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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Jan 06. 2024

졸업식과 결혼기념일

결혼기념일? 그게 뭐야?

우리 학교와 막내딸 학교의 졸업식이 겹쳤다. 공교롭게도 남편도 같은 날 졸업식이 있단다. 이거 잘못하면  딸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졸업식에 안 왔다고 평생 원망을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 녀석이라면 불리할 때마다 써먹을 것이 분명하다.     

  

요즘은 교원들도 당연히 자녀의 학교 행사에 돌봄 휴가를 내고 참여할 수 있다. 개인의 권리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교사들이 자기 아이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오전 시간만이라도 돌봄 휴가를 사용해 볼 여지가 있을까 눈치를 살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얄미우리만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권리를 요구하던데 연식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그런 면에선 당당해지지 않는다. 졸업식에서 교감은 중요한 역할도 없고, 미리 준비만 철저하게 해 놓으면 내가 없어도 당일 식은 잘 돌아갈 수 있을 성싶었다. 슬쩍 교장 선생님께 상황을 흘렸는데 '당연히 가 봐야지. 복무 쓰고 갔다 오소.' 뭐 이런 기대한 반응이 아니다. 듣고도 아무 말씀이 없다. 분위기를 보니 난 이미 틀렸다. 남편이라도 보내야 한다.  

    

협박과 잔소리를 거듭한 끝에 그이는 아이 졸업식이 끝날 때쯤에는 도착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변을 해 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첫째, 둘째 딸에게 늦지 않게 가라고 신신당부하고 아침 일찍 학교로 출발했다. 상황 봐서 점심 식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업무 몇 건을 처리하고, 동선과 프레젠테이션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사회를 보기로 한 교무부장까지 아들 졸업식에 참석한다고 해서 오랜만에 졸업식 진행도 맡았다. 예년과 다르게 축제처럼 펼쳐진 졸업식 행사에 보호자님들이 감동적이었다고 피드백을 해 주었다. 성공적으로 잘 끝내고, 막간을 이용해 인사자문위원회를 열어 세 가지의 안건을 설명하고 처리했다. 여느 날처럼 바쁘다.   

   

친목회에서 마지막 점심을 같이 먹는다고 했다. 빠질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와서 가족들에게 점심 식사 후에 만나자고 연락했다. 조퇴 후 늦게 출발했더니 피곤해서 들어가는 길이라고 집으로 오란다. 아이고, 맞는 게 하나도 없구나. 아쉽고 미안해진다.    

  

선생님 두 명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잠시 후 카톡도 울려댄다. 이것들아, 나도 한번 조퇴 좀 해 보자. 교장선생님 계시는데 의논해서 해결하면 안 되냐? 진짜.    

  

오랜만에 둘이 누워 티브이를 본다. ‘응답하라 1988’이 재방송되고 있다. 성보라가 청카바가 어디 있냐며 지랄(마땅히 다른 말이 없다.)을 하고 있다. 남편이 “꼭 자네 같네.”라며 맞을 짓을 한다. “자네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간다. 막아봤자 소용없다. 성보라 같다고 한 것보다  늙은이처럼 자꾸 자네라고 부르는 게  더 꼴보기 싫다. “이거 봐. 똑같잖아.” 그가 괴로워하며 말한다. 너무 세게 때렸나? 사실 내가 생각해도 싱크로율이 높긴 하다. 화면에서 그녀가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마다 왠지 친근하다. 그나저나 이 사람, 불금인데 왜 술 약속이 없지? 아까부터 “내가 결혼을 참 잘했어.”라며 실실 웃는 것도 수상하다.   

  

저녁에 뭘 먹고 싶냐고 묻더니 삼치회를 준비한다. 김과 양념장을 곁들이고, 갈치도 구웠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와인 한 잔 할 거 냔다. 와인? 당긴다. 우리 집에 그런 것도 있었나?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지?” “무슨 날인데?” “결혼기념일이야.”  “아하하, 그렇구나!” “당신은 항상 모르잖아. 이런 거 안 챙기는 여자랑 결혼해서 참 좋아.” 진짜 좋은 건가, 날 무시하는 건가.  

   

생각도 못 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니. “알았으면 말했어야지.” 일단 화내는 척한다. 이런 삼치회 따위로는 안 되는데. 어떡하지? “문수가 만나자고 했는데 나갔다가 욕먹을 것 같아서 약속은 안 잡았네. 지금이라도 같이 어디 나갈까?”      


“아니, 귀찮아. 그냥 집에 있자.”  “그럴 줄 알았어.” 독일에서 물 건너온 달콤하고 맛있는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둘이서 없애고 나서  ‘싱 어게인 3’ 재방송을 틀어놓고, 글을 쓰며 편안한 저녁을 보내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한 결혼기념일이 지나고 있다. 괜찮다. 암시랑토 않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 내일은 토요일이다. 바로 월요일부터 출근해야 하긴 하지만 룰루랄라, 오늘 방학까지 했다.   

   

어제 뽀글이 파마를 하고 “내 머리 어때?”하고 물었다. “사자 같네. 숫사자.” 이런 솔직한 남자랑 산다. 결혼기념일? 그게 뭐야? 아직도 설레고 그러면 병원에 가봐야 한다잖아. 응, 아주 정상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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