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 도쿄 와이파이 여행

자유는 언제 오는가

by 솔향

토요일 오후, 나른하다. 한숨 푹 자고 싶게 피곤하고, 팔다리, 엉덩이에 근육통이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하는 배구클럽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지난주 일요일에 가고, 오늘이 두 번째이다. 지난주에는 체육관에 있는 세 시간 동안 딸 셋과 엄마한테서 부재중 전화가 돌아가며 열한 번이 와 있었다. 배구하러 간다고 말하고 나왔건만 뭔 나를 찾을 일이 그리 많은지.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왔다. 새벽에 큰 딸과 막내를 공항버스에 태워 보냈기 때문이다. 둘은 도쿄여행을 갔다. 최소한 두 명은 나를 찾지 않겠지. 둘째는 도서관에 있으니 걱정 없고. 큰애는 친구들과 해외여행은 한번 해 봤지만 친구가 짠 대로 따라만 다녔단다. 이번엔 처음으로 자기가 계획해서 가는 것이고 동생까지 책임져야 해 실수할까 불안하다며 잔뜩 긴장한 채로 떠났다. 그래도 올 겨울에 청년대출을 받고, 오피스텔 전세 계약하고, 월세집에서 새 집으로 이사하고, 두 집 청소까지 혼자서 다 해냈으니 이번 여행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오후 5시에 나리타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가는 길인데 눈이 온다고 카톡이 왔다. 도쿄에 눈 내리는 날이 일 년에 2-3일밖에 없는데 운이 좋다나. 나는 어제까지 최고기온 12-13도로 몇 주간 포근하다가, 얘들이 가자마자 영하로 떨어져서 참 날씨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낙천적이라 좋다. 어쨌든, 이제부터 자유다. 월요일도 근무가 없으니 얘들 없는 동안 나만의 시간을 즐겨야지.


7시쯤, 남편이 둘째를 픽업해 같이 들어오더니 밖에 눈이 너무 예쁘게 펑펑 온다며 드라이브 가자고 호들갑이다. 매트리스에 꺼져있는 내 몸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귀찮았다.

"안 갈래."

실망하는 남편의 표정을 모른 척 외면했다. 게으른 여자라 생각하겠지?


한 시간쯤 지나니 컨디션이 서서히 돌아왔다. 뱉었던 말을 번복했다. 안개꽃 같은 눈송이가 탐스럽게도 내렸다. 이미 지붕과 나뭇가지와 인도에 눈이 두텁게 쌓이고 하얀 꽃송이는 보이는 모든 공간을 끊임없이 가득 채웠다. 어릴 적 오늘처럼 눈이 신비롭게 내리던 밤, 둘째 고모와 걸을 때의 고요한 풍경과 설렘이 가슴에 새겨 있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와 둘이서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하고 동영상을 찍고 함박눈을 맞았다. 낭만을 아는 남자랑 살아서 좀 뿌듯했다. 바다와 대교의 조명이 보이는 언덕 위 카페로 갔는데 금방 문을 닫는다고 했다. 눈만 뽀득뽀득 밟다 그냥 내려왔다. 하긴, 폭설에 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와 자동차를 야외 카페 삼아 마셨다.


도쿄 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이렇게 이쁜 눈을 자랑하려 큰애에게 전화했다. 전원이 꺼져 있어 다시 막내에게 걸었다. 막내 것도 마찬가지다. 아까까지 카톡했는데, 무슨 일이지? 이런 상황은 영화관 같은 데 들어가던가, 납치됐던가? 으, 최악의 상황이 상상됐다. 배터리가 떨어진 걸 수도 있다. 근데 둘 다? 그건 희박한데... 설마 별일 없겠지.


10시 20분에 <왕과 사는 남자> 영화가 상영된다. 30분쯤 남았으니 시간이 충분하다. 그걸 보기로 했다. 계속 불안하다. 얘들에게 걱정된다고, 전화해 달라고 카톡에 남기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이야기라 쫀득하게 흥미진진하진 않았지만 사람냄새나는 휴먼드라마였다. 집중을 못하고 점퍼 앞섶에 휴대폰을 감추고 자꾸자꾸 답장이 왔나 들여다보았다. 남편이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 했다.


