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식곤증의 관계
현자란 모든 것에 감탄하는 자
대학 동기 모임이 서울에서 있다. 토요일 오후 5시 강남에 있는 ‘이자카야 열’이라는 곳에서 만난다. 영암에 있는 친구와 같이 목포역에서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가기로 하고 호텔을 예약했다. 당일 내려오기 힘들기도 하고,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라 뭐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작년 봄에 예술의 전당에서 관람했던 ‘오셀로’가 생각났다. 박호산 배우의 오셀로 역도 너무 멋졌지만 이아고가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었다. 170분의 시간을 온전히 몰입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과연 셰익스피어로구나 감탄하며 연극에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 그래. 이번에도 연극이지!
예매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피지컬 시어터’에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라는 연극을 하는데 계속 예매율 1, 2위를 달리고, 관람평이 아주 좋다. 내 맘대로 일요일 오후 3시로 2장을 예매하고 친구에게는 통보만 했다. 알았다고 한다.
제목이 잘 안 외워진다. 그래도 기대된다. 제작사가 소개하는 내용은 이랬다. ‘조기 치매로 기억이 얽히고 그 기억들조차 잃어가는 한 남자의 사랑과 우정,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삶의 유약함, 그리고 기억이 사라진 순간에도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그려내는 작품’.
옛 친구들을 만나고(어쩌면 그렇게 그대로인지. 지금 우리는 그 시절 우리의 엄마 나이인데도 각자 대화하는 방식, 태도가 변함이 없다. 신기할 노릇.) 다음 날 겨울비 내리는 남산타워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대학로로 이동해 추천해 준 인도 음식점에서 2시 반까지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나서 극장을 찾았다. ‘피지컬 시어터’라는 곳은 없고, ‘아트원 시어터’에서 한다고 한다. 그럼 예매권에 써진 피지컬 시어터는 무엇인가?
관객이 꽉 찼다. 살짝 왼쪽이긴 하지만 앞에서 두 번째 열에 자리 잡았다. 배우의 땀방울까지도 잘 보이는 좌석이다. 연극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자,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처음 시작할 때 소피가 아버지 톰에게 재킷과 넥타이가 어디에 있는지 일러주는 말 외에 대사가 없다. 저 현대무용 같은 몸짓으로만 70분이 흘러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er). 영어의 뜻이 머리를 스쳤다. 극장 이름이 아니고 공연 방식이었구나. 연극 무식자가 처음부터 뭣도 모르고 너무 고급진 것을 골랐다. 끝나고 찾아보니 피지컬 시어터는 바로 '몸짓언어를 음악, 음향, 조명과 같은 무대 언어와 역동적으로 조합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연 양식'이라고 한다.
새롭고 현대적이고 다소 난해하지만 연극은 훌륭했다. 특히 배우들이 표정과 움직임 하나로 소년이 되었다가 중년이 되었다가 티 없이 맑았다가 혼란스러웠다가 공허한 상태로 변하는 것이 경이로웠다. 대사나 노래 없이 오직 네 배우의 역동적이고 섬세한 움직임, 2인조 라이브 밴드의 음향만으로 70분간 관객을 몰입시켰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의자와 책상, 시시각각 바뀌는 배우들의 의상, 주인공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음악이 환상적으로 움직인다. 한순간도 어긋나지 않고 퍼즐로 맞춘 듯 동작과 상황이 이어지는 순간순간이 놀라웠다.
대사가 없으니 배우들의 행동이나 표정에 더 집중하고 사소한 거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의지와 현실은 달랐다. 이런, 점심을 먹은 뒤라 의자에 앉자마자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게슴츠레해진 것이다. 시간은 바야흐로 노인네들이 식사 후 오수를 즐길 때다. 커피라도 마시고 올 걸. 낭패다. 오십의 전환점을 돌자마자 내 몸은 의지와는 다르게 변하고 있다. 하긴 그동안 많이 쓰긴 했지. 소화를 시키려면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소화기관에 혈류가 집중되어 뇌에 산소와 혈액의 공급이 줄어들어서 졸음이 온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더욱 심해지는 것이고.
정신 줄을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극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허벅지라도 꼬집을 지경이었다. 말이라도 하고, 웃기기라도 해야 정신이 바짝 들 텐데 조금씩 다른 움직임들만 계속 이어졌다. 무대에서는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톰이 소피가 준비해 놓은 생일파티에서 입어야 할 옷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것과 관련된 젊은 시절의 행복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기억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흩어지고 만다. 저 붙잡으려는 필사적인 손짓이 내가 졸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랑 닮았다.
극이 전달하려는 것은 단지 치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기억과 삶’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보면 무방할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보였다. 가족이 비슷한 일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소중한 기억을 잃는다면 저 주인공처럼 복잡하고 공허한 눈빛이 될지도 모른다.
삶이 그렇게 비극적이라도 마지막에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며 가족과 친구가 함께 축하하는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것처럼 간혹 띄엄띄엄 돌아오는 기억의 파편과 주변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 인생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빛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세월이 흐르고, 때가 되면 지금의 기억이 흐려지겠지만 우리가 살아온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란 것을.
끝나자마자 영 점 일 초 만에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따라 일어나서 같이 열심히 쳤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대학로의 아르코 예술관 정면에 쓰여 있는 글귀다. 그곳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예술과 문화가 왜 우리 곁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예술은 인간이 만들었고. 결국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을 잃지 않게 한다. 더 풍부하게 살아내게 한다.
예술을 예민하게 즐기는 사람들의 그 감각이 부럽다. <오래 준비해 온 대답>에서 시칠리아를 여행하며 느낀 것을 그토록 멋지게 표현해 내는 김영하 작가가 대단하고,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과 감정을 즐기는 조르바의 미친 감각을 동경한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 흩날리는 눈발 하나에도 가슴 저리도록 낭만을 느끼고 싶다. 한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서서 바라보고 싶다. 모든 것에 감탄하는 자이고 싶다. 나이 들어도 그렇게 뜨겁게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졸음을 쫓아내려 애쓰는 중년이라니.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졸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감탄하려 노력하는 나는 잘못 없으니까. 식곤증이 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