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통영 가족여행 예정이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에 비 예보가 있다. 논산과 공주로 장소를 급히 바꿨다. 남들 얘기를 들어보면 아이들이 여행계획을 세우고 예약도 알아서 하면 부모는 따라가기만 한다던데 우리 집은 아직도 내가 하고 있다. 대학생 딸들은 가 주는 것도 고마워하라는 건지 선심 쓰듯 따라나선다. 막내는 언니들에게 삐쳐 있나 보다. 엄마, 아빠랑만 가고 싶다고 뾰루뚱해 있다. 설상가상 남편은 3일간 부산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감기에 걸렸다. 기침을 하고 목소리가 잠겼다. 운전이 힘들어 보인다. 시작이 매우 안 좋다.
논산에 도착해서 연산 할머니가 만든 꼬리꼬리한 냄새가 나는 순대국밥을 먹었다. 그놈의 국밥. 남편이 좋아한다. 운전하는 수고를 생각해서 같이 먹어 줬다. 아이들이 원하는 ‘연산문화창고’라는 카페에서 여유 있는 디저트 타임을 보내고 나서, ‘온빛 자연 휴양림’에서 감성 사진을 찍고 ‘딸기향 농촌테마공원’에서 딸기를 사 먹었다. 예쁜 곳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니 다들 기분이 좋아져서 명랑하게 웃고 떠든다. 역시 사람은 먹을 걸 입에 넣어줘야 해. 탑정호 출렁다리 데크를 걸으며 겨울 낭만을 즐기다 4시 32분에 도착하는 바람에 2분이 늦어서 출렁다리 입장을 못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다. 출렁다리를 눈으로만 건너고 '선샤인랜드'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한자로 ‘鍊武臺(연무대)’라고 쓰인 큰 대문이 보였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대한민국 남자의 제2의 고향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논산 훈련소(육군 훈련소) 들어가는 입구이다. 저 문을 두 번째 본다.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절친 S와는 중, 고등학교에 이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갔다. 세상에 없는 인연이다. 발령도 경기도에 함께 받았다.
대학 1학년 때, 학창 시절 내내 하이틴 로맨스를 달고 살았던 나와는 다르게 남자나 연애 따위에 전혀 관심 없어 보였던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과 선배 중에 외모나 성격이 괜찮은 남자가 몇 있었는데 상대는 그중 한 명이었다. 이 친구가 늘 함께 다니던 나를 버리고 연애를 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솔직히 그리 여성스럽게 생기지는 않아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그랬다.(미안하다. S야.)
그들은 동성동본이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결국 사귀다 헤어진 건지, 오빠, 동생으로 지내기로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왠지 물을 수 없는 분위기여서 무슨 관계냐고 정확하게 따져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도 못 물어봤다.) 어쨌거나 선배는 군대에 갔고, 3년 동안 두 사람은 매일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독한 사람들이다. 나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선배가 훈련소에서 퇴소하던 날, 나도 S를 따라 연무대 정문을 넘어갔다. 까까머리 군인 아저씨들의 가족과 연인들로 붐볐다. 나는 애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라서 뻘쭘했다. 우리를 보고, 아니 S를 보고 수줍게 웃으며 경례를 하던 그의 모습이 아련하다. 그의 가족도 왔기에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보내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잠깐 보러 먼 길을 왔나 허망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S의 추억의 한 페이지에 함께 해줄 수 있어 기쁘다. 어쩌면 내게도 소중한 추억이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니었으면 딸만 셋인 내가 언제 이곳에 또 와 보겠는가?
알고 보니 그녀는 사랑에 있어 불도저 같은 여자였다. 4학년, 임용고시 준비에 한창일 때 우리 학교 도서관에 엄청난 킹카가 나타났다. 장동건, 정우성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조각 같은 완벽한 얼굴, 훌쩍 큰 키, 어깨 깡패인 남자가 한눈 하나 팔지 않고, 공부까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끔 쪽지를 남기는 여학생들도 있었으나 눈도 깜짝 않는 도도한 남자였다. 쉬는 시간에 자판기 커피라도 마시며 말을 걸고 싶은 여학생들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점심시간에만 잠깐씩 자리를 뜨곤 했다. 저 남자는 화장실도 안 가느냐는 둥, 그래도 눈 호강이라도 시켜줘서 고맙다는 둥 그녀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무슨 연예인 보듯 말을 걸어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S와 그 남자가 사귄다는 것이다. 친구야, 너에게 어떤 블랙홀 같은 매력이 있는 거니? 결국 그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내게는 한 번도 남자가 없던 동안에 말이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알아본 남편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이다. 정말로 안타깝다. 어리고 상큼했을 때 한 명이라도 만나볼 걸. 아니, 많이 만나볼 걸. 대학 4년, 새내기 직장인이었던 4년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난 솔로였다. 왜 그랬을까? 며칠 전에 자청의 <<역행자>>를 읽고 나서 명확히 알았다. 작가는 열심히 공부한 후 투자해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라고 자존심을 긁어가며 역설했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내가 연애를 못 한 이유를 찾아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어떤 상처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이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상처가 두려워 만남 자체를 피해 버린다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자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정작 지나친 자의식이 사랑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내가 그랬다. 그에 비하면 상처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그녀, 용기 있게 사랑을 쟁취한 내 친구는 얼마나 멋지고 자랑스러운가!
자청은 말한다. 나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자꾸만 밀어내다가 결국 자신이 원했던 상대보다 훨씬 못난 남자를 만난다고. 끔찍하다. 그러고 보니 나를 구해준 남편이 새삼 고맙다. 거절하는 내게 지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다가와 주었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혹시 내 남편이 그 ‘훨씬 못난 남자’인 건가? 에이, 아니겠지. 하하.
시간을 거스른 과거 여행에서 돌아와, 선샤인랜드에서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어 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장소 선정은 성공인 것 같다. 뿌듯하다. 대전으로 들어와 이름난 해물 칼국수를 즐기고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호텔로 들어왔다. 벌써 8시다.
얘들을 따로 자게 숙소에 넣어 주고, 둘만의 장소로 들어오자, 하루종일 감기로 힘들어했던 남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씻고 누우니 편안하고 천국이 따로 없다. 페퍼스와 현대건설의 여자배구를 보며 물어봤다.
“자기야, 내 단점이 뭐야?” “음, 당신은 화를 잘 내지.” “그렇긴 하지. 요새 자꾸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많네.” “아니야, 원래 화를 잘 냈어.” 부글부글하는 감정을 뒤로 하고 다시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그래? 그것 말고 또 다른 단점은 없어?” “있지.” “뭔데?” “화낼까 봐 말 못 하겠어. 크크.” 확 한 대 때릴까?
여행의 첫날이 지나간다. 역시 가족과의 여행이 제일 힘들다. S도 잘생긴 오빠랑 꽁냥꽁냥 이 저녁을 잘 보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