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이 상계획?
제주여행 3일째. 선물같은 하루.
"저, 너무 불안해요. 흐흐. 무계획으로 어딜 가본 적이 없어서." 특수쌤(일행을 특수쌤, 보건쌤, 조 선생으로 부르기로 하겠다.)이 걱정되나 보다. 그녀는 계획을 꼼꼼하게 세워야 하고, 혹시 틀어질 걸 대비해서 1안부터 4안 정도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한다. 4안까지도 생각대로 안 되면 어떻냐고 물었더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단다. 사람 자체가 다른 거다. 당연히 계획대로 안될 수도 있는 거지,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구나. 또 한번 세상을 배운다.
여행 멤버 네 명 중 두 명은 MBTI에서 전략성, 계획성이 강한 J성향이고, 나머지 두 명은 자발성, 즉흥성의 P 성향이다. 나는? 물론 즉흥적이다. 대충 가고 싶은 곳을 정하기는 하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상황이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은 열어 놓는 편이다. 언제, 몇 시에 할 거냐는 물음은 나를 답답하고 화나게 한다. 나도 모른다고. 다음은 진행하면서 정할 거라고. 제발 물어보지 마! 대신, 누군가 나서서 계획해 주면 땡큐다. 아무 생각 없이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면 편하고, 머리 아프게 신경 안 써도 되니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다소 다르더라도 무조건 따른다. 이것저것 머리속이 복잡하지 않으면 만나는 순간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이전까지의 여행에선 항상 특수쌤이 짜 놓은 대로(물론 의견을 받아서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우리는 따라만 다녔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미리 계획 세우지 말고 전날 저녁쯤 어디로 갈지 의논하고,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검색해서 코스, 식당, 카페 등을 정하기로. 특수쌤아,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편안하게 즐겨.
폭설로 막혔던 1100 고지가 어제 오후부터 열렸다. 한라산은 아직 전면 통제이고 내일(토요일)부터 부분 개방이 된다고 한다. 한라산 아래 서귀포에 있는 숙소에서 차로 30분이면 1100 고지에 갈 수 있다. 지금 그곳이 말도 안 되게 예쁘다고 '제주도 카페'에 후기가 올라왔다. 오늘은 일찍 나서서 거기부터 들르고, 마라도와 송악산 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송악산 근처에 '해녀밥상'이라는 진짜 맛있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특수와 보건쌤이 3년 전에 먹었던 곳이라 맛과 가성비가 보장된 집이다.
차 안은 네 명이 뱉어내는 감탄사로 가득하다. 이런 설경은 본 적이 없다. 겨울나무에 가득 핀 눈꽃이 끝없이 펼쳐진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적절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와!", "진짜 멋지다!", "이거 실화냐?", "겨울 왕국이야?" 이런 밋밋한 말 말고는. "얘들아, 이 감동을 표현할 말 없어? 진짜. 책 좀 읽어라!" "튀김옷?" "하얀 밀가루가 뿌려졌다. 튀겨지면 맛있겠다." "벚꽃동산 같기도 하고." 으이구, 선생이란 작자들 표현력 하고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려서 눈꽃 세상에 파묻혀 사진을 찍었다. 행복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살아서 이런 풍광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 동화 속 세상에 온 것처럼, 그곳에서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나이도 잊은 채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기분이 들뜬다. 이번 여행 진짜 잘 왔다.
마라도 가는 배를 타려고 송악 선착장으로 왔다. 아래쪽은 또 다른 세상이다. 눈은 이미 다 녹아 없어졌다. 같은 하늘 아래 맞나? 밥을 먹고, 먼저 송악산 해변 둘레길을 한 바퀴 돌고 나서 12시 40분 배를 타기로 했다. 송악산은 일행 중 나만 유일하게 처음이다. 도는데 한 시간쯤 걸릴 거라고 하니 산책하고 와도 여유 있게 배를 탈 수 있겠다. 뭔가 딱딱 잘 맞는다. 스타벅스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테이크아웃해서 천천히 걸었다. 오전까지 덮여있던 구름이 우리가 걷기 시작하니 걷히기 시작한다. 제주의 구름은 금방 생겼다, 어느 틈엔가 없어졌다 한다. 햇살이 따사롭다. 바람이 간혹 불지만 상쾌한 편이다. 음, 좋다. 송악산 언덕의 조랑말이 정겹다. 중간쯤 가서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청일점 조 선생이 세 여자의 뒷모습을 찍어준다. 사진 속 모습이 엄청나게 낭만적이다.
마라도에 자리한 '마라로 79' 카페에서 마시는 바닐라라떼는 역시 달콤하다. 드넓고 검푸른 남해바다에 낚싯배가 한 스무 척쯤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우리는 그곳을 멍하니 바라본다. 낚싯배 뷰다. 낚시꾼 조 선생이 방어 낚시 포인트라서 그런 거라고 말해 준다. 발바닥도 쉬게 하고 바다멍도 한다.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여유롭다. 대한민국 가장 남쪽 끝 섬에 앉아 있다. 비늘 같은 바다 물결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화롭게 한다. 맞지. 난 섬소녀였지.