이윽고 답이 왔다. 둘 다 일본 유심으로 바꿔서 한국번호 통화는 안 되고 보이스톡으로는 가능하다고. 지금은 시내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라며 둘이 함께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보냈다. 어이쿠, 해외 나갈 때 로밍만 하다 보니 그 생각을 못했다. 불안하니 생각이 더 막혔나 보다. 어쨌든 다행이다. 쿨하게 보냈으니 둘이 알아서 할 텐데 사서 걱정이라 이것이 문제다. 신경 끊자. 환상적으로 눈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새벽 1시에, 막내가 사진을 보냈다. 대기 99번이어서 한 시간 줄 서서 초밥 먹은 것과 디저트가 어마무시 맛있었다는 것, 귀멸의 칼날 피규어 산 것, 신주쿠에 사람이 엄청 많다는 것, 만 칠천보를 걸었다는 것 등을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다음 날은 교회에 다녀오자마자, 배구는 빼 먹고 한 시간을 달려 장흥에 굴구이를 먹으러 갔다. 추웠다. 천막을 두른 정남진 식당에서 탱글탱글하고 신선한 굴구이와 굴떡국을 먹고, 직접 서비스용 전도 부쳐 먹었다. 그러고 나서, 칼바람 탱탱 부는 소등섬을 걸었다.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그 위에 남편의 허드레 잠바까지 걸쳤다. 어릴 때 우리 섬에 가끔 오던 미친 여자 같았다. 손이 시려 사진도 겨우 몇 장밖에 못 찍고, 볼이 떨어져 나갈 뻔했어도 좋은 데이트 코스였다. 얘들 없이 둘이 다니는 것도 홀가분하고 좋았다. 도쿄타워 전망대를 들러 점심으로 오므라이스를 먹고 시부야로 이동 중이라고 동영상과 메시지가 날아왔다.


저녁 시간은 편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마저 읽었다. 대학 때 봤는데도, 앞쪽 부분 조금 빼곤 다 새로웠다. 이렇게 깡그리 잊다니, 그것도 놀라웠다. 책을 읽는 동안 와타나베와 그 친구들의 장소를 우리 딸들이 지금 누비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신기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10시 30분이 되도록 얘들에게서 연락이 없는 게 문득 이상해졌다. 막내에게 보이스톡을 했다.

"오늘 안 좋은 일들이 좀 있어서..."라고 막내가 말했다.

둘이 싸웠냐니까, 그건 아니고 자기가 낮에 교통카드를 잃어버려서 기분이 안 좋았단다. 패딩 주머니에 넣었는데 없어졌다고. 또 안 좋은 일이 뭐냐니까, 언니 휴대폰이 변기에 빠졌다고. 왓? 최악의 상황이다. 언니가 전원 바로 끄고 말리고 있는데 괜찮을 것 같다고, 자기가 말했다고 하지 말라며 끊는다.


일본 여행 가서 새로 산 휴대폰이, 그것도 각종 예약한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휴대폰이 변기에 빠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 애가 너무 칠칠맞다. 만약 고장이 났다면?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아이폰 변기에 빠졌을 때 해결법>을 폭풍 검색했다. 전화해서 이렇게 해 봐라. 저렇게 해 봐라 하려다 그만두었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본인도 기분이 저조할 테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 막내 휴대폰이 있으니까 방법이 있겠지. 그래. 잘 될 거야. 밤새 잠을 설쳤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슬쩍 큰애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더니, 오 예! 받는다. 밤새 꺼놨다가 아침에 켰더니 된단다. 변기 커버가 덮여 있어 휴대폰이 떨어져도 들어갈 리가 없는데, 변기통 물통 위에 놓았던 휴대폰이 미끄러지면서 커버와 변기 틈 사이로 빠져 들어갔단다. 일본 변기 이상하다고, 뭐 이렇게 틈이 넓은 변기가 다 있냐고 토로한다. 으휴, 심장 떨려. 오늘 재밌게 놀라고 하고 끊었다. 오늘은 막내가 가장 기다리던 디즈니씨와 디즈니랜드에 가는 날이다. 입장권 예매도 미리 해 놨으니 즐기기만 하면 된다. 도쿄 날씨를 검색해 보니 날이 풀려 화창하다. 최고 9도까지 오르네.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애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소리가 떨린다.

"왜?"

"엄마, 나 지갑 잃어버렸어. 지하철에서 금방 내려야 해서 가방에 안 넣고 주머니에 넣었는데 없어졌어."

