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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2)

by Loxias

* 정도전 몰락의 과정


정도전의 드라마틱한 몰락은 1396년 2월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신들이 가지고 돌아온 명나라 예부의 자문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홍무 29년 정조의 표·전문 속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으니...

이(李)로 하여금 흔단의 소이를 알게 하고, 글 지은 자가 도착하면 사신은 돌려보낼 것이다.』


주원장의 문자옥(文字獄)은 유명했다.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그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사람들을 벌하곤 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더럽고 아니꼽지만, 상대가 명나라 황제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같은 달, 조선에서는 표문을 작성한 정탁은 보내지 않고, 전문을 지은 김약항만을 보냈다.

『홍무 29년의 정조 표문은 성균 대사성 정탁이 수찬하고, 동궁에게 올린 전문은 판전교시사 김약항이 수찬했으나, 정탁은 현재 풍질병으로 기동을 할 수 없어서 일으켜 보내기가 어려우므로 분부에 의해서 통사 곽해륭을 보내며, 전문을 수찬한 김약항을 북경에 보내오니, 폐하의 결재를 기다리겠나이다.』


같은 해 6월, 명의 사신 우우(牛牛) 등이 조선에 와서 주원장의 명령을 전했다.

『이(李)에게 글을 지은 사람을 보내게 하였더니, 단지 전문을 지은 자만 보내 오고, 그 표문을 지은 정도전·정탁은 여태껏 보내 오지 않아서...』

2월에 조선이 보낸 문서에는 정도전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명에서는 정도전을 콕 찍어서 언급했다.

주원장이 무슨 이유에서 정도전을 찍었는지는 훗날 드러나게 된다.


주원장의 요구에 조선 조정의 의견은 분열되었던 것 같다.

정도전을 명에 보내야 한다는 의견과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

조준은 정도전을 명에 보낼 것을 주장했다. 《태종실록》 조준의 졸기를 보자.

『정축년에 고황제(주원장)가 본국의 표사 안에 희모하는 글자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을 잡아서 경사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 남은은 정도전을 보내지 말자고 주장했다. 《태조실록》 7월 8일의 기록이다.

『참찬문하부사 남은이 상서하여 찬문자와 유구 등의 가속을 보내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사신이 도착한 지 한 달도 더 지난 7월 19일에야 조선 조정은 정탁, 권근, 노인도를 명나라로 보냈다.

『삼가 분부하신 대로 표문을 지은 정탁과 교정한 권근이며, 교정을 계품한 노인도는 판사역원사 이을수를 시켜서 경사로 압송해 가 폐하의 결재를 청하는 외에...』

그렇다면 주원장이 콕 찍은 정도전은? 명에 가지 않았다.

『정도전은 정탁이 지은 표문에 일찍이 지우거나 고치지 않았으므로 일에 관계없으며, 또 본인은 복창과 각기병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인물이 있다. 바로 권근이다.

주원장의 성지에 권근의 이름은 없었음에도, 그는 왜 명나라에 가게 되었을까?

《태조실록》 1397년 11월 20일의 기록이다.

『처음에 황제가 우우 등을 보내어 정도전을 부르니, 도전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근이 임금께 아뢰었다.

"표를 짓는 일은 신도 참예하였으니, 원컨대 사신을 따라 경사에 가서 변명을 하겠습니다."

그때의 물론(物論)이 근의 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도전을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같은 해 11월, 명에 갔던 3인 중 정탁이 홀로 명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표문을 지은 정도전을 찾아내어 경사로 보내라 했더니, 지금 사신이 돌아왔는데, 조선 국왕이 「정도전은 병이 침중(沈重)해서 조리를 하지 못하고 올 수 없다.」 하고, 단지 표문을 함께 지은 정탁 등 3명만이 경사에 왔기에, 그 연유를 신문하였는데, 각 관원이 수재(秀才)가 표문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 하고, 앞서 보낸 글도 그들이 의논해 만든 것이라 하는데...』

그리고 해가 바뀌어 1397년 3월, 권근이 억류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권근은 주원장이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 3수 등을 받아왔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간략히 정리하면 '까불지 마라.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4월, 설장수, 양천식 등이 명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성지에서 주원장은 다시 정도전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순히 언급한 수준이 아니라, 맹비난을 퍼부었다.

