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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May 18. 2024

할머니의 두부

일상의 글쓰기 - 주제[부엌]

“내가 여덟을 키웠어도 멍청한 아그들은 하나도 없었는디, 이렇게 영리한 애기는 첨이랑께.” 제 손녀여서겠지만, 아직 돌이 한참이나 남은, 고물고물 기어 다니는 아기가 할머니가 ‘끙’하고 힘겹게 일어나는 기미가 보이면 먼저 가서 요강 뚜껑을 열고, 등이 가렵다며 “효자손 들고 오니라.” 하면 알아듣고 심부름까지 한다고 자랑이 대단했단다. 내가 태어날 무렵, 그러니까 40대 중후반부터 할머니는 심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방에 들어앉았다. 그러고는 자식, 손자, 농사, 날씨, 온갖 걱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 가족은 살림을 따로 나서, 할아버지 댁에서는 혼기가 차지 않은 여섯째 고모가 할아버지 농사를 돕고 노할아버지까지 모시며 부엌살림을 했다. 할머니는 엄마를 못마땅해했지만 손주들은 귀하게 여겼다. 특히 첫 손주라서 나를 애틋해했다. 나도 늘 아픈 할머니가 애잔했다. 그 끈질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했다.


중학교 1학년 첫 학기를 외삼촌 댁에서 잘 살아 내고 나니 드디어 여름 방학이 왔다. 몇 달 만의 귀향인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고 햇볕은 거침없는 날이었다. 고모도 시집가 버리고 없는 부엌에서 할머니는 바닥을 북북 엉덩이로 밀고 다니면서,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폈다. “눈칫밥 먹니라고 내 새끼 을마나 고생했을꼬.” 어린것이 집 떨어져 얹혀사는 것이 안쓰럽다는 것이다. 성치 않은 몸을 끌고 땀을 뚝뚝 흘려가며 음식을 장만한다. 고모 대신 내려와 있는지, 막내 삼촌이 아궁이에서 막  내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찹쌀 반죽을 절구로 찧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삼촌이 있어 신난다. “고소한 고물에 굴려서 인절미 해 준단다. 근데 삼촌은 처음 봤다. 아부지가 낙지 파러 가시는 거. 너 준다고 나가셨어.” 하며 웃는다. 오전에 농사짓고 점심 먹으러 들어온 틈에도 책을 읽지, 갯벌 같은 데 가는 분은 아니었다. 온몸이 뻘 범벅인 채 돌아온 할아버지가 묵묵히 낙지 바구니를 내밀었다.


할머니의 두부를 처음 먹어 봤다. 콩 비린내가 안 난다. 간이 적당하고 담백하다. 뜨끈해서 더 고소하고 풍미가 있다. 거칠고 단단한 식감도 좋다. 이렇게 맛있는 두부도 있구나! “많이 먹어라이, 낙지도 더 먹어라, 아이고, 이렇게 빼빼 말라서 되겄냐.” 이상하다. 할머니가 하는 말이 듣기 좋은 노랫소리 같다. “으째 이렇게 쪼깐허냐. 키도 안 크고.” 거드는 할아버지의 한마디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뭐가 들었길래, 포근하다. 가슴이 꽉 찬다.   


대학 2학년 벚꽃이 어여쁘게도 떨어지던 날, “남선아, 남선아!” 아파트 마당에 애간장을 저미는 소리가 퍼져 울린다. 이름을 불러 대는 사람 목소리에 어쩌면 저런 고통이  수 있을까? 모두가 와서 울고 흐느껴도 조용히 눈물만 맺혀 떨어질 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온몸이 떨리고 슬픔을 주체할 수 없다. 아빠를 떠나보낸 자식과 아들을 잃은 부모 중 누가 더 애통할까? “할마이를 리어카에 싣고는 같이 밭에 가드라 안 하요. 두 노인네가 농사지어 손주들한테 힘이 돼야 한담.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서 혼났소.” 얼마쯤 지나 6촌 고모가  엄마에게 전하더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다. 첫 월급을 받았다. 우체국에 가 섬으로 용돈을 부쳤다. 이제 걱정 마시라고. 자취방으로 전화해서 또 운다.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다. “으뜨케 우리들까정 생각했냐? 내 새끼 불쌍해서 으짤끄나. 그 어깨가 을마나 무거울 것이여. 오야오야, 고맙다. 인자 다시는 보내지 말그라이. 한 번이믄 되얐다이.”          


발령 받고는 명절에도 거의 찾아뵙지 못했다. 대학에 다니던 큰동생은 여객 터미널에 갔다가 풍랑 주의보가 내려서 돌아왔단다. 다음 날에 잠깐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새벽같이 또다시 배 타고 섬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다. 주의보 때문이었을까? 그해 유독 고모도 삼촌도, 아무도 다녀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설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선창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하드라. ‘우리 장손은 올라고 했는디, 파도가 세서 배가 안 떴다’고 서.” 고모가 애달파한다. 늦게라도 가서 뵙고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후회가 덜 남았을까? 이럴 땐 섬이 밉다. 섬은, 외면하고 싶은 외로움이고 아픔이다. 할머니의 마지막은 지독히 외로웠을 테다.


두부를 싫어한다. 몸에 좋다고 하니 억지로 조금 먹어 본다. 물컹한 식감도 별로고, 콩 비린내인지 간수 냄새인지, 그것도 거북하다. 할머니의 두부 맛이 나는 게 있나 소문난 손두부 집에도 찾아가 봤다. 훨씬 낫다. 그래도 역시나 그 맛은 아니다. 부엌에서 콩물을 끓이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가 할아버지의 낙지 바구니를 구경하고서는 인절미에 콩가루를 묻히고 있는 삼촌과 재잘거리는 의기양양한 어린 계집애를 떠올린다. 선명했다가 아련해진다. 미소가 지어졌다가  아파 온다.


농막 뒤편의 붉은 인동초가 살랑이는 게 다. 다시 눈을 들어 멀리 본다. 오늘도, 하늘이 유리알 같다. 할머니의 두부가 그립디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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