맙소사! 진짜 못 살겠다! 가만, 가만. 생각을 해 보자.

"엄마가 혹시 몰라서 엄마 신용카드랑 한국돈 고무줄로 묶어서 니 백팩 안쪽에 넣어 놨는데 그거 찾아봐." "없어. 다른 가방 가지고 왔어. 있는 거라곤 막내 휴대폰 뒤에 끼워져 있는 체크카드 하나인데 그거 될까? 돈 좀 넣어 줘 봐요."

"그거 용돈 카드라 안 될 텐데? 직불카드 아닌가? 일단 돈 넣어 볼 테니까 되는지 사용해 봐. 지금 어디야?"

"지금 디즈니씨 앞. 음료수 하나 사 볼게."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면서 디즈니랜드에 있어야 하나? 호텔까지는 돈이 없어서 어떻게 가지? 한국 사람 찾아서 빌려보라고 할까? 일본 대사관에 전화해 봐야 하나? 머리가 어질어질. 이건 문제해결의 달인인 나에게도 최고난도 레벨이다. 어쩌면 신의 도움 없인 불가능할 지도.

메시지가 뜬다. '해외 승인. 블라블라.'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엄마, 된다! 다행다행!"

"어이구, 진짜 다행이다! 도쿄도 소매치기 많대. 조심해야지. 일단 카드 정지해 놓고, 다 잊어버리고 재밌게 놀아라."

"알았어. 엄마, 고마워. 나한테 너무 실망했는데... 막내 데리고 잘 놀게. 잉잉."

올 겨울에 만들었던 막내 용돈카드가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디즈니랜드 사진이 날아왔다. 날씨도 너무 좋고, 월요일이라 사람이 적어 줄도 짧아 운이 좋다고, 풍경이 정말 예뻐서 힘들었던 기분이 다 날아갔다고 덧붙인다. 다행히 신분증이랑 평소 쓰던 카드는 다 빼놓고, 지갑엔 트래블 카드 한 장, 새로 만든 신용 카드 한 장, 그리고 호텔 방키만 들었단다. 호텔키? 동남아에선 만 원에서 2만 원쯤 내라던데. 여긴 어떤가? 검색해 봤더니, 동남아랑 비슷하던가, 5만 원 지불한 사례, 심지어 40만 원까지 요구한 사례가 뜬다. 아, 또 불안하다. 음. 잊자, 잊어. 닥치면 알겠지. 계속 보내오는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이 빛나는 햇살처럼 밝다.


마지막 불꽃놀이까지 구경하고 8시 30분에 디즈니랜드에서 나온 얘들이 10시 반쯤 호텔에 도착했단다. 편의점에 들러 간식까지 야무지게 사 들고 들어갔다. 운 좋게 호텔키는 공짜였다고.


마지막 날, 아침 8시 반에 호텔을 나온 아이들이 지하철을 이용해, 한번 들어가면 못 빠져 나온다는 159개의 출구를 자랑하는 신주쿠역에서 공항 가는 익스프레스 철도로 갈아타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 비행기가 인천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기쁜 소식. 다시 목포행 공항버스로 4시간을 달려 집으로 귀환한 시간은 밤 11시. 아이들을 보내 놓고도 신경이 곤두서 집구석에서 함께 한 스펙터클한 와이파이 도쿄 여행이 드디어 끝났다. 집에 온 큰애가 한 마디 보탰다.

"호텔키 반납하는 걸 잊어버린 거야. 3개나 되는데. 어제도 무료로 문 열어 줬는데 미안해서 인천공항에서 국제소포로 보냈거든? 근데 2만 4천 원이나 들었어."

으이그, 끝까지 파란만장하구나. 우리 딸 야무진 줄 알았더니, 완전 허당이었던가? 나처럼. 안 보내도 됐을 텐데. 호텔에선 플라스틱에 바로바로 복사해서 쓰던데. 우리보다 훨씬 부자구먼, 그냥 모르는 척하지.

"그래그래. 니 양심 값이라 생각하자. 잘했어."


"근데, 엄마. 도쿄 여행 너무너무 재밌었다! 히힛."

막내도, 큰애도 여행 이야기로 입이 안 멈춘다. 어휴, 나만 힘들었나? 엄마는 자유시간에도 늘 와이파이가 연결돼 있다. 와이파이 끊자,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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