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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Dec 13. 2023

내 고향 옥도

'일상의 글쓰기' 글감 - [고향]

고향 친구들과 1년에 한 번씩 만나기 시작한 지 6년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방학에라도 간간이 보곤 했는데 그 이후로는 다들 소식 없이 살았다. 5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수미가 한국에 잠깐 나오면서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경인이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우리 중 제일 발이 넓은 경인이가 아직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 인맥을 동원하여 친구들 연락처를 모두 모았다. 결혼하고 타지에서 아등바등 살다 보니 서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수미와 근처에 사는 친구 몇이 만났다. 수미는 아직 독신이고 유씨엘에이(UCLA) 대학에서 근무한다고 하는데 자기 이야기를 깊게 하지는 않았다.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 왠지 외로워 보였다. 미국에 한번 놀러 가겠다는 지킬 수 없는 공허한 약속을 하고 절친이었던 수미를 또 보냈다. 그 이후에 한국에 사는 친구들이라도 보고 살자며 회비도 걷고 1년에 한 번씩 여행도 하기로 했다. 목포, 대구, 성남, 다시 목포에서 만났고, 코로나로 건너뛴 후 올해는 시월에 파주에서 보기로 했다. 멀리 사는 숙자가 사위를 본단다. 우리 중 첫 번째다. 내 딸도 아닌데 기분이 묘하다.  

   

내 고향 옥도는 작은 섬마을이다. 주변에 옥도를 아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가 본섬이고 거기서 배로 30분쯤 떨어진 곳이다. 목포에서 배로 세 시간이 걸리고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한다. 예전엔 하루에 한 번이었다. 목포에 한 번 나가는 것이 큰일이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낙도’인 이곳은 다섯 개 마을 전부를 돌아도 맘먹고 걸으면 두세 시간이면 될 정도로 자그마하다. 아홉 살 때까지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아궁이에 불 때서 밥 해 먹었다고 하면 한 20년 차이나는 어른들이 내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그럴 나이는 아닌데 하는 표정이다.


불 때는 아궁이 옆에 연탄아궁이를 만든 게 6학년 때였다. 태양열 전화가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생겼다. 비가 여러 날 오면 불통이었다. 그전에는 언덕 위에 있는 전화국에서 방송이 나왔다. 누구누구 전화받으라고. 그러면 한참을 뛰어가서 전화를 받고 와야 했다. 참 재밌다. 동네 고모가 안내원이었다. 어렸을 때는 초꼬지(호롱)와 양초로 불을 밝혔고, 부엌에는 등잔이 있었다. 열 살쯤 되니 경운기에 커다란 배터리를 연결해 낮에 충전했다. 저장해 놓은 전기로 저녁에 잠깐 동그란 백열등을 켜고, 텔레비전도 볼 수 있었다. 아빠가 낮에 바빠서 충전을 못 하면 경인이네 집으로 달려가서 만화영화를 봐야 했다. 그 후에는 가까운 몇몇 집끼리 묶어 저녁 시간에만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주말의 명화를 한참 보고 있는데 발전기를 꺼서 결말을 못 보게 될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가전제품은 텔레비전밖에 없었다. 한전에서 전기를 공급한 것은 우리 가족이 목포로 이사 온 뒤로도 한참 후였다고 한다. 고 3 때 모두 나왔으니 적어도 내가 대학 들어간 이후였을 것이다.


옥도분교에서 우리 동창은 열 명이 졸업했다. 송경인, 송남희, 송봉호, 송지숙, 송미진, 송희아, 송현심, 송향라, 홍현희, 박숙자다. 송수미는 5학년이었던 우리들과 부둣가를 눈물바다로 만들며 떠났다. 우리 뒷집에 살았던 제헌절이 생일인 송제헌이는 2학년 때 서울로 이사 갔다. 꽤 똑똑했던 아이였는데 엄마 말로는 내가 ‘아무리 잘해 봤자 넌 2등’이라며 기를 죽여서 나를 많이 나무라셨다고 한다. 교육의 힘으로 나는 사람이 되었다. 초임 시절 경기도에서 근무하면서 역시 초등교사인 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옥도분교 출신 내 동창은 제헌이까지 쳐 주면 총 열둘 인 셈이다. 지금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희와 중학교 이후에 연락이 닿지 않는 봉호를 빼고 여덟이 모이고 있다.


이쯤 되면 옥도가 송씨 집성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서로 멀든 가깝든 따지고 보면 모두 친척이다. 그러니 우리 모임의 유일한 남자인 경인이가 러닝셔츠 바람으로 거실에서 함께 자도 우리 중 아무도 그 말 많은 아저씨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 그냥 경순이다.


