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엄마의 임용고시
칼날처럼 날카로운 아침 공기가 볼을 때린다. 차가운 얼음 아이스크림을 급히 넘겼을 때처럼 머리가 띵하다. 급히 목도리를 머리까지 두른다. 온화한 남도에 사는 내게 이런 매서운 추위는 정말 오랜만이다. 여섯 시 반 알람에 눈 떠 일곱 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딸과 함께 군데군데 얼음이 박혀 있는 보도블록 위로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가 도착한다는 시간까지는 아직 20분쯤 여유 있지만 미리 가서 기다려야 한다.
내가 롱패딩을 챙겨 올라오지 않았으면 딸은 짧고 얄팍한 점퍼로 어쩔 뻔했나? 어제부터 경기도청, 수원시, 화성시에서 보낸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한파주의보 안내 문자가 연달아 울렸다. 이 겨울에 딸은 패딩 안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었다. 숙소 옷장에 걸려 있는 걸 보고는 탄식이 나왔다. 소매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치마 쪽도 봄에나 입어야 할 두께다. 면접 때 입을 옷을 한 벌 사라고 돈도 보냈는데, 겨울옷은 너무 비싸서 이걸 샀단다. 면접하는 실내는 따뜻하다며. 속이 터진다.
패딩 아래 보이는 얇은 스타킹의 다리가 시퍼렇다. 영하 13도란다. 담요를 허리에 묶어 늘어뜨려 주었다. 따뜻하다며 웃는다. 일기예보도 보면서 단단히 준비 좀 하지. 스물네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게 엄마 맘인가 보다. 전날 답사했던 대로 10분을 걷고 10분을 더 기다려, 딸은 수원 201번 버스를 탔다.
29년 전의 수원도 이렇게 추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차가운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듯 오히려 머리는 쨍하도록 맑아졌다. 임용고시를 치르려고 수원의 정자초등학교 근처 한 하숙집에 들었다. 지필고사 다음 날에 면접시험이 연이어 있었나 보다. 두 번 온 기억이 없다. 광주에서 올라와 이 하숙집에 묵은 친구가 스무 명이 넘었고, 주변의 다른 숙소에도 동기생이 많았다. 그중 절반은 합격하고, 절반은 재수생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진짜 춥다’며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면접 때 입을 정장이 없었다. 벌이가 없는 엄마에겐 필요한 걸 말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4학년 땐 공부만 했으므로 돈은 없었다. 수원에 올라가기 며칠 전에 고등학교 친구 베토순(이름이 생각 안 난다. 베토벤의 머리 모양을 꼭 닮은 심한 곱슬머리여서 붙여진 별명이다.)이 자기 언니 옷을 빌려주겠다 해서 그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언니는 없고 베토순 엄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짧은 치마 정장을 빌렸다. 회색 가을옷이었다. 내게 맞는 옷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 추웠던 날 수원에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시험을 잘 봐서, 졸업식도 참여하지 못하고 연수원에서 합숙 연수를 받았다. 3월부터는 내가 번 돈으로 옷을 살 수 있었다. 1996년이었다.
2025년 1월 10일, 딸의 임용고시 2차 시험, 3일간의 여정도 무사히 끝났다. 딸이 잠을 못 자 불안해해 감기에 걸린 몸으로 연가를 내고 목포에서 출동했다. 첫날에는 기다리던 택시 예약에 실패하고, 출근 시간이라 택시를 못 잡아 결국 남편 친구에게까지 SOS를 쳤다. 혼자였으면 얼마나 걱정되었을까 생각하니 올라오길 백번 잘했다. 따뜻한 죽이라도 먹여 보내고, 도시락과 간식도 꼼꼼히 챙겨 줄 수도 있었다. 번호를 잘 못 뽑으면 다섯 시까지 벌설 수도 있어 대비해야 하니까. 셋째 날에도 딸을 보내고 숙소에 남아 짐을 정리해 체크아웃하는 걸 도울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마지막 공부하면서 준비할 게 많아 긴장될 텐데, 짐 챙겨 시험장까지 들고 가려면 새벽부터 혼자서 번거롭고 정신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늦으면 큰일이고. 안다. 다 쓸 데 없는 걱정이고,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했을 것이라는 걸. 누가 보면 헬리콥터 맘이라고 할까? 그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단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안정감을 주는 엄마 노릇을 중요한 순간에 한번쯤 해 주고 싶었다.
마지막 날 영어면접에선 운 좋게 1번을 뽑았단다. 배낭에 넣을 최소한만 남기고 근처 우체국에 가 택배로 짐을 부치고, 가볍게 둘이서 남은 시간을 즐겼다. 우리 딸이 꼭 한번 가고 싶었다는 행리단길에 가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 행궁과 미술관에 가고, 함께 네 컷 사진으로 추억을 남겼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고단하게 1년을 보낸 딸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다. 그 1년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공부했다며 안쓰러워하는 나를 안심시킨다. 언제 이렇게 속이 찼을까? 끝난 걸 맘껏 축하해 주고 함께 행복해했다. 낮 최고 기온이 영하 5도라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다.
딸은 원하는 대로 서울에 자주 갈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겠지. 1차 시험을 잘 봐서 떨어질 걱정은 없을 거란다. 면접과 수업실연도 잘 했단다. 내가 걸었던 길을 딸이 걷는다. 조금 아쉽기도 하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딸이라서. 내가 가르쳤던 때와는 또 다른, 녹록치 않은 학교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잘 이겨 내고 보람을 느낄 수 있을지 한편으론 또 걱정이다.
29년 전의 명랑하고 상큼했던 내가 떠오른다. 언제 그 많은 세월이 가 버렸을까?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다 보낸 것 같기도 하고. 아이 셋 키우다 보니 다 가버린 것도 같고.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세월이 고통스럽고, 가슴 아프고, 기쁘고, 뿌듯한 일로 가득하다. 후회도 된다. 자주 화냈던 것, 많이 게을렀던 것, 가까운 이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던 것. 우리 딸은 후회 없이 잘 살아 내길 바란다. 나보다 훨씬 지혜롭기를.
착하고 야무진 내 딸, '너'의 찬란한 삶을 응원한다.
PS. 갑자기, 베토순에게 빌렸던 옷을 세탁도 하지 않고 돌려준 게 생각난다. 그땐 그래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참 미안하다. 아직도 목포에 살고 있을까? 아니라면 친정에는 가끔 올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