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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Nov 23. 2024

남편이 행복한 이유는?

일상의 글쓰기 [글감-부부, 남편]

  

11월인데 따뜻하다. 금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수원으로 향했다. 세월은 이렇게나 흘러 벌써 우리 큰딸 지성이가 임용고시를 치른다. 아침에 늦잠 자는 바람에 교문이 닫혀 시험장 밖에서 동동거리는 꿈을 자꾸 꾼단다. 낯선 도시의 호텔에서 혼자 자려니 걱정되나 보다. 시험일이 토요일이어서 마음이라도 안정되게 옆에 있어 줘야지. 근처 구경도 좀 하고, 데리고 내려오고.     


여섯 시 반쯤 도착하니 벌써 어슴푸레해졌다. 우리가 잡은 호텔은 딸이 묵는 곳 바로 맞은편이다. 횡단보도 건너에서 지성이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남편 얼굴에도 미소가 환하다. 딸을 보자 긴 시간 운전으로 쌓인 피로도 싹 풀리나 보다. 맛난 저녁을 사 주고 싶지만, 고깃집은 지나쳤다. 면 요리도 안 된다. 시험 전날 저녁은 소화 잘되는 걸로 간단하게 먹어야 하니까. “저건 어때?” 남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육개장이라고 쓰인 글씨가 보인다. 뭐여, 뻘건 국물, 평소에도 싫은데 시험 전날 육개장이 웬 말? 아내나 딸이 좋아할 만한 깔끔한 음식을 고르는 눈치는 별로다. “어, 아빠. 난 그것도 괜찮아." 역시 우리 딸, 이제 다 컸다. “너 별로 안 좋아하잖아. 네가 먹고 싶은 거 말해. 다 사 줄 테니까.” “그럼, 나 솥밥 먹어도 돼? 점심때 비싸서 못 먹었어.” “얼만데?” “만 오천 원쯤?” “아이고, 엄마 아빠가 그것도 못 사 주겠냐? 진즉 말하지.”


인테리어가 화사하고 정갈한 상차림이 입맛을 돋우는 식당에서 딸은 닭목살 솥밥, 나는 전복 솥밥, 남편은 국물이 있는 해물장 솥밥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아, 소주! 그래서 육개장이 눈에 들어왔구나. 눈치는 내가 부족했네.       


다 같이 편의점에 들렀다. 아침에 간단하게 요기할 야채죽과 쉬는 시간에 먹을 맛밤, 초콜릿을 골랐다. 일곱 시에 깨워 주고, 딸이 준비할 동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가기로 했다. 마침 바로 아래 카페가 일찍 문을 연다. 시험장에는 여덟 시까지 도착하면 여유 있다. 지성이는 스터디 카페로 갔다. 마무리 공부를 하고 열 시쯤 자겠다며. 아침 식사도 부실할 텐데 배고프고 당 떨어지면 안 되겠지? 들어오는 길에 바나나와 샤인머스캣을 더 샀다.    

      

씻고 나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노곤하다. 티브이를 다. 정관장과 현대건설의 여자배구 중계가 한창이다. “그냥 자려고?” 남편이 묻는다. 아, 귀찮아. “나가서 맥주 한잔만 하고 오자. 여기까지 왔는데.” 불쌍한 표정으로 보챈다. “너무 피곤해. 조금만 쉬었다 나가자.” 내 계책이 통해야 할 텐데. 오늘따라 정관장이 너무 잘해서 장난 아니게 재밌다. 남편도 옆에 눕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곤다. 아싸! 성공.      


