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 해협
2008년 6월, UAE 두바이 현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묘한 온도로 남아 있다.
사막의 열기와 해풍이 뒤섞인 공기,
그리고 아직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하고 느슨했던 중동의 경계들.
그때 우리는 주말의 짧은 휴무를 이용해
동료 직원들과 함께 오만 북단의 작은 항구 도시 카삽으로 향했다.
그 여행의 목적은 특별하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잠시 일상의 긴장을 풀고,
그리고 당시에는 그저 하나의 ‘경험’으로 여겨졌던
호르무즈 해협 크루즈를 타기 위함이었다.
두바이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향하면
라스알카이마를 지나 국경을 넘게 된다.
그 경계는 지금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느슨했다.
간단한 절차와 함께 우리는 아랍에미리트를 벗어나
오만의 영토로 들어섰고,
이내 바다와 맞닿은 카삽에 도착했다.
당시 이곳은 ‘비자 런(visa run)’이라 불리는 관행으로 인해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국경을 넘어 다시 돌아오는 행위 자체가
체류 기간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의 여행은 단순한 행정적 목적을 넘어섰다.
우리는 작은 목조 배에 올라 호르무즈 해협으로 나아갔다.
잔잔한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평화로웠다.
양쪽으로 펼쳐진 거친 산악 지형과
그 사이를 흐르는 바다는
마치 오랜 시간 인간의 간섭과는
무관하게 존재해 온 듯 보였다.
바다는 깊고 푸르렀고, 하늘은 끝없이 맑았다.
그 순간만큼은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민감한
지정학적 요충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그때의 우리는 이 해협이 가진 의미를
‘지리적 통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중동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상당량이
이 좁은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국제 정치와 군사적 긴장의 핵심 축이라는 인식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중요한 곳이구나”라는 정도의 막연한 이해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계는 변했다.
특히 이란과 미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호르무즈 해협은 더 이상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안보를 좌우하는 ‘목줄’과 같은 공간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요즈음 뉴스에서는 유조선 피격, 군사적 충돌,
봉쇄 위협과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었고,
그때 우리가 무심히 지나갔던 그 바다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여행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경험’이었다.
작은 배 위에서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던 우리는,
그 바다가 언제든 긴장과 충돌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곳은 평화롭고 이국적인 관광지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선으로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그 평온함 자체가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 경제, 군사, 외교가 복합적으로 얽힌 상징적 장소이다.
전 세계 원유 수송의 상당 부분이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이곳이 봉쇄되거나 충돌이 발생할 경우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클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해협은 늘 ‘열려 있어야 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언제든 닫힐 수 있는 문’으로 존재해 왔다.
우리가 그 위를 지나던 2008년의 어느 날,
그 문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
아무런 위협도, 긴장도 체감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같은 장소를 두고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과거에는 개인의 여행지였던 곳이,
현재에는 국제 뉴스의 중심에 서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지역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설 현장에서의 삶은 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공정, 안전, 품질, 그리고 일정.
그 속에서 세계 정세나 지정학적 긴장은
다소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떠올리며 느끼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모든 공간이 결국
더 큰 구조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일하던 두바이의 현장도,
그 자재와 에너지도, 그리고 그 도시의 성장 자체도
이 해협을 통과하는 수많은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날의 바다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긴장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오히려 그 평온함이 더욱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동시에 묻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안정한 평온’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만 카삽으로 향하던 길, 국경을 넘던 순간,
그리고 작은 배 위에서 바라보던 수평선.
그 모든 장면은 이제 단순한 여행의 기억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시대의 공기이자,
변화 이전의 세계를 체험했던 개인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과 대비될 때,
그 기억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아마도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면, 더 이상 같은 시
선으로 그 바다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풍경은 같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이제는 알고 있고,
보이지 않던 긴장들을 이제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행이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과 인식이 교차하는 경험이다.
2008년의 호르무즈 해협은 우리에게
‘지나가는 풍경’이었지만,
지금의 그것은 ‘되돌아보게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비로소 그곳의 진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