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밤 황금빛 대학로에서

완전한 순간

by 솔향

키보드와 기타, 베이스의 단단하면서도 짜릿한 선율이 둥글게 둘러싼 관객들 사이사이에 머문다.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우고는 건너편 거리에까지 퍼져 나간다.


연극을 보고 나오거나, 식당을 나서거나, 카페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을 느슨하게 지나친다. 긴 코트를 걸친 젊은 가수가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그의 목소리가 은행잎을 흔들자, 환한 가로등 아래 거대한 은행나무는 내가 미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황금빛을 쏟아낸다. 오! 그 눈부신 색깔을 만드신 이에게 찬양을. 심장이 두근거린다. 알맞게 선선한 밤공기가 부드러운 음률과 함께 피부를 파고들어 작은 전율을 만든다. "나, 눈물 날 것 같아." 웃으며 말했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콜드 플레이의 <Yellow>가 연주된다. 하얗고 맑은 얼굴을 한 보컬의 음정은 흐트러짐이 없다. 예상치 못한 행운이다. 그의 풍성한 음색이 귓가를 맴돌고, 가을밤은 노랗게, 더욱 샛노랗게 깊어진다. 강렬한 백색 조명 속에서 빛나는 그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노력과 열망, 터질 듯한 감성을. 저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한때 내게도 있었던가? 부럽고, 아쉽다. 원하는 것을 향해 모든 걸 내던지고 한 번쯤 타오를 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


감미로운 팝의 향연이 가을을 멈춰 세우고 마음을 녹인다. 연인들은 키스하고, 젊은 엄마는 어린 아들을 감싸 안는다. 홀로 선 중년의 여인이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비니와 마스크, 환자복을 입은 휠체어에 앉은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청년은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리듬을 탄다. 옆을 돌아보니, 함께 앉은 두 여인도 말없이 단정히 앉아 음악이 있는 쪽으로 눈을 두고 있다. 그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살다 보면 드물게 '완전한 순간'이 찾아온다. 해 질 녘 언덕 위 할아버지 집에서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광경을 우뚝 서서 바라보던 소녀의 시간. 파도가 모래를 쓸어가며 전하는 연주가 어둑한 바다를 지배하던 밤, 입술과 뺨에 닿던 수줍은 감촉, 떨리던 연인의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샹송이 자동차 안을 가득 채울 때, 살며시 손을 포갠 채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가던 저녁, 부부의 시간. 나를 일렁이게 하는 그런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저녁과 밤 사이일 것, 온도는 적당할 것, 음악이 흐를 것(자연의 음악이어도 좋음). 혼자여도,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좋다. 이건 선택 사항.


오늘은 함께라서 더 충만하다. 예기치 않게 내 삶에 훅 들어온 여인들.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마음결, 힘들이지 않아도 맞춰지는 호흡, 가끔 튀는 변주마저 생동감 있고 사랑스럽다. 서로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말실수를 걱정하지 않으며 기꺼이 속을 열어 보인다. 그녀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함께 있는 시간이 편안하다.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이끌어준다. 중년에 만났어도 젊은 연인처럼 자꾸 보고 싶다. 2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종묘와 창경궁, 창덕궁, 혜화동 거리를 하루 종일 함께 걸어도 물리지 않는다.


여인들과 즐기는 거대한 도시의 여유로운 풍경은 시리도록 낭만적이다. 공기의 온도와 밤의 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드는 실바람, 눈부신 노란빛과 번지는 음악, 앉고 서고 걷고 춤추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들. 이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이 현실 같지 않아 미치도록 아까워진다. 이 장면을 오래도록 붙잡아 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든 것을 거기 남겨 두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예정된 시간과 계획된 안정을 깨뜨릴 용기는 없다. 그렇지만 젊음의 거리에서 문득 선물처럼 주어진 꿈같은 시간은, 더없이 '완전한 순간'으로 내 기억의 서랍 속에 담겼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지나가기에 더 아름답다는 것을. 삶이란 언제나 이런 아쉬운 틈새에서 빛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몽골의 짜릿한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