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大暑

by 휘진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대서를 기록한다. 벌써 입추도 지나버렸고, 다음 주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처서가 찾아온다. 2023년은 그 어느 해보다 빨리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모든 절기를 적어내기로 마음 먹은 올해이기에 나는 늦어버린 대서를 기억해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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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은 회의의 연속이었다. 절기는 과학이고 빗나가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는 이번 대서만큼은 빗나가길 바랬는데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장마 이후 무더위가 심하다는 이 절기. 비가 아주 안 온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장마는 종료되었다. 이제는 우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장마의 이후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은 출ㆍ퇴근길을 함께 해주었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그리웠던 것도 아니다. 나는 니트만 입고 다녀도 됐던 파란 하늘과 분홍 꽃잎의 봄과 겨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사랑하는 계절은 여름이었지만 사랑이 변한 건지, 사랑할 여유가 없는 건지 이 뜨겁고도 찜통 같은 여름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여름들보다도 최악의 여름이었다. 대서 때부터 처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추는 단어만 그러할 뿐 이 더위의 해결책은 물론이거니와 바람이라는 임시방편의 역할도 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처서 이후로는 점점 일교차의 차이가 벌어지고 일몰의 시간이 당겨졌음이 체감이 되기 시작하는 절기이다. 그렇게 대서를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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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立秋에서 여름 휴가의 이야기를 쓰겠지만, 우선 오사카 휴가를 다녀왔고 이 글의 시점에서는 휴가를 준비했다. 비행기와 호텔, 휴대용 와이파이 같은 것들을 예약했다. 또 다시 일본이었고, 이번에는 지인과 함께 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북한산에 있는 마운틴 뷰의 스타벅스와 남양주에 있는 한식집, 줌 미팅 등 업무 출장처럼 준비했다. 3년 반의 인연이지만 이렇게 자주 볼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시시했던 19년과 술 모임 관계 정도였던 20년, 일과 입대로 별로 보지도 못한 21년과 말년 휴가 이전까지 1번 본 것이 전부였던 22년도였다. 무슨 일인지 23년에는 취업 도움을 받고, 부산 여행을 같이 가며, 달마다 한 번은 꼭 만나 술도 마셨다. 그 날들의 연속이 이번 일본 휴가까지 이어졌다. 사실 날이 안 맞았으면 혼자서 부산이라도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고, 누구 하나 서로를 두고 갈 생각을 안 했다. 사실 안 맞으면 각자 다른 사람 또는 혼자서라도 가면 됐을 텐데 휴가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여행을 같이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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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서 별 이야기도 다 했다. 내 손목의 실수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 나의 우울까지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바닥을 보여주는 게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런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 뿐이라고 생각한다. 듣는 사람은 이 이야기조차도 귀담아 듣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만큼 가볍게 들어줄 순 있겠지만 무겁게 듣는 사람이 아무래도 더 많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드러나는 사람이 역시 더 많다. 취기에 저지른 내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런 반응에 상처받는 건 아니지만 곤란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싫어 되도록이면 말해오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래도 나도 내 탈출구를 조금 만들어둬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내 생각이 오만하다 말하듯 돌아온 반응은 지독하게 따뜻했다. 분명 가벼운 리액션과 청취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돌아온 말은 내가 어떤 인간관계에서나 바라던 반응이었다. 단순한 청취. 무심한 '그랬구나'가 아닌 어딘가 따뜻한, 공감하고 있다는 듯한 그랬구나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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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고 지쳐가던 7월 말이었지만 받을 수 있는 온갖 위로는 동시에 다 받았던 대서였다.

나는 내가 누군지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받고 있는 줄 모르는 순 어리광쟁이었단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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