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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Mar 23. 2024

견물생심(見物生心)

일상의 글쓰기 - 글감[가방, 지갑]

국민학교 4학년 선생님이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아이들 열 명이 입에 솔잎을 하나씩 물었다. 그는 돈을 훔쳐 간 사람의 길어진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손들면 선생님만 알고  용서해 준다고 했다. 범인의 침에서만 무슨 물질이 나와서 솔잎이 1cm쯤 자라난다는 식의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 말은 다 믿었다. 얼마나 순진했던지 솔잎이 길어진 아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나도 엄마 호주머니에서 슬쩍해서 과자 사 먹은 적이 있는데 내 것도 길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됐다. 지금은 인권 때문에 쓰면 안 되는 방법이지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다. 간혹 손이 타서 선생님이 이것저것  시도해 봤나 보다. 들킬까 봐 이로 잘라 먹은 아이가 있었을까? 동창 모임에서 그때 훔친 사람 자수하라며 추억을 꺼냈더니 다들 자기는 아니라고 깔깔거렸다. 몰래 눈을 뜨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보인다.


15년 전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꾸 지갑에서 돈이 없어지는 것 같아.” 옆반 교사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가끔 액수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어디에 썼겠거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게 이상했다. 하루는 일부러 세어 보았더니 5만 2천 원이었다. 퇴근 무렵 다시 열어 보니 3만 2천 원으로 변해 있었다. 전부 없어지지는 않고 헷갈리게 조금씩 는 바람에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가방은 늘 교사용 컴퓨터 책상 오른쪽 서랍에 넣고 문을 닫아 두었다. 잠금장치의 열쇠가 없지만 교실에는 항상 학생들이 있었다. 체육 수업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잠깐 비우긴 해도 다른 반 학생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어서 조심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 내 잘못이 컸다.

        

“지갑에 인주를 묻혀서 범인을 잡은 선생님이 있었대. 너도 한번 해 봐.” 친구가 의견을 냈다. 이제부터 잘 간수하지 뭐, 하고 말았는데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 그게 되려나? 싸구려 지갑 겉면에 인주를 골고루 덕지덕지 바르고 에이포(A4) 용지로 감쌌다. 안 써도 그만인 헌 가방에 넣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4학년 2반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급식실로 향했다. 내 뒤로 기다란 복도를 줄 맞춰 걸어오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4반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먹기 시작하는 걸 보고 서둘러 교실로 되돌아갔다. 계단을 올라 3층 복도로 접어들자마자 가운데에 설치된 세면대 앞에 서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문질러 대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번져서 손바닥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 당황하는 표정과 흔들리던 그 눈동자. 쥐덫을 놓아 불쌍한 쥐에게 철철 피 흘리게 한 매정한 인간이 된 듯했다.    

  

말없이 비누를 가져다 조금이라도 씻게 하고선 밥을 먹였다. 하교 후에 둘을 남겼다. 여자아이가 내 지갑에 손을 댄 건 여러 달 되었고, 남자아이가 도운 건 몇 번 안 된다고 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사랑을 주고 있는 선생님의 것에 그랬다는 것이 특히 더 실망스럽다고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고, 그래도 지금 선생님이 알게 돼서 나쁜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 했다.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너희를 믿는다.’ 그것밖에 없었다. 다짐을 받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보냈다. 우리 반에서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더니 그 두 아이도 평온하게 잘 지냈다.  

         

예전엔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딱 맞다. 어려서는 절제력이 부족해서 실수할 수 있다. 대부분 크게든 작게든 번쯤 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잘 가르치면 된다. 커서 안 그러면 된다. 그러고 보니 지갑을 도둑맞았다는 말을 들어본 지 오래됐다. 물질이 풍족해져서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지갑에 돈을 넣고 다니는 일이 드물어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내 가방에도 예전처럼 현금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장지갑은 없다. 운전면허증과 신용카드 몇 장이 꽂힌 조그만 카드지갑뿐이다. 어떤 이유로든 선생이 도둑 제자를 잡으려고 수사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스럽다.  

        

그나저나 아무리 견물생심이라고는 해도 미리 문자로 명품 가방을 가지고 간다고 보여 주자 면담을 허락하고, 그것을 냉큼 받은 장면을 온 국민에게 들킨 우리나라 영부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다시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용서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도 아니니 말이다.  괜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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