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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Aug 28. 2024

중년의 낭만적 연애

열세 시간 동안의 데이트

늦었다! 9시 전에 출발해야 하는데 눈 떠보니 8시 20분이다. 남편도 어젯밤에 자정이 다 돼서 들어오더니 아직도 한밤중이다. 둘 다 수면 시계가 평범한 토요일 전에 맞춰졌나 보다. 외사촌 결혼식날이다. 목포에서 안산까지라니, 아득하다.

     

빠르게 씻고 옷장을 여니 입을 만한 게 없다. 7부 소매 원피스가 그나마 날씬하고 우아해 보이는데 와인 색이라는 게 걸리네. 아직은 날씨가 찌는데 색깔이 좀 더워 보인다. 일단 걸치고 “이거 어때?” 물어보니, 된장국에 밥 말아 급히 넘기며 남편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왜? 색깔이 너무 가을인가?” “응.” “그냥 캐주얼하게 가야겠다. 옷도 없는데.” 예쁘다는 말을 기대했었나? 뒤에 슬쩍 삐짐을 붙여 본다. 초록 가디건에 흰 바지랑 연청바지를 번갈아 입어 보였다. 다 아니란다. 확고하구먼. 미리 정해서 저녁에 걸어놨어야 하는데, 준비성 없는 탓에 아침부터 정신 없다. 빠른 손놀림으로 걸려 있는 옷들을 뒤적인 끝에 샤넬 느낌만 살짝 묻은 4만 원 짜리 검정 가디건에 베이지색 햅번 치마를 매치했다. 이거다! “괜찮지?” 그가 엄지를 세운다. 보는 눈은 있어서는. 남편은 검정 바지에, 흰색 바탕에 잔무늬로 살짝 변화를 준 시원한 셔츠를 받쳐 입었다. 깔끔하군.  

    

엄마는 일찌거니 목포 외삼촌 차를 타고 가는 중이다. 막내는 결혼식 구경하고 뷔페 먹고 싶다더니 아침에 생각이 바뀌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운전하기 힘들겠다. 여행 간다 생각하고 재밌게 가자.” “그러자. 둘만 가니까 여행 기분 나네.” 멀리 움직이느라 하루를 다 버리겠다는 불만에서 덕분에 하루종일 여행하겠다는 기대로 바꾼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 끗 차이다. 그러면 초록으로 물든 들판이 양옆으로 물결처럼 펼쳐지고, 늘 보던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동그란 산이 이어 달리는 풍경눈으로 찾아. 가끔씩 널따란 강이나 구불거리는 냇물이 나타났다 물러나는 것도 정겨워진다. 덥다 덥다 짜증 내지 않고 이 여름을 사랑하면서 즐기면 가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홍성에도 한우가 유명하다더라. 복순이가 홍성에 산다고 했는데? 부안에도 고려청자 박물관이 있구나. 청양? ‘청양고추’ 할 때 그 청양인가? 시시한 얘기들로 시간이 여유롭게 채워진다.    

  

안 늦은 척 중간쯤에 자리 잡고 앉았다. 혼주석에 앉은 신부 아버지가 남편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유만만하시네. 남편은 앉은키가 커서 눈에 띈다. 아니, 잘 생겨선가? 하하. 오늘 선심 많이 쓴다. 외삼촌이 앞에 나와 딸과 사위에게 축사를 했다. 오! 무대 체질. 적절한 곳에서 톤을 높이기도, 조금 뜸을 들이기도 한다. 끝으로 예선이를 예쁘게 키워 준 김강순 여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신부 어머니 석에 앉은 그녀는 이혼한 전 외숙모이다. 외삼촌이 좀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걱정도 . 재혼한 새 외숙모는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은 빠져 주셨단다. 휴, 이혼하면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 웬만하면 안 해야겠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아니면 친척이라도 얼굴 보기가 어렵다. 부산 외삼촌, 진천과 제주 이모, 엄마의 사촌인 순심이 이모, 강익, 상문 삼촌의 일가가 보였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에 인사드리느라 바쁘다. 남편이 옆에 선다. 아직까진 배도 많이 안 나오고, 훤칠하니 관리가 잘 되어 같이 다닐 만하다. 얼굴이 까맣게 타긴 했지만. 너는 왜 이리 안 늙냐? 고대로네.” 서로를 향한 위로인지도 모를 말을 주고 받았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이지만 이렇게라도 만나지 않으면 남과 다를 게 없다. 좋은 일에 함께 축하하고 나이 들어가는 것도 보면서 살아야지. 많이들 늙으셨다. 갈수록 세월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을 마주하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몽글몽글하기도, 쓸쓸하기도 해져 복잡한 기분이 든다. 이제 얼마나 더 이렇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을까? 순심이 이모가 배웅한다고 나를 찾았다던데 그냥 나온 게 후회됐다.  

