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見物生心)
일상의 글쓰기 - 글감[가방, 지갑]
국민학교 4학년 선생님이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아이들 열 명이 입에 솔잎을 하나씩 물었다. 그는 돈을 훔쳐 간 사람의 것은 길어진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손들면 선생님만 알고 용서해 준다고 했다. 범인의 침에서만 무슨 물질이 나와서 솔잎이 1cm쯤 자라난다는 식의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 말은 다 믿었다. 얼마나 순진했던지 솔잎이 길어진 아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나도 엄마 호주머니에서 슬쩍해서 과자 사 먹은 적이 있는데 내 것도 길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됐다. 지금은 인권 때문에 쓰면 안 되는 방법이지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다. 간혹 손이 타서 선생님이 이것저것 다 시도해 봤나 보다. 들킬까 봐 이로 잘라 먹은 아이가 있었을까? 동창 모임에서 그때 훔친 사람 자수하라며 추억을 꺼냈더니 다들 자기는 아니라고 깔깔거렸다. 몰래 눈을 뜨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5년 전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꾸 지갑에서 돈이 없어지는 것 같아.” 옆반 교사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가끔 액수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어디에 썼겠거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게 이상했다. 하루는 일부러 세어 보았더니 5만 2천 원이었다. 퇴근 무렵 다시 열어 보니 3만 2천 원으로 변해 있었다. 전부 없어지지는 않고 헷갈리게 조금씩 비는 바람에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가방은 늘 교사용 컴퓨터 책상 오른쪽 서랍에 넣고 문을 닫아 두었다. 잠금장치의 열쇠가 없지만 교실에는 항상 학생들이 있었다. 체육 수업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잠깐 비우긴 해도 다른 반 학생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어서 조심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 내 잘못이 컸다.
“지갑에 인주를 묻혀서 범인을 잡은 선생님이 있었대. 너도 한번 해 봐.” 친구가 의견을 냈다. 이제부터 잘 간수하지 뭐, 하고 말았는데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 그게 되려나? 싸구려 지갑 겉면에 인주를 골고루 덕지덕지 바르고 에이포(A4) 용지로 감쌌다. 안 써도 그만인 헌 가방에 넣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4학년 2반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급식실로 향했다. 내 뒤로 기다란 복도를 줄 맞춰 걸어오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4반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먹기 시작하는 걸 보고 서둘러 교실로 되돌아갔다. 계단을 올라 3층 복도로 접어들자마자 가운데에 설치된 세면대 앞에 서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문질러 대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번져서 손바닥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 당황하는 표정과 흔들리던 그 눈동자. 쥐덫을 놓아 불쌍한 쥐에게 철철 피 흘리게 한 매정한 인간이 된 듯했다.
말없이 비누를 가져다 조금이라도 씻게 하고선 밥을 먹였다. 하교 후에 둘을 남겼다. 여자아이가 내 지갑에 손을 댄 건 여러 달 되었고, 남자아이가 도운 건 몇 번 안 된다고 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사랑을 주고 있는 선생님의 것에 그랬다는 것이 특히 더 실망스럽다고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고, 그래도 지금 선생님이 알게 돼서 나쁜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 했다.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너희를 믿는다.’ 그것밖에 없었다. 다짐을 받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보냈다. 우리 반에서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더니 그 두 아이도 평온하게 잘 지냈다.
예전엔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딱 맞다. 어려서는 절제력이 부족해서 실수할 수 있다. 대부분 크게든 작게든 한번쯤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잘 가르치면 된다. 커서 안 그러면 된다. 그러고 보니 지갑을 도둑맞았다는 말을 들어본 지 오래됐다. 물질이 풍족해져서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지갑에 돈을 넣고 다니는 일이 드물어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내 가방에도 예전처럼 현금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장지갑은 없다. 운전면허증과 신용카드 몇 장이 꽂힌 조그만 카드지갑뿐이다. 어떤 이유로든 선생이 도둑 제자를 잡으려고 수사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스럽다.
그나저나 아무리 견물생심이라고는 해도 미리 문자로 명품 가방을 가지고 간다고 보여 주자 면담을 허락하고, 그것을 냉큼 받은 장면을 온 국민에게 들킨 우리나라 영부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다시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용서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도 아니니 말이다. 괜히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