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잘 봤다. 논술시험은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전날 밤에 기출문제집의 1번 문제 답안을 쓱 써 보고 갔더니 바로 그게 나왔다. 술술 적었다. 졸업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파주 율곡 연수원에서 신규 교사 직전 연수를 받고, 곧바로 3월에 산본 신도시의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지방에서 올라가 집을 구해야 하는데도 교육청에서는 근무지와 발령일을 며칠 전에 알려주었다. 500만 원짜리 반지하 자취방을 구했다. 방 하나만 빌리는데, 화장실은 주인이랑 같이 사용하고, 부엌은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반지하라고는 하지만 깨끗한 동네에 새로 지은 단독 주택이고 지하로는 4분의 1쯤만 내려가 있었다. 거실 앞쪽에 베란다가 있는데 바닥에서 천장까지 길게 나 있는 넓은 창문으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하얀색을 기본으로 해서 분홍색으로 포인트를 준 화사한 벽지가 맘에 들었다. 실내가 단정하고 깔끔했다. 내 방은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이었다.
엄마와 똑같이 닮은 다섯 살짜리 희규와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선해 보이는 젊은 아줌마, 나보다도 몸무게가 덜 나갈 것 같이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아저씨가 그 집의 가족이다. 거실에는 부부가 가수 양수경과 함께 미소 짓고 있는 사진 액자가 놓여있다. 아저씨와 아줌마가 서울예전 출신이라 연예인 친구가 많다고 자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줌마는 피부도 뽀얗고, 눈도 크다. 그녀도 연극영화과나 뭐 그런 비슷한 학과를 나왔을까? 말이 없는 편인 그녀에 비해 아저씨는 좀 수다스럽지만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아줌마는 먼지 한 톨 안 보이게 쓸고 닦았다. 비누로 빨고 삶은 흰색과 분홍색 걸레 두 개가 늘 바구니에 정갈하게 놓여 있다. 내 수건보다 깨끗하다. 현관문 밖에서 옷의 먼지를 털고,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오자마자 발부터 씻어야 한다. 가끔 퇴근하고 내 방문을 열면 청소가 되어 있다. 방은 깨끗한데 기분은 더럽다. 이쯤 되면 병 아닌가?
가끔 같이 식사하자고 불렀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저씨가 물었다. “포르노 본 적 있어?” 이제 막 새내기 직장인이 된 어린 아가씨에게는 무례하게 들리지만, 그는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황해서 그런 건 안 봤다고 했다. “우리 집에 많이 있어. 갖다 봐.” 하더니 아예 안방에서 비디오테이프 한 개를 들고 나왔다. 아줌마는 말리지도 않고 옆에서 빙긋이 웃기만 한다. 둘 다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서울 사람들이라 다른가? 참, 여기 경기도지. 어쨌든 궁금하긴 했다. 첫 경험이다.
미친. 괜히 봤다.
잠이 들었다. 딸깍 문을 열고 누군가 조용히 들어왔다. 겁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다. 검은 형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저씨가 틀림없어. 깃털처럼 가볍게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나를 완전히 덮었다. 소리쳐야 해! 아줌마가 듣고 달려오게. 온 힘을 다해 보지만 눈이 떠지지도,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다. 돌로 변한 듯 몸이 붙어 꼼짝할 수 없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다. 너무나 무서우면서도 이상하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무거운 공기가 누르는 것 같다. 그놈은 숨만 쉴 뿐 움직이지는 않는다. 문득 깨달았다. 아저씨가 아니다. 검고 두려운 기운이다. 귀신?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숨결이 느껴진다. 내뿜는 입김에 머리카락이 나부껴 목덜미에서 살랑거린다. 소름이 쫙 끼친다.
눈을 떠! 움직여! 손가락 끝, 발가락 끝에 온 힘을 보냈다. 안간힘을 쓰면서 묶여있는 자신을 깨우려고 싸운다. 드디어 ‘악!’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검은 그것은 스르륵, 서둘러 사라졌다. 아무도 없다.
아침, 집안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 사람들이 가위눌린 거란다. 끔찍하게 귓가에 닿던 숨소리와 피부에 스치던 머리카락의 느낌이 생생한데 그것이 꿈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 후로도 깊은 잠에 빠져 마비되어 있는 몸에서 빠져나오려는 상황을 여러 번 겪어서 이제 가위눌림이 뭔지 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날 밤, 난 분명히 깨어 있었다.
얼마 만에 그 집을 떠올린 건가? 아저씨와 아줌마는 잘 살고 계시겠지? 내게 비디오테이프를 권유한 것 빼곤 참 좋은 분들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