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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4)

by Loxias

* 공양왕의 외로운 싸움


공양왕은 이성계를 비롯한 아홉 공신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이후 그들의 말을 쉽사리 들어주지 않았다.

재미있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려사절요》 1389년 11월의 기록이다.

『왕이 즉위하던 날 저녁, 왕의 사위였던 강회계의 아버지 강시가 내전에 들어가 왕에게 말하기를,

“여러 장수와 재상이 전하를 옹립한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고자 도모한 것이지 왕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신중하시고, 가까이 하면서 신뢰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존할 방도를 생각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우연하게 아홉 공신의 귀에 들어갔다.


『공신들이 왕에게 말을 올리며 이르기를,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신다면 즉시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만약 신들이 가짜 성(姓)을 몰아내고 왕씨를 다시 세운 데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청하건대 참소한 자에게 죄를 주시어 위아래에 틈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좌우를 돌아보고는 잠잠히 있었다.』

즉위 첫날부터 이런 난리가 벌어진 것이다.

공양왕의 재위 기간은 이성계와의 외로운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왜 외로운 싸움이냐고? 공양왕은 자기 편이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공격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어떻게든 자기 편을 만들어야 했기에, 즉위하자마자 이색을 복귀시켰다.

이색은 1389년 10월 함께 명에 다녀온 부사 이숭인이 탄핵을 받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장단으로 물러나 있던 상태였다.

이색은 조민수와 달리 탄핵된 것이 아니었기에, 급한 대로 먼저 데려다 쓴 것이다.

『이색이 장단으로부터 대궐로 와서 하례하였다.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침상에서 내려와 기다리다가 말하기를,

“평생 한가로이 놀면서 오늘날 이렇게 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원하건대 경은 나를 보필하시오.”라고 하였다.

다시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삼고, 변안열을 영삼사사로, 심덕부를 문하시중으로 삼았으며,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정도전을 삼사우사로 삼았다.』


이색과 조민수 등에 대한 공격이 빗발쳐 이색 부자를 파직하고 조민수를 서민으로 강등시킨 것이 앞서 언급했던 대로 1389년 12월 1일, 이성계 견제 세력을 마련하려던 공양왕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1390년 1월에는 우왕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던 변안열을 유배 보냈다.

『낭사 윤소종·이첨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변안열이 신우를 맞이하여 세우고 왕씨의 제사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던 것은 실로 김저가 분명하게 말한 바이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헌사에 내리시어 전형을 밝게 바로잡으시고 그 가산은 적몰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그 일이 사면 이전에 있었다고 하여 다만 그 관직만 파면하였다.

상소가 다시 올라오자 다만 관직을 삭탈하고 한양으로 유배 보내게 하였다.』

변안열을 한양으로 유배 보낸 후에도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처형했다.


그런 상황에서 1390년 5월 1일, 앞서 이성계 글에서 언급한 윤이·이초 사건이 터졌다.

여기서는 윤이·이초 사건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사신 조반이 명나라에서 윤이의 글에 적힌 사람들을 국문하여 보고하라고 했다고 알렸고, 대간들이 상소하여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공양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윤이·이초의 무리로 지목된 사람들 중에 김종연이라는 무장이 있었다.

김종연은 친구 지용기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명단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야반도주했다가 붙잡혔다.

대성과 형조가 국문하였으나 김종연은 불복하였다.

5월 6일 밤, 김종연은 재차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고려사》 이색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 김종연이 도망하자 마침내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을 순군에 하옥하였으며,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다.

대성과 형조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먼저 윤유린을 매우 심하게 국문하니, 최공철·최칠석·조언·조경·공의·한성·김충·안주·곽선·정단봉·박의룡 등의 이름이 연루되어 〈이들을〉 모두 하옥하였다.』

『이색·이림·우인렬·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을 붙잡아 청주옥에 가두고 문하평리 윤호, 밀직부사 박경, 우사의 이확, 형조좌랑 신효창·전시 등을 보내어 양광도도관찰사 유구와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윤호 등이 청주에 있으면서 여러 죄수들을 국문하였는데 모두 불복하였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윤유린을 제외하면 연루된 자들 중에서 죄를 인정한 사람이 없었다.


6월에 청주에 물난리가 나니 애꿏은 사람들을 잡아넣어 하늘이 노했다며 여론이 악화되었다.

공양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면령을 내려 이색 등을 풀어주었다.

공양왕은 사건을 더 이상 확대시키길 바라지 않았으리라.

왜냐면 처벌 대상이 대부분 반(反) 이성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명이 아쉬운 판국이었다.

그러나 공양왕의 생각과 달리,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도망쳤던 김종연이 군사를 동원한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서경천호 윤구택이 천호 양백지와 함께 술을 마시다, 술에 취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김종연이 조유와 함께 공모하여 이시중을 해치려 하네.

