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일상의 글쓰기 - 글감[거짓말]
이번 주 ‘일상의 글쓰기’ 주제가 ‘거짓말’이네요. 처음엔 이번에도 어떻게든 써지겠지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막막한 거예요. 토요일이 다가와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 점점 더 당황스러웠어요. 눈을 감고 찬찬히 어린 시절 기억부터 되짚어 봤어요. 부모님 푼돈을 훔치고, 참고서 값을 부풀려서 받아 내고, 핑계 대고 모임에 빠진다거나 하는 사소하고 재미없는 것만 생각났어요. 아,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내가 키를 속였다며 사기 당했다고 말하긴 했어요. 연애할 때는 10cm 굽에 긴 통바지를 입고 다녔거든요. 이것도 거짓말인가요? 하하. 글로 엮을 만한 에피소드 하나 없이 참 싱겁게 살았네요. 이번엔 포기하려는데, 문득 그때 일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6학년 여름 방학이었어요. 건넛집에 사는 은영이가 우리 섬에 대학생 언니, 오빠가 많이 왔는데 친구들을 학교로 데려오라고 했다며 찾아온 거예요. ‘농활’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어요. 교실에는 이미 여러 아이가 열댓 명쯤의 대학생 언니, 오빠와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고 있었어요. ‘이슬비’라는 동요 알지요?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는 거요. 거기에 ‘뽕’과 ‘짝’을 넣어서 바꾸어 부르자고 하더라고요. ‘이슬뽕 내릴짝 이른 아침뽕짝, 우산 셋뽕 나란짝 걸어갑니뽕짝. 빨간우뽕 파란우짝 찢어진 뽕짝, 좁다뽕 학교길짝 우산 셋이 뽕짜라 뽕짝 뽕짝. 이마뽕 마주대짝 걸어갑니뽕짝.’ 다른 아이들은 헷갈려서 자꾸 틀리는데 나는 단숨에 끝까지 불렀지요. 여러분도 따라해 보라고 길어도 친절하게 다 써서 알려 주는 거예요. 재밌지 않나요?
잘생긴 오빠가 다가와서는 “너 정말 똑똑하구나!” 하며 머리를 쓸어 주었어요. 오! 금빛 가루가 하늘에서 뿌려졌어요. 별빛이 내린다는 ‘샤랄랄라’한 노래 아시죠? 바로 그 장면처럼요. 짙은 눈썹과 그윽한 눈, 하얀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가 마치 <캔디>에 나오는 테리우스가 현실에 태어난 듯했어요. 서울말은 또 왜 그리 멋진 건가요? 그날 밤에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고 미소가 아른거려서요.
이튿날은 일어나자마자 학교에 갔는데 아쉽게도 아무도 없었어요. 점심시간쯤 되자 아침 일찍부터 논에서 피를 뽑았는지 옷이 엉망이 돼서들 돌아왔어요. 오후에는 낚시하러 가자더군요. 대나무에 낚싯줄을 매달아 바닷물에 던지면 문저리(망둥어)가 계속 올라왔어요. 우리 섬마을은 뻘이 넓어서 문저리가 많이 잡힌다고 어른들께 들었는데 정말이더라고요. 낚시가 처음인 사람이 많았나 봐요. 언니들이 높은음으로 '꺄악' 소리를 지르며 굉장히 좋아했어요. 오빠가 웃는 건 햇살 같았고요. 그의 주변에서만 맴돌았지요.
밤에 운동장에서 캠프파이어를 했어요. 친구도 여러 명 왔어요. 처음 경험하는 여름밤의 축제였지요. 가슴이 콩콩 뛰었답니다. 테리우스 오빠가 제 손을 끌고 옆자리에 앉혔거든요. 불꽃을 바라보며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하고 어제 배웠던 노래를 함께 불렀어요.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연가에 맞춰 오빠와 내 손바닥이 번갈아 닿았지요. 이렇게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요? 오빠는 우리 가족과 학교, 섬이 궁금했나 봐요. 도란도란 이야기했어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니 향기가 퍼지는 것 같았어요.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눈빛을 받으면 우주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 설마 모르시진 않겠지요?
다음 날,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데도 논에 일하러 간 오빠가 걱정됐어요. 오후 햇볕이 한풀 꺾이자 은영이랑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빨래하는데 저만치에서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오빠가 보였어요.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나풀거리는 원피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한껏 치켜 묶은 낯익은 언니가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거든요. “어머, 꼬마들이 빨래하네. 너무 귀엽다!” 그녀가 오빠한테 붙어서 여우같이 말했어요.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구경거리가 된 것 같기도 했고요. 고개를 숙이고 비누질한 옷가지만 비벼댔어요. ‘대낮에 뭔 짓이람. 저 언니, 이쁘지도 않고 둘이 하나도 안 어울린다. 뭐.’ 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지 모르겠어요. 가슴이 찌릿하게 저려 왔어요. 나는 바본가 봐요.
그다음 날에도, 아이들이 모두 선착장에 배웅하러 나간 마지막 날에도, 집에 박혀 있었어요. 오빠는 날 찾았을까요? 내가 왔는지 몇 번이고 뒤돌아봤을까요? 그해 여름은 바깥에 나가 놀지 못했어요. 모두의 첫사랑은 ‘날카로운 추억’으로 기억되나 봐요. 첫 키스가 빠져도.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한참 지나서 서울에서 우편물이 왔다며 선생님이 사진을 나눠 주셨어요. 놀이하고 낚시하며 즐거워 보였어요. 단체로 정면을 보고 어색하게 찍은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 오빠가 되게 못생긴 거예요. 내 테리우스는 어디로 간 거죠? 내 눈이 거짓말한 걸까요, 내 마음이 눈을 가린 걸까요?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 이해되시나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문우 황성훈 선생님은 정말 재치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번에는 정말 쓸거리가 없어서 건너뛰겠다고 했더니 지어서 쓰고 결론에서 모두 거짓이라는 걸 밝히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무릎을 탁 쳤어요. ‘기발한데!’ 하고요. 사실, 위 내용은 대부분 ‘뻥’이에요. 좀 더 진한 사랑 이야기로 그리려다 들킬까 봐 있을 법하게 꾸몄는데, 어때요, 좀 약했죠? 혹시 도중에 눈치채셨나요? ‘하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제발 속은 척해 주세요. 진실도 조금은 숨어 있으니까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