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에 일어나서 간단히 준비한 후 배낭을 메고 등산길을 나섰다. 폭설로 이틀 동안 비행기가 결항했고, 수요일 저녁 제주에 도착한 후 목요일과 금요일까지 입산 전면 통제였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다. 대설이 내린 한라산의 눈꽃은 오늘이 가장 아름다울 것으로 기대가 크다. 그동안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몰리고, 주말이라 그 인원은 엄청날 것이다. 새벽같이 나가지 않으면 주차할 곳이 없어서 등산하지 못할 수도 있다.
6시쯤 영실 관리사무소 입구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아직 캄캄하다. 이미 길가에 주차 행렬이 1km쯤 늘어서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봤다. 앗싸, 한쪽 귀퉁이에 주차할 공간 발견. 저 밑에 주차하고 걸어오려면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진다. 좋았어. 첫 단추부터 잘 끼웠군.
10월 어느 날 저녁, 불현듯 이번 겨울 방학에 한라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있다가 단톡에 겨울 제주 여행을 제안했고, 1시간도 안 되어 일정 조정, 비행기표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언젠가는 가야지 생각만 했지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마음이 맞을지는 몰랐다. 단톡방 이름은 ‘한라산이 동네 뒷산이냐’로 바뀌었다. 참 실행력 만렙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사랑한다.
등산을 즐기지 않는 내가 한라산에 가고 싶어진 이유는 1년 반 전쯤 방영했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나서였다. 마지막 회였던가. 이동석(이병헌)이 엄마 강옥동(김혜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는 장면이 나왔다. 엄마는 건강상 중간에서 내려가고 이동석 혼자서 백록담까지 가서 휴대폰 영상통화로 아름다운 절경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날, 만설을 이룬 한라산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서 강옥동의 마음이 공감되고 나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알고 보니 특수쌤의 버킷리스트에도 겨울 한라산 등반이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 처음부터 아이젠을 사용했다. 준비성 철저한 특수쌤이 11월부터 미리 아이젠, 스패츠, 귀까지 감싸주는 방울 모자를 사놓은 덕분에 든든했다. 조 선생은 모자에 장착하는 플래시를 네 개나 가져와서 모두 하나씩 끼워 주었다. 모자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빛이 나와 어두운 길을 비춰준다. 드득, 드득, 드득. 뾰족한 징이 눈에 박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고요하고 어두운 눈길 위로 많은 사람들이 찍어 내는 발자국 소리가 첫새벽 산행을 시작하는 내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울렸다.
드디어 한라산 등반이라니. 기대와 함께 떨어진 체력으로 해낼 수 있을지 약간 긴장이 되었다. 1년간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근력이 많이 부족할 것이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윗세오름까지만 오를 수 있다. 오르는 데는 세 시간 여쯤 걸릴 거라고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등산화에 모래주머니 같은 아이젠까지 차고 미끄러운 설산을 오르는 것은 봄, 가을에 오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려오는 데는 좀 덜 걸린다고 하더라도 왕복 대여섯 시간의 산행이다.
희끄무레하게 여명이 밝아왔다. 눈 쌓인 산길은 한 사람이 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우리보다 앞에 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인 듯 싶었다. 한 명씩 줄지어 걸어가다 보니 속도가 더뎠다. 어린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남녀노소가 따로 없이 이곳을 찾아왔다. 젊은 몸이나, 전문 등산인은 속이 터지겠지만 나는 한 번씩 정체될 때마다 다리를 쉴 수 있어서 좋았다. 설산 등반에서 나는 노약자에 해당되니 부끄러운 몸뚱이다. 대여섯 살쯤 된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와 장인어른과 함께 온 서울 소방대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내 앞에서 씩씩하게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로 시작하더니 계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단은 눈으로 덮여 이미 층은 무시되었지만 이곳이 계단이었다는 것은 옆에 있는 기둥과 가로로 묶여 있는 보호줄로만 알 수 있었다.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보호줄은 발목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내 뒤로도 끝도 없이 줄지어 온다.
숨이 헉헉 차 온다. 정강이와 허벅지가 아프다. 다리가 무거워서 한 발짝 떼기가 힘들 때쯤 “뒤 좀 봐요!” 누군가 소리쳤다. 계단을 오르다 뒤를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하얗게 눈 덮인 한라산 자락이 드넓게 펼쳐졌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이걸 보려고 올라왔구나. 아픈 것도 잊혔다.
경사는 더 가팔라졌다. 잠시 후, 말로만 들었던 병풍바위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나타났다. 숨차오르는 고통을 순간순간 변화하는 대자연으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 멋진 광경을 나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오르막이 끝나고 눈앞이 뻥 뚫리더니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눈꽃 세상이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눈꽃을 단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고 하늘이 많이 보이면서 알프스인지, 천국인지 모르겠다.흥분해서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남편도 모임이 있어 선배랑 호텔에 있다. “자기야, 보여?” 들뜬 목소리로 물어본다. “어, 이쁘네.” “아니, 나 말고 한라산 경치 보이냐고.” “응, 보여, 멋지네.” 기대보단 약한 반응이다. 휴대폰으로 이곳저곳을 비춰 주었다. 내가 이병헌이 된 것 같다.
갑자기 안개가 휘몰아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급박하게 변한다. 히말라야 등반하는 기분으로 눈보라 속에서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가니 어느덧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계단에 앉아서 뜨거운 컵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얼마나 맛있던지 이곳에 올라오면 왜 모두가하는 코스인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기억에 남을 컵라면 먹방이었다.
“정상은 맑기가 쉽지 않다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아쉽네요.” 조 선생이 말했다. “아니야, 이번 여행은 바라는 대로 이뤄지잖아. 내려갈 때쯤이면 좋아질 거야.” “에이, 설마요.”
설마는 무슨. 화장실에 다녀온 5분 사이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져 있었다. 참 신기할 노릇이다. 폭풍 사진을 찍으며 새하얀 세상을 만끽했다.
아무리 아쉬워도 산에 올랐으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하산하는 길은 경치를 즐기며 쉬엄쉬엄 내려왔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지만 보아도 보아도 아름답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눈에 가득가득 담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우선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한편으론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기도 하다.한라산을 등반하고 싶었던 바람도 작은 일이지만 고통을 이겨내고 도전해서 성취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이뤄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발과 정강이와 허벅지는 엉망이 되었지만 이번 도전은 아주 잘한 일이었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뒤따라오면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맞추며 독려해 준 조 선생, 손가락이 얼어도 날씬하고 이쁘게 사진을 찍어주느라 희생한 특수쌤, 어떤 것도 묵묵히 다 맞춰주는 보건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