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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탄생 100주년 컬렉션

by 박홍섭

2025년 7월 2일, 수요일

# 여행하듯 그려낸 인생

<천경자 탄생 100주년 컬렉션>

- 서울 시립미술관


광화문 한복판의 점심시간,

도시의 분주함을 잠시 벗어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대법원 건물을 리모델링한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미술관 내부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특히 근처의 직장인들이 미술관 내부에서 점심시간동안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제1직장인 삼성물산 해외 현장의

하루 하루가 치열했던 전쟁터같은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제2의 직장에서의 생활도

업무 자체는 녹녹치 않지만,

국내에서의 아침 을지로 4가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청계천 산책길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에 이런 미술관의 호사는 업무시간의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좋은 시간들이다.


오늘의 천경자 컬렉션은

한 화가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그 이면에 흐르는

고독과 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천경자 화백이 생전에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린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남아의 강렬한 색감,

아프리카의 얼굴들,

중남미의 일상,

유럽의 소녀들까지.

그녀가 걷고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이

화폭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작품마다 현지의 공기와 빛,

사람들의 표정이 그녀의 감각을 통과해 정제된 채 전달된다.

단순한 풍경화나 기록화를 넘어서, 여행지에서 느낀 인상과 정서를

고유한 시선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마치 여행의 시편처럼 다가온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는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온 전시다.


누구나 여행지에서

기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천경자 화백은 그러한 순간들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모든 장면을 담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머물며 느낀 감정과 기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그녀의 여행은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감정을 길어 올리고

다시 창조해내는 예술 행위로 이어졌다. 그러한 방식이 한층 인상 깊고

멋스럽게 다가온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이번 특별전이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컬렉션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생전 천경자 화백이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93점의 작품 중 일부로 보인다.


미국으로 떠난 이후,

그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남기며

조용히 한국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기증에는 오랜 시간 쌓인

내면의 고민과 작가로서의

결연한 태도가 함께 담겨 있다.


천경자 화백은 글을 통해서도

예술적 감성과 삶의 단면을 드러냈다.

<혼자서도 너는 꽃이다>,

<행복은 내가 만든다> 등의 수필집은

화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고백을 담고 있다.


특히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바로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오래전에 절판된 탓에

중고 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었고,

전자책으로도 출간되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제목부터 시적인 울림이 느껴지는

이 책에는 그녀의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시선, 그리고 그림과 연결된 내면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아 앞으로도

여러 경로로 찾아볼 생각이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 글마저 함께 읽을 수 있었다면

더 깊은 감상이 되었을 것이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는 발표 이후 시작된 진위 논란은

예술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경자화백은 단호하게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1971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딸 역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그런 그림을 본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미술관과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천경자 미인도 위작에 관한

방송 유투브 들을 여편 되돌아 보았지만

허탈하고, 한심한 마음이 끓어 올랐다.


결국 그녀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1998년 미국으로 떠났고,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조용히 살아갔다.


이른바 ‘미인도 위작 사건’은

단순한 진위 논란을 넘어,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

여성 예술가에 대한 편견,

그리고 예술과 제도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보인다.


천경자 화백의 입장은

생전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은

그런 상처와 논란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천경자를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행지의 풍경 속에서 발견한

색감과 정서, 얼굴과 이야기들이

그녀의 손을 통해 화폭 위에 피어났다.


장미와 나비, 정면을 응시하는

이국의 여인들.

이 모든 존재들은

그녀가 살아온 시간과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낸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예술은 때로 말보다

깊은 진실을 전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말을 하지 않지만,

침묵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은

그 자체로 진실을 향한 외침이자,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기록이다.


그 그림 앞에서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


언젠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수중에 펼치는 날,

오늘 이 전시의 기억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남긴 그림과 글은

예술의 언어로 진실을 말한

한 인간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첨언...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14정거장을

서서 가면서 새벽에 쓴 글을 다듬고,

SNS에 올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이 또한 아침의 소확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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