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쇼츠(shorts, 짧은 영상)의 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삼촌 나 오늘 받아쓰기 70점 맞았어.” “잘했네. 다음엔 100점 맞도록 노력해.” “괜찮아. 받아쓰기 안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한데?” “100점 맞은 애보다 행복하게 살면 돼.” 당찬 아이를 보며 주인공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당황스럽다.
큰아이가 똑같은 말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대가 컸다. 믿기 힘들겠지만 16개월에 한글을 읽기 시작해서 18개월에는 책을 쌓아 놓고 혼자서 읽던 아이였다. 천재가 난 줄 알았다. 서울대에 보내야 하나, 의대를 선택해야 하나, 아니면 물 건너 하버드대에 기다리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 아이가 사춘기를 건너면서 엄마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노력하는 재능이 없어서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를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단다. 나름 하고 싶은 것 해 가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더니 적당한 대학에 가서 잘살고 있다.
그 꼴을 보고만 있자니 속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내 욕심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성공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자신의 삶인 만큼 ‘진짜 행복’을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아이 자신밖에 없다.
남편은 경치가 끝내주는 밭을 샀다. 앞에 넓은 호수가 유유히 흐르고, 뒤쪽에는 낮은 산이 포근히 자리하고 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빠져 있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처음 밭을 산다고 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밭? 농사를 짓는다고? 왜? 결사반대했다. 농사가 장난인가? 게다가 또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한다. 성격 검사 결과를 보면 둘의 그래프가 완벽하게 반대 막대기로 대칭을 이룬다. 난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여행도 다녀야 하는데 땡볕에서 김을 매고 있다니, 그건 생각하기조차 싫다. 이런,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로 농사일을 도와 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감춰 둔 쌈짓돈을 털어 땅값의 3분의 1을 댔다. 가만 보면 항상 내가 진다.
그는 그 밭에서 행복하다. 좀 하다 힘들어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2년째 참된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농막을 놓고, 잔디를 깔고, 울타리 나무를 심어 자신의 아지트를 꾸몄다.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과 열 종류가 넘는 과실수를 가꾼다. 주말은 물론 가끔씩 퇴근 후에도 차로 편도 40분 거리를 달려간다. 심어 놓은 아이들이 오늘은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하다나. 흙을 밟으면서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눈앞에 멋진 풍경을 두고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내느라 지친 마음을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나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경쟁과 비교는 없겠지만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자연인’처럼 사는 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지지고 볶는 게 즐겁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편안하다. 남과 비교해서 잘살고, 빠르고, 더 성공하려는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는 단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럴 때 진정으로 만족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오늘도 게으른 나와 싸운다. 겨울방학에 한라산을 등반하려면 체력을 길러야 해서 저녁에 걷기로 다짐했는데, 또 지고 말았다. 타일러 영어 두 강좌를 듣고, 남편과 엄마에게는 말투를 순하게 했다. 이건 좀 성공했다. 글이 안 써져서 글쓰기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은 걸 애써 이겨 냈다. 책을 읽었고, 깊어 가는 가을에 감탄하려고 방바닥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가족과의 대화를 늘리려고 하는데 잘 안 됐다. 실패한 것도 많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시 스스로를 믿고 내일 한 걸음 더 나가면 된다. 배우고, 만나고,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 갈 것이다.
다르지만 모두가 각자의 기준으로 진짜 행복하길 바란다. 100점 맞은 애보다 더 행복한 꼬마 철학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