕은 넘치나 습관적인 게으름으로 진득하게 결실은 못 맺는 용두사미 격이어서 아쉽다. 이를테면 기타, 플롯, 색소폰, 알토리코더, 피아노, 장구, 꽹과리 등 여러 악기를 야심 차게 배우기 시작했으나 짧게는 한 두 달, 길게는 일 년쯤 하다가 그만두었다. 영어, 수채화, 퀼트, 수영, 탁구, 테니스, 배드민턴에도 발을 담갔지만 참을성이 없어서 실력이랄 것을 쌓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꾸준히 했던 배구까지 최근 목디스크 증상으로 멈추게 되었다.
 
이런저런 배움의 시작과 포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순발력은 좋으나 지구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하더라도 빨리 움직이는 종목은 잘하는데 좀 참아야 되는 데서는 재빠르게 떨어져 나간다. 기타 학원 선생님이 배운 지 하루 이틀 만에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시작은 좋다. 무엇이든지 보통 사람보다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좀 정체기가 오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기 일쑤다. 이것저것 쑤셔 보지 않고 악기든 운동이든 한 가지만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쯤 돈도 아끼고 고수의 반열에도 올랐을 것이다.
 
이제 좋아하던 배구도 못 하게 된 마당에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글쓰기 공부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배움과는 다르게 글쓰기는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늘 미루어 왔던 과제였다. 한 강연에서 이슬아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세 번 더 풍부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마음 한 편에 항상 지니고 있었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블로그를 운영하며 생각을 너무 멋지게 표현하는,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 가까이에 있는데 누구보다 더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책 읽기와 글쓰기로 자신을 가꾸지 않고 그 오랜 세월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흘려보낸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작가를 지망했던 문학소년도, 자신만의 소중한 다이어리를 꾸미며 생각을 정리하는 감성적인 소녀도 아니었던 내가 오십이 넘어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용기를 내 본다. 간단한 계획서나 보고서 외에 일상의 글쓰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너무나 자신이 없고 글솜씨마저 엉터리여서 두렵다. 재능이 없어서 노력해도 될까 봐, 도중에 포기할까 봐,  시작하기에 너무 나이 들었을까 봐 계속 미루어 왔던 일을 이제 작은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본다.
 
힘들어도  가치 있는 일은 시작해야 한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 과정을 겪어 내면서 충분히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고 있다. 지금 이 나이에  겨우 한 발짝을 뗀 글쓰기 배움은 용기 있는 무거운 선택이다. 이제부터는 지구력을 키울 시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