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제주 여행
하버호텔은 높은 곳에서 바다와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곳의 주인인 양 우뚝 서 있었다. 꽤 오래 버틴 건물의 무심한 표정이 있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도착해 객실에 들어갔다. 3층이라 앞 건물에 가려 창문 귀퉁이로 바다가 빼꼼, 코빼기만 보였다. 수필 한 권과 안경집, 카드지갑, 이어폰, 보조배터리를 학생용 백팩에 남기고, 나머지 짐은 한쪽 침대에 쏟아 놓았다. 2박 3일 연수 후, 집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에게 제주에 혼자 하루 더 남겠다고 했더니 '아직 젊구나. 나도 꼭 해 봐야지.' 하면서 부러워했다. 침대에 눕기엔 아까운 오후였다. 10분쯤 눈을 감고 피곤을 식히다 불끈 일어나 가벼워진 백팩을 멨다.
호텔 현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왼쪽은 항구, 오른쪽은 구도시였다. 목적지는 사라봉과 별도봉. 낮은 산봉우리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가야 한다. 블로그 사진에서 별도봉에서 바라본 바다가 넓고 푸르렀으니 왼쪽이겠지?
1분 만에 사라봉 입구가 나왔다. 건입동 표지와 함께 여기저기 조선시대 거상 김만덕 이야기가 붙어있다. 왼편으로 시원하게 트인 바다를 두고 사라봉을 올랐다. 오전엔 파란 하늘에 조각구름 몇 점 떠 있더니, 모두 떠난 오후가 되자 흰색 구름이 조금씩 몸을 부풀렸다. 금방 등에 땀이 배었다. 겨울인데 낮 기온이 19도다. 점퍼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
사라봉 정상은 금방이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길을 물어 별도봉으로 향했다. 바다 전망을 품은 좁은 산길을 걸었다. 흙길이 축축해 흰 운동화에 붉은 진흙이 조금씩 묻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마른 잔디가 곱게 깔린 둥그런 정상에 오르니 수평선으로 나뉜 하늘과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반대편에는 한라산이 가까이 서 있다. 백록담에는 구름이 얹히고, 길고 완만하게 양쪽으로 드리운 산자락은 끝이 보인다. 걸은 시간이 겨우 한 시간 남짓이다. 구름이 아까보다 두꺼워져 분위기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감성이 회색 공기를 가르는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흘렀다.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니 주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 손을 잡은 커플, 나처럼 혼자 온 사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서쪽 하늘이 발그레해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노을진 산과 파스텔톤으로 가라앉은 바다를 향해 셔터를 몇 번 눌렀다. 여기도 찍어달라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산불감시초소 위에 올라간 중년 남자 둘이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나보다 젊어 보였다. 순간 찍을까, 망설였다.
거기까지 가서 그걸 먹었냐는 황쌤의 카톡이 왔지만, 사라봉 아래 분식집에서 먹은 멸치고추김밥과 잔치국수는 아주 짭쪼름하니 맛있었다. 구도시에서 찾은 조그만 카페에는 포니테일을 한 미소가 싱그러운 직원이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 구석 자리에 앉아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꺼냈다. 함축된 비유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 행간을 씹어가며 읽어야 해서 진도가 더디다. 언제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내 글을 김훈 작가가 첨삭한다면 남겨 놓을 문장이 있을까? 느릿한 말투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뭔 쓸데없는 이야기를 이리 주저리주저리 썼냐고 하겠지. 한 시간여를 읽는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안 왔다. 다시 걸어 호텔방으로 가 정관장과 GS의 여자배구 4세트를 보고, 유튜브를 넘기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호텔 아래로 내려갔다. 김만덕 길이 있는 벽화마을이었다. 아침부터 혼자 걷는 여자를 지나가는 주민들이 흘깃거렸다. 여행자는 티가 나나 보다. 조깅하는 아저씨께 물어 숨어있는 지름길을 찾아냈다. 계단 끝에 연안여객터미널이 바로 나타났다. 물품보관함에 짐을 맡기는데, 중년여성 직원이 이용요금이 하루에 2천 원밖에 안 한다면서 노인네들은 그게 아깝다고 짐을 아무 데나 놓고 가서 잃어버린다고 흉을 봤다. 그게 아주 중요한 사람처럼. 아, 그래요? 적당히 맞장구치고, 다시 헐렁해진 백팩에 겉옷을 넣은 다음 용두암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한 회색 구름이 무겁고 낮게 드리웠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한 두 방울 툭툭 떨어지더니 이내 후드득 내린다. 평온히 걷던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 내겐 작은 우산이 있어 문제없다. 언제부터 성격이 바뀌었나 모르겠다. 뭘 미리 준비하는 여자는 아니었는데. 갯내음이 비릿한 항구의 수산 시장을 지났다. 바닥이 질척였다. 오래된 동네가 대부분 그렇듯 낡은 항구 식당들과 길게 이어지는 가게들은 한산했다. 북적이고 활발했을 과거를 떠올리다 이내 멈췄다. 뜨는 곳이 있으면 지는 곳도 있겠지.
