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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Dec 14. 2023

이혼 안 한 이유

'일상의 글쓰기' 글감 - [화해]

3년 전의 일이다. 큰딸이 전화와 문자만 되는 폴더폰으로 바꿔 달라고 해서 휴대폰 가게에 들러야 했다. 공부 안 하고 놀더니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다. 내신으로는 이미 틀렸으니 몇 달 남은 정시에서 승부를 보겠단다.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니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사 줘야지. 집에서 좀 멀지만 싸게 파는 곳이라고 해서 하당으로 갔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길이 막힌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아 주변을 몇 바퀴째 돌다가 겨우 빈자리를 찾았다. 안 그래도 오늘 일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벌써 지쳤다. 아니, 나만 부모인가? 이런 뒤치다꺼리는 왜 꼭 내가 해야 해? 괜스레 남편한테까지 짜증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자 직원은 먼저 온 손님과 상담하는 중이고,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이것저것 설명을 길게 한다. 기기 가격, 요금제, 약정 기간, 월 부담액을 기종별로 비교해 준다.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데 이 많은 걸 다 공부해서 알려 주려면 똑똑해야겠구나 싶다. 계산도 복잡해서 안 속으려면 사는 사람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들었다. 뇌를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오늘 하루치 용량 초과.      


폴더폰과 요금제를 제일 싼 걸로 정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문제가 있다고 한다. 들어 보니 우리 가족이 케이티(kt) 가족 요금제로 묶여 있어서 인터넷을 무료로 쓰는데, 딸의 요금을 2만 원 이하로 하게 되면 이 서비스를 적용받을 수 없게 되므로 몇천 원 더 비싼 것이 낫겠다는 요지이다. 그런데 도중에 “남편분이 휴대폰을 두 개 사용하시는데요.”라고 한다. 응? 눈이 번쩍 뜨인다.  

    

"우리 신랑이 휴대폰을 두 개 쓴다고요?"      


얼굴이 벌게지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살펴보니 틀림없다. 두 개가 왜 필요해? 나한테 왜 말을 안 했지? 나 몰래 사용할 시간도 없는데? 바람피우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내가 둔한 건가? 아니야,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근데, 오랫동안 10분 거리에서 두 집 살림하면서 안 들킨 남자도 있다던데, 혹시 이 남자도? 가만있자. 의심할 만한 행동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 보자. 퇴근하고 집에는 잘 들어왔어. 아니? 적어도 5시 반쯤엔 와야 하는데, 가끔 6시 넘은 적도 있잖아. 그때 잠깐씩 만나고 온 건가? 친구랑 술 약속 있다고 나가는 날에 혹시? 내가 절대 알 수 없게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치밀한 놈인데 내가 몰랐던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행동할 수가 있지? 잠깐 동안 어마어마한 생각들이 요동친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도 살짝 당황한 듯하다. 자기가 말실수했나 하는 불안한 표정이 스친다. 창피하다. 여기서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불쌍한 여자가 될 순 없다. 일단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자. 밝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도 일단 관심 없는 척하기로 한 것 같다. 그가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입이 바짝바짝 탄다. 집에 가면 어떻게 말하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물어봐야 하나? 오해라고 밝혀지면 의심한 게 민망하니까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해 보자. 그냥 지금 잘살고 있는데 모른 체하고 넘어갈까? 이러다가 이혼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럼 너무 복잡한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별일 아닐 거야.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시간은 벌써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배는 고파 힘도 없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정이 제멋대로 막 왔다 갔다 해서 어질어질한 게 정말 쓰러져 돌아가시겠다. 겨우겨우 계약을 다 마치자, 갑자기 번뜩 떠오르는 게 있다. 아까 번호가 뭐였지? 뒤 번호가 내 것이랑 똑같았는데.   

   

"저기요. 아까 저희 신랑 번호가 뭐였죠?" "010 46** 704*입니다."      


오! 할렐루야! 별빛이 내린다. 찬송 소리가 귓가에 퍼진다. 시어머니 것이다. 우리 집 올레티비(kt 유선방송) 비밀번호도 46**. 그녀의 휴대폰 가운데 숫자를 기억하려고 걸어 두었다. 남편 것 빼고 가족의 마지막 네 자리 숫자는 모두 704*다. 엄청 오래전에(한 15년 전쯤) 그녀가 스마트폰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댁 가는 길에 고흥읍에서 새로 장만해 드렸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당사자가 같이 안 가서 남편 명의로 했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번호를 그대로 쓰느라 명의를 안 바꿨구나.      


힘이 쑥 빠진다. 그러면 그렇지. 내 남편이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거 저희 시어머니 번호네요. 예전에 신랑이 대신 개통해 줬거든요. 휴대폰이 두 개라고 해서 잠시 놀랐어요.” 굳이 안 해도 될 변명을 한다. “아, 네. 가끔 사업하느라 두 개씩 쓰는 사람이 있어서 생각 없이 말해 놓고, 쪼끔 걱정했습니다. 하하하.”라며 그도 멋쩍게 웃는다.      


“나 오늘 자기 때문에 겁나게 힘들었다.” 집에 와서 오늘의 어이없는 무용담을 요란하게 이야기했다. “자기가 너무 잘생겨서 그래. 이번엔 용서해 줄게. 앞으로 오해 안 하게 똑바로 해.”라며 너스레도 좀 떨고. 남편이 헛웃음을 친다. “얼척이 없구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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