열두 시.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 시부터 불 껐는데 말똥말똥하다고. 내일 일곱 시 30분에 전화해 달란다. 긴장되나 보다. 두 시 반. 또 휴대폰이 울린다. 울었는지 코맹맹이 소리다. 엄마 옆으로 오고 싶단다. 남편이 방 바꿀 채비를 한다. 4년 전, 수능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새벽까지 잠이 안 와 아침에 겨우 두 시간쯤 눈 붙이고 시험 보러 갔었다. 뱃속에 뭐라도 들어가면 효과가 있을까 싶어 바나나 한 개를 먹였다. 수면 음악을 틀었다. 딸이 뒤척인다. “음악 끌까?” “응.” 누에고치처럼 몸을 고정하고 호흡을 고르게 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옆 사람을 따라 자는 수가 많다. 딸 숨소리는 거의 안 난다. 잠든 건가? 아직인가? 살그머니 휴대폰을 들었다. 세 시 반이다. 혹시나 자세를 바꾸면 깰까 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30분마다 기도하면서. ‘푹 자게 해 주세요. 아는 문제만 몽땅 나오게 해 주세요. 아니, 주님 뜻대로 해 주세요. 그냥 행복하게만 해 주세요.’ 기도가 오락가락 난리 부르스다. 다섯 시가 넘었다. 이런, 화장실이 급하다. 물소리에 깨면 안 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건 고문이다. 참다 참다 천천히 살금살금 움직였다. 휴, 이제야 살겠다. 벌써 여명이 튼다. 킁. 내 콧소리에 놀라 깼다. 그새 나도 졸았나 보다.


“음악 끄고 나서 바로 잤어.” 다행이다. 혹시나 해서 따라온 보람이 있다. "첫 문제 보고 당황하지만 않으면 절반은 성공이래. 지성아, 파이팅!" 시험장에 들어가면서 딸이 대답한다. “알았어. 아, 기대된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참, 재밌는 수험생이구먼. 덕분에 우리도 가슴 졸이지 않으마.  

     

교문이 닫히자, 수원 시립미술관에 들르고, 거리에서 타코야키를 사 먹고, 행리단길을 지나 화성 성벽 둘레길을 한 바퀴 걸었다. 샛노란 은행잎과 은빛 억새 사이, 나들이 나온 젊은이들이 발랄했다.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다녀도 햇볕이 뜨거웠다. 11월이 맞나 싶게. 커다란 갈색 이파리가 떨어지는 오래된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가을 냄새를 맡으며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시원했다. “지성이는 좋겠다. 엄마 아빠가 멀리까지 와서 챙겨 주니.” 남편 말에 나도 거들었다. “맞아. 나도 예전에 수원에서 임용고시 봤는데, 나 혼자 다 알아서 했지. 그치만 그때랑은 시대가 다르잖아. 우리는 도와줄 수 있는 처지니 와서 응원해 주면 좋지. 그리고 난 친구들 여럿이랑 한 하숙집에서 자니까 서로 의지 됐지만 지성이는 혼자잖아.”  

   

수험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기 딸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종 치기 직전에 논술을 겨우 마무리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재잘재잘 말이 많다. “어쨌든 오늘 재밌었다.” 헉, 남다른 딸. 강심장인걸? "잘 봤어?"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건 모르지. 평소보다 못 본 것 같긴 해. 답은 안 맞춰 볼래. 한 달 동안 기분 나쁘기 싫어." 결과가 어떻든 밝아서 좋다. 2차 시험은 두 달 후, 3일간 면접과 수업 실연, 영어 면접과 영어 수업 실연으로 또 치러진다. 곧장 가든 돌아가든, 지금처럼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리라 믿는다. 부모가 아무리 애탄다 한들 더이상 도와줄 길은 없다.


목포에 도착했다. 식탁에 다시 소주가 등장했다. 여독은 술로 풀어야 한다나? 안주는 오면서 하나로마트에 들러 산 광어와 홍어회다. 난 술도, 술 마시는 남편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오늘은 고생했으니 같이 마셔 준다. "이렇게 좋은 안주엔 소주지!" "음식 볼 때마다 술 마시고 싶으면 중독이야. 알콜 중독." "맛있는 거 있으면 당신 생각나는데, 그럼 그것도 중독인가? 인간 중독? 하하." 으이그, 하여간 잘 빠져나가기는. "자기가 술보다 나를 더 많이 생각하겠어?" 딸이 옆에서 쿡쿡 웃는다. “캬! 이런 게 행복이지!” 한 잔 털어 넣으며 감탄한다. 행복의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술의 압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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