두 시간쯤 마라도를 거닐다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면 선착장에 세시 반에 도착할 것이다. 아직 다음 일정을 정하지 않았다. 레드향 농장을 운영하는 아는 동생에게 문자를 해 봤다. 그동안 제주에 몇 번 왔지만 한 번도 못 가봤다. 여기서 가깝다고 한번 들르라고 한다. 다행히 다들 동의했다. 목포에서 한 동네 살았는데 배구클럽을 같이 다니면서 한동안 가깝게 지냈다. 사람 좋아하고, 정이 깊어서 내게도 먼저 살갑게 대했었다. 제주에 정착한 지 벌써 4년째가 됐단다. 시간 참 빠르다. 남편이 레드향, 천혜향이랑 콜라비 농사를 짓고, 바이크 체험도 운영한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해녀인데 내 고향 6시, 인간극장, 아침마당 등 많은 프로그램에 나온 유명인사다. 시어머니 덕분에 빨리 잘 정착한 것 같다.
출출할 시간이라고 맛집에서 에그타르트를 미리 사다 놓고, 따뜻한 청귤차도 대접해 준다. 여전하다. 언니 언니하며 반갑게 대해주는 그녀에게서 따스함이 풍긴다. 일행을 소개해 주고, 서로 사는 이야기를 잠깐 했다. 레드향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달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딸들이 이 맛있는 걸 맛볼 수 있게 집에 택배로 두 상자 보냈다. 조 선생이 네 상자, 특수쌤이 세 상자, 보건쌤도 한 상자를 신청했다. 일행이 함께 팔아주고 홍보도 할 수 있어서 동생에게 면목이 섰다. 다행이다. 가면서 먹으라고 열댓 개를 봉지에 더 담아준다.
"언니, 이 쪽 해안길을 따라 쭉 10분쯤 가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바다를 보고 있는 데가 나올 거예요. 다들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있을 거예요. 거기 내리면 돌고래를 볼 수 있어요." "진짜? 그거 잘 못 본다던데?" "저도 여러 번 봤어요. 한 일곱, 여덟 마리쯤 떼로 다닐 때도 있는데 진짜 장관이에요." "거기서 10분만 더 가면 대정이라는 곳에 '미영이네'나 '덕승 식당'이 있어요. 둘 다 맛있어요. 고등어회나 생선조림 같은 거 해요. 먹고 가세요." 현지인의 조언은 듣는 게 이득이다. 조 선생은 "아이, 돌고래 못 봐요. 이쪽에서 배 타고 낚시를 얼마나 많이 다녔다고요. 한 번도 못 봤어요."라며 초치고 있다.
돌고래를 볼 생각은 못 했다. 그런데 가면서 기도를 했더니 만나고 말았다. 그 귀여운 돌고래 떼를. 이 쪽에 한 열 마리, 저 쪽에 예닐곱 마리. 튀어 올라 재주를 부리는 놈도 간혹 있다. 이 구역이 돌고래 놀이터인가 보다. '우영우'와 '삼달리'에 출연했던 그 돌고래다.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다. 이번 여행 심상치 않네?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
추천해 준 덕승식당의 방어회, 고등어회, 갈치조림, 매운탕은 또 어떠한가. 그 영롱한 빛깔이 찬탄할 만하다. 낚시 도사이자 장인인 조 선생도 진짜 회 맛이 장난 아니라며 "대박이다."를 연발한다. 바로 옆 테이블에 제주 주민인 아저씨 두 분이 식사를 하고 있다. 주인과도 잘 아는 사이인 듯하다.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더니 진짜 잘 먹는다고 자꾸 놀라며 말을 건다. 우리는 술도 안 마시면서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오직 먹는 데 온 정성을 들이고 있다. '맛있다'만 외치며 한 접시 한 접시 전투적으로 클리어해 갔으니 놀랄 수밖에. 가만 보니 우리는 먹는 성향도 다 닮았다. 그래도 잘 먹는다는 칭찬까지 들으니 좀 쑥스럽다.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사이냐고 의아해한다. 나이 대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 존댓말로 이야기하니 궁금했나 보다. 조 선생에게 내일은 한라산을 가야 하니 새벽까지 게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지 혹시 게임 동호회 같은 데서 같이 왔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온다. 웃으면서 전 직장 동료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형이 광주에서 치과를 운영해서 그런지 전라도 사람은 다 정이 간다며 친근한 척한다. 형한테 전화까지 해 가며 전라도를 좋아한다는 걸 증명해 보인다. 거기까지는 오버인데. 하하. 다음에는 방어대가리김치찜을 꼭 시켜 먹으라며 조언해 준다. 작은 대가리는 말고 10kg 이상으로 해달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꼭 다시 오고 싶은 맛난 집이다.
지인과의 돌발적인 만남으로 오늘 하루가 훨씬 재밌어졌다. 추억거리가 많이 쌓였다. 뿌듯하고 특별한 날이다. 인생도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래서 더 재미있는 인생이 된다. 삶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선물하고 그것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실망하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정재찬 교수의 명언과 맞아 떨어진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게 더 낫다.'
내일은 드디어 한라산을 등반한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다른 이들은 아무 걱정 없는데 1년 간 운동을 안 해 근육도 빠지고 체력도 약한 내가 문제다. 새벽같이 나가야 해서 오늘 밤은 술을 자제하고 컨디션을 조절하기로 했다. 그래도 다들 아쉬운지 맥주 한 두 캔씩은 한다. 여행의 묘미는 밤마다 마시는 술인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