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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1)

by Loxias

사실 나로 하여금 이 시리즈를 기획한 계기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손찬이형'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즐겨 는데,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른 과감한 주장을 종종 펼치곤 한다.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에 대한 해석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사마의 가문이 비밀리에 관리한 삼천의 결사대를 가지고 거사를 도모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1년간 사병을 몰래 관리할 수가 있느냐.

이건 일부 대신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놀랍도록 비슷한 우리 역사의 한 사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차 왕자의 난.


* 고평릉 사변 = 1차 왕자의 난


고평릉 사변은 249년 1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마의는 이를 통해 조상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위의 2대 황제 조예는 죽으면서 다음 황제 조방을 종친 조상과 사마의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조상은 점차 사마의를 배제시키고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247년 4월 사마의의 부인 장춘화가 죽고, 사마의는 5월부터 병을 핑계로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 일파는 사마의에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248년 3월, 조상 일파인 이승이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사마의를 방문했다.

사마의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사마의가 거의 반 시체나 다름없이 행동하여 이승을 속였고, 이를 전해 들은 조상이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249년 1월, 고평릉 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와 함께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에 참배를 간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때 장남 사마사가 비밀리에 관리해 온 병력을 이용했다고 한다.

《진서》 경제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晨會兵司馬門,鎮靜內外,置陣甚整。宣帝曰:「此子竟可也。」 初,帝陰養死士三千,散在人間,至是一朝而集,眾莫知所出也』

사마사가 삼 천명의 병사를 사람들 사이에 흩어놓았다가 순식간에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되어 있다.

이게 사마 가문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걸, '손찬이형'의 저 해석을 듣기 전까진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저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힘들겠지만, 더 어려운 것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다.

삼 천명의 병사들과 가족들,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조상 일파를 찾아가 알리기라도 하는 날엔 그대로 끝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마사가 관리를 잘 했다고 해도 삼천 명의 사람을 모으는데 아무런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사마의가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며, 신고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조상 일파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 성공한 것이다.

즉, 사마 가문 이외에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이 있어 조상 일파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제 1차 왕자의 난을 보자.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 건국 후 권력에서 밀려난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사건인데, 여기에서는 이방원이 사마의의 포지션이고 정도전이 조상의 포지션이다.

1차 왕자의 난과 관련된 기록은 《태조실록》을 참고해야 한다.


기록에 나타난 이방원의 병력은 한심한 수준이다.

『정안군이 본저 동구의 군영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상당군·회안군 부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조영무·신극례·서익·문빈·심귀령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은 겨우 9명뿐이었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그런데, 같은 날의 기록에서는 이런 내용도 찾을 수 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 봉원량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상반되는 두 기록이 있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기록이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작 저 수십 명의 군대로 정변을 일으켰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궁궐 수비대에 의해 진압되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최소 궁궐 수비대와는 비등한 정도의 병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 병력은 모두 어디에서 모은 것인가?


기록에 따르면, 이미 여러 왕자들이 거느렸던 사병을 폐한 상태였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를 폐하게 한 것이 이미 10여 일이 되었는데, 다만 방번만은 군사를 거느림이 그전과 같았다.

정안군이 처음에 군사를 폐하고 영중의 군기(軍器)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때에 와서 부인이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할 계책을 하였던 것이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잠깐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기록에는 이방원이 사병을 폐하고 무기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부인 민씨가 몰래 준비했다고 쓰여 있다.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많은 무기를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민씨가 시장에서 샀을까? "창하고 칼 백 개만 주세요." 하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기를 마련한 것일까?

간단하다. 무기를 폐기하지 않고 숨겨놨던 것이다.


정도전이 여러 왕자들의 사병을 폐했을 때, 당연히 무기도 같이 폐기하는지 확인하라고 했을 것이다.

군대에서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장을 하지 않은 군대는 군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대가 항복했을 때 가장 먼저 취하는 조치가 무장 해제, 즉 무기를 모두 빼앗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도전 본인이 직접 다니며 일일이 확인할 수 없으니 사람들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이방원의 영에 확인하러 왔던 관리들이 처음부터 그와 한 편이었거나, 그 자리에서 협력하기로 하고 무기를 숨기는 것을 묵인했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병을 폐했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당장 서울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 기록을 통해 원래 이방원이 데리고 있던 사병의 절반 정도는 정변에 참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정변에 참여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병력이 있다. 다음을 보자.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의 건국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으로써 각도의 절제사로 삼아 시위하는 병마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 이방번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가별치는 가별초, 즉 가문에 소속된 사병을 뜻한다.

이방원이 원래 이성계로부터 동북면 가별초 약 5백명을 받아서 휘하에 두고 있다가 이방번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자, 여기에서 위의 기록을 다시 보자.

정도전이 왕자들의 사병을 폐했을 때,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이방석의 동복형인 이방번이었다.

이를 통해 이방원이 데리고 있다가 이방번에게 넘겨준 5백명의 군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난 이 동북면 가별초의 상당수가 이방원의 거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이방번보다는 이방원과의 유대감이 훨씬 컸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방원에게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는 군대가 바로 이숙번의 정릉 수호군이다.

정릉은 1396년 사망한 이성계의 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 정릉 수호군을 두었는데, 그때 마침 정릉 수호군으로 이숙번이 군대를 끌고 와 있었다는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많은 드라마에서 이렇게 표현했지만, 실록에서는 이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릉 수호군이 존재했던 건 확실하다. 이건 기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릉 수호군 1백 명을 줄여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었다.』 (《태조실록》 1398년 12월 26일)

그리고 앞의 기록에서 봤듯이, 이숙번이 도성 안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 더, 하륜이 끌고 왔다는 충청도 군이다.

이것도 기록에 있다. 《태종실록》 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이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충청도 군이 언제 도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이 꽉 찼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정변이 일어났을 때 이미 이방원에게 합류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날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병력은 이 정도이다.

앞서 고평릉 사변에서 언급했듯이, 쿠데타 병력을 동원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다?

그렇다. 비밀 유지다.

정도전은 이 병력들이 집결하는 동안 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 역시 상식과 벗어나는 일이다.


당장 하륜의 충청도 군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였다고 해도, 최소 수 백명의 병력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이것이 상부에 보고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이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앞선 무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방원에게 포섭되거나 마음이 기운 지휘 라인상 관리들이 고의로 보고를 누락시킴으로써 이방원의 거사를 도왔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고평릉 사변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 관료 사회에 정도전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각처에서 이방원의 거사에 협조하거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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