그대가 만약 정병을 거느리고 우리들과 힘을 합치면 재상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걸세.

심시중도 이와 같은 모의를 알고 있다네.”라고 하니, 양백지는 응하는 척 하였다.

윤구택은 음모가 누설될까 두려워하다 남경으로 가서 우리 태조에게 알려 말하기를,

“김종연은 도주하였다가 서경에 와서 저와 거병하여 시중을 모해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직접 이성계를 찾아간 윤구택의 행동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것이 이성계와 윤구택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아무튼, 이성계 세력은 이것을 빌미로 공격을 재개했다.

이름이 언급된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고, 김종연과 친분이 있었던 권격이라는 자가 지용기·정희계·박위·윤사덕·이빈 등을 지목하였다.

그리고 김종연의 일당이 안주와 서경에 군사를 요청하였다는 진술이 나오자 이성계는 이것도 이용했다.

아마도 김종연과 공모하여 군을 일으킬 수 있다는 핑계를 댔을 것이다.

1390년 11월 13일, 공양왕은 원수들의 인장을 모두 회수했다.

『헌부에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의 군사는 이미 영삼사사 이성계가 모두 총괄하고 있으니, 청컨대 여러 원수의 인장을 모두 거두어들이십시오.”라고 하니, 그를 따랐다.』


김종연은 1390년 12월 15일 붙잡혔고, 고문을 받다 이튿날 죽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종연은 목구멍에서 나는 듯한 작은 소리로, “내가 차마 죽지 못하고 또 〈처지가〉 박복함에 몰려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 실제 그런 일을 꾸민 바가 없소.”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모사한 바에 대하여 권격과 이천용이 이미 고하였는데 어찌하여 숨기는가?”라고 하자,

김종연이 말하기를, “권격이나 이천용과 함께 도모하여 어떤 일을 이룰 수 있으리요? 내가 모의한 적이 없다는 것은 이로써 또한 알 수 있소.”라고 하였다.』


조민수가 죽은 것이 그로부터 며칠 지난 1390년 12월 22일이다.

물론 나이도 적지 않았을 테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을 수도 있지만, 왜 하필 이때란 말인가?

그래서 내가 그가 죽은 시점이 절묘하다고 한 것이다.

앞선 이유에서, 만에 하나 조민수가 군부에 복귀할 경우, 이성계에 대항할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성계 세력에게 있어, 그는 살아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민수가 죽음으로써 군부 내에서 공양왕의 친위세력이 만들어질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렸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1391년 1월 7일, 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에 올랐다.

군제를 개편, 오군을 줄여 삼군으로 하고 도총제부에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할하도록 하였는데, 그 자리에 이성계가 오른 것이다.

함께 임명된 사람들을 보자.

『우리 태조를 삼군도총제사로, 배극렴을 중군총제사로, 조준을 좌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우군총제사로 삼았다.』

이성계 세력의 완벽한 군권 장악이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1392년 4월 이성계의 낙마사고가 발생하자 정몽주는 이를 기회로 조준, 정도전 등을 죽이자고 했는데, 공양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난 이때 공양왕이 정몽주의 말대로 하지 못한 이유의 상당 부분이 군부 내 친위세력의 부재라고 본다.

군부 내 친위세력이 없는데, 이성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본다.

다만, 어차피 서로 가면을 벗어던지고 펼친 진짜 싸움에서 공양왕의 이런 결정은 패배를 의미했다.

공양왕은 조선 건국 후 2년 만에 처형되었다.

처형 되기 전, 공양왕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정몽주 말을 들을걸.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찍소리라도 내고 죽었어야 했는데...'


* 나라 훔친 이야기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를 아는가?

일본 전국시대 무장인 사이토 도산의 이야기인데, 그는 기름 장수에서 시작하여 미노 지방의 영주였던 도키 가문의 신하가 되었고,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권력을 키워 결국엔 주군마저 내쫓고 미노의 영주가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시바 료타로는 '나라를 훔쳤다'라고 표현했다.

이성계에게도 같은 표현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위화도 회군은 1388년 5월의 일이며, 조선이 세워진 것이 1392년 7월이니 불과 4년 만에 이성계는 '나라를 훔쳤다.'

나는 이성계의 '나라를 훔치는' 계기가 우왕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성계는 부인 한씨에게서 여섯 아들, 부인 강씨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다.

이 중 한씨에게서 얻은 막내아들, 즉 이방원의 동복동생이 있었다.

이름이 이방연인데, 이방원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했다.

그런데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이후로 기록이 없다.

《태조실록》 1393년 9월 18일의 기록인데, 이때 이미 이방연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방연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을 증직하고...』


그리고 중국 측 기록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명태조실록 홍무 21(1388)년 8월 13일의 기록이다.