어린 시절이 바로 어제 일인 듯 눈에 선하다. 플라타너스와 측백나무가 네모반듯하게 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옥도분교 옆에는 폭 2m도 안 되는 길을 사이에 두고 바로 바다가 있었다. 교실에서 창문 밖으로 눈만 돌리면 보이던 바다 경치를 그때는 예쁜지도 몰랐다. 널린 게 그런 풍경이니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까? ‘땡땡땡’ 소사 아저씨가 학교 종을 세 번 치면 수업 시작이고, ‘땡땡’ 두 번 치면 쉬는 시간이었다. 쉴 틈만 있으면 축구를 하던 우리에게 플라타너스 사이로 빠져나가 바다로 들어간 축구공을 장대로 건져 올리는 게 일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책가방을 던져 놓고 먼저 집 옆의 우물로 간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 후,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와 집에 있는 큰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다. 빨리 끝내려고 숙자와 은근히 경쟁하느라 서둘러 걷다 보면 옷이 다 젖어 있다. 방을 쓸고 걸레를 빨아서 닦는다. 다음은 툇마루다. 물걸레로 깨끗이 소제한다. 싸리비로 마당을 쓴다. 빗자루 자국이 일정하고 예쁘게 나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까지는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가끔 공동 우물에서 빨래를 해 널었다. 빨래도 숙자랑 수미랑 같이 하면 재밌었다. 할 일이 끝나면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집에는 남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에 재미없게 집에 있는 건 좀 쑤시는 일이다. 막냇동생을 돌봐야 하면 업고 나가든지 우리 집 마당으로 친구를 불렀다. 팔방, 공기, 고무줄놀이를 했다. 달이 뜨면 집 앞 공터에 모여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하며 또 놀았다.


농번기에 엄마가 일이 많아 늦게 오실 때면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밥을 지었다. 담장을 따라 늘어져 있는 여린 호박잎과 호박순을 따왔다. 물에 된장을 적당히 풀고, 큰 멸치를 여러 마리 넣은 후, 따 온 것을 넣고 불을 때서 끓이면서 마지막에 미원을 조금 넣으면 끝이다. 자신 있는 반찬은 감자매콤볶음이었다. 감자를 납작하게 썰어 간장과 고춧가루와 양념을 뿌리고, 식용유를 살짝 넣어 볶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지금도 가끔 해 먹는 추억의 맛이다. 감자볶음까지 해 놓고 기다리면 밭일에 지친 엄마가 들어오셔서 “우리 딸밖에 없다”고 하셨다.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고단해 보였기 때문에 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보시면 아무것도 안 하고 엄마만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더 많다고 하시려나? 아무튼  잘한 것만 기억난다.


방학이나 쉬는 날에는 친구들과 바다에 가서 굴을 따고 게나 고동을 잡으며 놀았다. 개웅에 빠져 죽을 뻔한 아찔한 일도 있었다. 보리수와 맹감을 따러 산을 헤집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가을이나 겨울에는 산에 가서 갈퀴로 갈색 솔잎을 긁었다. 모아 놓은 것을 갈퀴 등 쪽으로 탁탁 치면 갈퀴나무 묶음이 만들어졌다. 새끼줄이나 칡넝쿨로 묶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바닥에 있는 갈퀴나무 둥치에 수건을 놓고, 몸을 구부려 머리를 대고 나서 천천히 들며 일어섰다. 나도 해냈다. 고개가 빠질 것처럼 아프지만 우리 집 부엌까지 이고 와서 탁 내려놓으면 아주 뿌듯했다. 나무하는 것도 공부고 놀이였다. 그런 것은 다 언니들, 친구들한테 배웠다. 어느 날은 친구들이 낫나무를 하러 간다고 했다. 억새처럼 생긴 긴 풀들이 갈색으로 변하면 그걸 베어 와서 불을 땔 때 쓰는 것이다. 또 따라나섰다가 낫에 손을 여러 군데 베어서 왼손에 흉터가 많다. 친구들보다 일머리는 더 없었어도 노는 것은 나도 지지 않았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다시 일곱 살, 열 살, 열세 살이 된다. 그 시절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끊이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걸 다른 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생각 안 나는 일을 어떤 친구들이 이야기한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간직하기도 한다. 나도 나무하러 갔다고 하면 “너도 그런 일을 했냐”며 놀라워한다. 분명히 저희들이랑 같이 했는데도 딴소리다. “너희 엄마는 엘리트 엄마라 밭일도 안 시키고 욕도 안 하고 때리지도 않아서 부러웠다”라고 털어놓는다. 내가 맨날 놀기만 한 줄 아나? 참 나, 이래 봬도 나는 3학년 때부터 김치도 담갔다고. 엄마가 배추나 열무를 절여 놓고 몇 시 되면 씻어라 일러 주고, 양푼에 마른 고추, 마늘, 양파, 생강, 젓갈, 밥 등을 준비해 놓고 일하러 가시곤 했다. 옆집에 가서 돌절구통에 그것들을 넣고 나무 절구로 곱게 간 후, 씻어서 물기 뺀 배추와 그 시절 필수인 감칠맛 나는 미원을 살짝 넣고 버무리면 맛있는 김치가 완성되었다. 이런 소리를 하면 남편은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러냐고 안 믿는다. 그러게, 나도 그것이 의문이다.


그리운 내 고향, 어릴 적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글솜씨만 있으면 그 이야기로 소설도 한 권 쓰겠다. 진작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좀 써 보고 할걸. 당차고 자신만만했던 어린 나와 내 자랑이었던 아빠, 젊었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소중한 친구들이 보고 싶다.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아빠와 할머니,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나마 고향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단체톡이 있어 안부라도 물으며 지낼 수 있어 다행이다. 이들과는 서로 자기의 처지를 포장하지도,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는 게 신기하다. 얘들아, 파주에서 보자. 먼 게 대수냐. 기꺼이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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