하얀색으로 깨끗하게 조성된 긴 방파제 길을 따라 우산을 펴고 걸었다. 하늘은 회남색이고, 바다도 먹빛이다. 육지보다 훨씬 넓은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 둘은 항상 함께다. 늘 그렇듯 하늘과 바다는 선 하나로 나뉘는데 가끔은 그라데이션 되어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바다인지 모를 때가 있다. 경계가 흐려진 풍경 앞에서 생각도 흐려졌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비는 금방 멈췄다. '겨울에도 소나기가 있네.' 중얼거리며 우산을 털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곰만 한 개와 함께 걷는 예쁜 여자, 어린아이들과 함께 온 중국인 관광객 부부 두 쌍, 흠뻑 젖어 달리는 러너들, 혼자서 바다를 보며 서 있는 남자, 일렬로 나란히 서서 새우깡을 든 손을 멀리 뻗은 남녀 대학생들. 갈매기들도 다시 나타나 머리 위를 스쳐 날았다. 갈매기가 새우깡을 채 가면 좋겠다. 그러면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퍼지겠지.
제주 올레길 17코스라고 적혀있는 간판이 보였다. 다리가 점점 아파와 언덕 위 카페에서 좀 쉴까, 건너편에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까 생각하던 즈음에 '와!'하고 탄성이 나왔다. '용연'이 틀림없다. 한천이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 있는 작은 연못. 용연을 가로지르는 흔들 다리도 보인다. 계곡의 주상절리와 녹색 물빛이 중국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새 그 많던 회색 구름이 사라지고, 쏟아지는 햇빛에 반사된 용연의 물빛은 더욱 신비했다. 관광객이 꽤 있다. 외국인들도 여럿 보인다. 용연과 흔들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은데, 부탁할 사람이 없어 셀카만 찍었다. 커다란 얼굴이 배경을 다 가린다. 아무리 봐도 맘에 드는 게 없다. 젊을 땐 셀카도 예뻤는데. 포기하고 풍경만 몇 장 더 담았다.
바닷가로 내려가 갯바위와 용두암을 보았다. 내 나이 또래쯤의 아저씨가 다 큰 아들들에게 여기 온 게 진짜 생각 안 나냐며 놀라워하더니, "용두암이 많이 날씬해졌네."라고 말했다. 점심으로 삶은 돼지고기가 듬뿍 올려진 비빔국수를 먹은 다음, 카페에 앉았다. 언덕 위 카페에는 손님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우리나라는 지금 카페시대가 확실하다. 비행기가 지붕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거의 3분에 한 번꼴이다. 이 마을 뒤편이 바로 공항이라 착륙 직전 고도를 낮추어 내리는 모양이었다. 꼬마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어른들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커피를 마셨다. 나도 아이처럼 비행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책을 펼쳤지만 졸음이 밀려왔다. 같은 줄을 몇 번이나 읽는 줄 모르겠다. 눈치 불구하고 테이블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였다. 달콤했다.
카톡 소리에 눈을 떴다. 남편이 보낸 단밤 사진이다. '단밤 샀어. 얼렁 와!' 잠이 깬 김에 '황송이'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혼자 있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 세월을 낚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허송세월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웃었다. 김훈의 산문 <허송세월>도 읽어봐야겠다. 그가 허송세월하느라 바쁘다 했다지?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번 더 돌고 여객터미널로 걸어가면 시간이 딱 맞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단밤 파는 할아버지 리어카에 중국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여객선에 오르기 전, 공원 데크 바닥에 철퍼덕 앉아 한 봉지에 5천 원 하는 뜨근한 단밤을 까먹었다. 봄 같은 겨울 햇살이 따뜻했다. 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충만하게 썼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냥 흘려보냈다. 입을 닫은 채, 걷고, 앉고, 바라보고, 다시 걷는 동안 특별한 결심도 깨달음도 없었다. 허송세월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너무 또렷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남편과 막내딸이 보고싶어졌다.
따뜻한 미풍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하늘과 바다는 밝은 파랑으로 기분을 바꾸어 청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