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이성은 있는가. 누구나 거기에 가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슬부슬 비가 왔다.
키갈리의 아침에 비가 왔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기념관Kigali Genocide Memorial은 사람들이 붐빈다. 언제나 그렇다.
단지 비오는 날에는 그 얼굴들이 더 처연해 보일 뿐이다.
1994년. 단 10일 동안에 8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다른 입장에서 보자면
1994년. 단 10일 동안에 80만명을 죽였다.
대량 학살이라면 난징대학살이나. 유대인 학살. 킬링필드 등이 떠 오른다.
그러나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제노사이드와 다른 점이 있다.
전쟁 중이지도 않았다. 종교가 다른 것도 아니다. 충동적인 것도 아니다. 남자만 죽인것도 아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긴 시간동안. 80만명의 사람들. 아이와 여인과 노인들까지 죽였다.
죽이는 방법도 잔인했다.
어제까지 같은 동네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다. 직장에서 만나고. 동네 마트에서 만나고.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을 죽인 것이다.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에게 이성이 있는가. 양심이란것이 있는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된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기념관에 서면 나뿐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든다.
이성은 자연을 지배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조차 대상화 되고, 통계화 되고, 제거 가능한 존재로 바뀌었다.
이성이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폭력. 특히 국가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췌했다.
이성의 배신이다.
제노사이드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중동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는다.
많은 나라들이 거기에 사람을 더 많이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고 있다.
오늘 아침 서울도 비가 온다.
그날 거기 르완다의 아침처럼.
그비나 이비나 비는 똑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