    

찰나의 만남이 지나가고 알 수 없는 슬픔 한 줄기가 훑고 간다. “멀어도 오길 잘했네.” 운전하면서 남편이 말한다. 고맙다. 내려오는 길에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들렀다. 단정하고 성대하게 잘 지어 놓았다.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맘에 딱 든다. 백제문화의 특징을 담았을 저 글귀처럼 살고 싶다. 소박하면서도 화려하게. 음, 읊조려보니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남편이 손을 내밀었다. 고즈넉한 소나무 정원과 연못 주위를 걸었다. 이제 저녁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살랑이는 미풍이 얼굴을 식히고 날아가지만 아직은 땀이 맺힌다.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게 좋아 좀 더 걸었다. 붉고 커다란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간다. 분홍빛이 섞인 엷은 주홍색 노을도 산 주위의 낮은 하늘에 여운을 남긴다. 이맘때의 서정적 분위기는 늘 가슴을 흔든다. “남들이 보면 불륜인 줄 알 거야.” 남편이 말했다. 웃기만 했다. 환상을 깨기 싫어서. 남편은 손잡고 다니는 중년 커플은 다 불륜이라며 자기만 사이좋은 줄 착각한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먼 산 보면서 데면데면하게 구는 주제에. 그래, 이럴 때라도 맘껏 다정하게 다니자고.    

 

도로 옆의 창이 넓은 2층 카페의 이름은 ‘사비’이다. 사비.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문화를 꽃피우고 나라의 최후를 함께한 부여의 옛 이름. 발음이 사랑스럽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팥빙수 하나요.” 주문해도 남편이 모른 척 서 있다. 가자미 눈을 하고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까딱했다. “내가?” 카드를 꺼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거 시키지 말걸.” 단아하게 생긴 젊은 사장님이 쿡쿡 웃는다. 남편은 이런 걸 유머라고 으쓱해한다. 유쾌해서 나도 봐 준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신상 카페라서 인테리어가 깨끗한데 손님은 우리뿐이다.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남편이 카톡 프로필을 내 사진으로 바꿨다. 시킨 거 아니다. 대문에 떡하니 올리는 건 좀 창피하니 바탕에 두라고 슬며시 말리긴 했어도. “자기는 좋겄다. 이렇게 이쁜 여자랑 살아서.” 대꾸할 가치가 없어선지 전투력이 떨어져선 반발은 안 한다. 오늘 분위기 괜찮네.     


집에 도착하니 시가 넘었다. 몸은 지쳤지만 꽤 달달한 열세 시간 동안의 데이트였다. 옆에 이 남자가 있어 다행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삶에서 사랑을 지속시켜 주려고 존재하는 것’이라 했던 알랭드 보통의 문장이 떠오른다.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정말로 맞는 말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매이지 않았다면 수많은 불안, 고통, 불만, 질투, 치사함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사랑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사랑? 그까짓 거 진즉에 던져 버렸을 것이다. 토라져서 두 주, 세 주가 지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는 게 결혼이다. 그래서 23년째 한 남자랑 살고 있다.      


아직 로맨스를 꿈꾼다. 이미 나이는 많고 결혼까지 한 몸이라 새로운 멋진 남자를 만나기는 글렀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은 편이라 앞으로도 이 남자랑 같이 살 날이 겁나  많다. 아쉬운 대로 방법을 찾아 다. 지난 일은 다 잊고 남편을 새로 만난 치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 끗 차이라니까. 남편이랑 다시 안전하게 하는 '중년의 낭만적 연애와  후의 일상'을 대해 본다. 데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닌데? 이런 유치한 여자는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말고. 자기만 손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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