고려 천호 진경이라는 자가 명에 투항하며 알린 내용인데, 다음과 같다.

『그해 4월, 우왕은 요동을 침략하고자 하여, 최영과 이성계를 거느리고 서경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다.

성계는 진경을 애주에 주둔시켰다. 식량과 돈이 부족하여 후퇴했다. 왕은 격노하여 성계의 아들을 죽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왕성으로 돌아갔다. 왕성을 공격하여 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是年四月國王王禑欲寇遼東率其都軍相崔瑩李成桂繕兵于西京成桂使景屯艾州以粮餉不継退師王怒殺成桂之子率兵還王城成桂乃以兵逼王攻破王城囚王及崔瑩.』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당시에 다른 가족들처럼 도망가지 못하고 잡혀 죽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성계는 이방연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아들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우왕에 대한 증오심에 폭주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조민수와 이색에게 밀리자, 명나라를 끌어들이면서까지 복수를 노렸던 것 아닐까?

그렇게 보자면 1389년 7월 7일, 우왕의 생일을 맞아 이성계가 연 잔치는 '적과의 동침' 그 자체다.

『우리 태조와 판삼사사 심덕부, 판개성부사 배극렴, 문하평리 정지 등이 황려부에서 우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우왕과 이성계는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난 이 대목에서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이인임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고려사》 1389년 12월 14일 기록에는 공양왕이 우왕과 창왕을 죽일 것을 결정했고, 이성계는 만류한 것으로 나온다.

『사재부령 윤회종이 상소하여 우왕과 창왕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에게 차례로 물었으나 모두 말없이 있었는데, 우리 태조만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하였고 〈명〉 조정에 아뢰었으니, 중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신 등이 있으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려 한다 해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가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그 스스로도 당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지신사 이행에게 교지를 내려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으로 보내어 우왕을 죽이고, 예문관대제학 유구를 강화로 보내어 창왕을 죽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의미심장한 뒷얘기가 있다.

당시 지신사 이행은 사초도 작성했는데, 그때 그는 이성계가 우왕, 창왕, 변안열을 죽였다고 썼다.

《태조실록》 1393년 1월 12일의 기록이다.

『사헌부에서 상언하였다.

"전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이 일찍이 공양왕의 지신사가 되어 직책이 사관 수찬을 겸했는데도, 이색과 정몽주에 아첨하여,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우·신창과 변안열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썼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논죄하소서."

... 임금이 명하여 무진년 이후의 사초를 바치게 하고서 친히 이행의 기록한 것을 보니, 안열과 신우·신창 부자를 목 베인 일들을 모두 임금을 지척(指斥)하여,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고려사》는 몇 번에 걸쳐 고쳐 쓰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방연에 대한 기록이 지워지고, 우왕과 창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 역시 고쳐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서술하는 것이 이성계와 이씨 왕조에 더 유리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나라를 훔치는' 과정에서 대의를 강조했는데, 그가 주장한 것들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뭐야? 거창하게 대의니, 정당성이니 한 것들은 핑계에 불과할 뿐, 결국 지 아들 죽였다고 복수한 거네."


* 맺음말


조민수가 죽은 후에도 반 이성계파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공양왕은 1391년 9월, 정몽주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정리했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색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하여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회군한 후에 왕씨를 옹립하기로 의논하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었다.

조민수가 신창의 외척으로서 당시 대장이었는데, 이색이 실로 겁을 먹고 나약하였으므로,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옹립하는 것이 국가의 상례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창을 옹립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죄가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또 우현보·박가흥을 용서하려고 하니, 김주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뜻이 있으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면서 말하기를, “경은 나를 사사롭다고 여기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색·우현보 등을 석방시켰는데, 이는 공술한 말이 없었고, 다만 김저·정득후의 진술만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명하기를, “조민수·변안열은 그 집을 몰수하라. 지용기·박가흥은 그전대로 부처시키고, 우인열·왕안덕·박위는 외방 종편하도록 하며, 나머지는 모두 경외 종편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겠는가?

조민수와 변안열은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공양왕은 아직 살아있는 이색, 우현보 등 자기세력을 지키기 위해 죽은 자들을 버렸던 것이다.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자.

영화 '넘버 3'에서 '넘버 쓰리' 서태주는 넘버 원과 넘버 투가 자신을 팽시키려하자 검사 마동팔의 힘을 빌려 넘버 원과 넘버 투를 감옥으로 보낸다.

그렇지만 그 역시 조직 세계에서는 퇴출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넘버 쓰리' 이성계는 '넘버 투' 조민수와 손잡고 '넘버 원' 최영을 제거한 후, 조민수와 우왕, 창왕, 공양왕, 정몽주 등 정적들을 깡그리 처리하고 '나라를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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