『지금 조선 국왕의 문인인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의 근원일 것이다.』

『정도전은 여기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산해위에 지나다가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명과 사이가) 좋아지면 좋은 것이고, 안 좋아지면 와서 부딪치겠다.」 고 하였다.』

결국 유추해 보자면, 정도전이 명나라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감히 대들 생각을 했으니 표문을 핑계삼아 소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이 명나라에 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니, 이성계로 하여금 '화의 근원'이 될 것이니 잘 생각하라고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돌연 정도전이 권근을 탄핵하고 나섰다.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근이 황제의 우례(優禮)을 받고 돌아오매, 도전이 헌사를 사주하여, 근은 정총 등이 모두 억류를 당하였는데 혼자 방환을 얻는 까닭을 탄핵하게 하고, 드디어 임금께 말하였다.

"총 등은 모두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홀로 근은 금을 상주어 보냈으니 과연 신의 헤아림과 같습니다. 청하옵건대, 국문하소서."

도전이 힘써 국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가 진로(震怒)하였을 때를 당하여, 자청하여 가서 능히 천위를 풀리게 하여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데 도리어 죄주기를 청하는가?"』

정도전은 이에 더해 주원장에게서 성지를 받아 온 설장수, 양천식 등도 탄핵했는데, 그 이유가 어처구니없었다.

『천식·장수도 또한 도전이 꺼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에 들어가서 말한 것이 있다고 무고하였었다.』


나는 이것을 정도전의 명백한 정치적 실책이라고 본다.

그가 병을 핑계 대고 명나라에 가지 않은 것은 그나마 이해해 줄 여지가 있었다.

가면 잘못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위험에 빠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을 대신해서 명나라까지 다녀온 권근을 탄핵한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오죽했으면 이성계마저 정도전에게 핀잔을 줬다.


주원장이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자중하긴커녕 대놓고 반발하고 나섰다.

요동정벌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조실록》 1397년 6월 14일의 기록이다.

『당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꾀하여 임금께 의논을 드렸는데, 좌정승 조준의 집에 가서 유시하였다.

준이 병으로 앓고 있다가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극력 불가함을 아뢰었다.

"본국은 옛날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히 이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거사하여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조준의 졸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드디어 억지로 병을 이기고 들어와서 〈태상왕을〉 뵙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백성들의 기뻐하고 숭앙함이 도리어 잠저 때에 미치지 못하옵고, 요즈음 양도의 부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로함이 지극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자가 밝고 착하여 당당한 천조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으로서 불의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

태상왕이 준의 말을 좇으니, 의논이 마침내 그치었다.』


이성계 본인이 요동 정벌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던 게 1388년,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전히 그는 요동 정벌은 무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도전·남은 등의 의견에 반대하고, 조준의 말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명과 조선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사건이 발생했다.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윤보가 명에 억류되었던 정총, 김약항, 노인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12월, 주원장은 또다시 표전문을 문제 삼고 나섰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이성계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린 것이다.


이성계는 즉위 초기부터 계속해서 주원장의 생트집에 시달렸다.

《태조실록》 1393년 5월 25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이 엄준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과 석보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내가 봤을 때 이때 이성계는 여차하면 명과의 관계를 끊고 전쟁까지 할 각오였을 것이다.


12월 22일, 이성계는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로 삼는다. 교서의 내용을 보자.

『성보를 수축하여 거민을 편안하게 하되, 적당히 참호를 두어 왕래를 편하게 하며, 주군(州郡)의 경계를 구획하여 분쟁을 막고, 군민의 호를 정제하여 등급을 정하고...』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지시한 내용은 사실상의 전쟁준비였다.

정도전은 동북면의 지방 조직을 정비하고 경원부에 성을 쌓았다.

1398년 3월 20일, 이성계는 정도전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의 공이 윤관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구성(九城)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삭방도(朔方道)를 다른 도와 다를 바가 없이 하였으니 공이 작지 않다.』


같은 해 윤 5월 28일부터 '진도(陣圖)'를 연습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훈련은 대단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론이 급속히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도의 절제사와 군사들로 하여금 약속을 정하여 갑자기 연습하게 하고 사졸을 매질하니, 사람들이 이를 원망하는 이가 많았다.』

6월, 이성계는 환자 박영문을 시켜 전라도와 경상도의 진도 강습 상황을 점검하고 보고토록 했다.

박영문이 점검을 마치고 돌아와 진도 강습 상황이 형편없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전라도, 경상도 각 진의 첨절제사 중 《진도》에 통하지 않은 자를 매질하게 했다.

8월 1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사헌부에 명하여 여러 왕자와 의성군 남은, 참찬문하부사 이무, 상장군·대장군 등이 진도를 익히지 않는 까닭을 묻게 하였다.』

이에 더해 8월 9일 이성계는 다음의 지시를 내렸다.

『절제사 남은·이지란·장사길 등은 개국 공신이고, 이천우는 지금 내갑사 제조가 되었으며, 의안백 이화·회안군 이방간·익안군 이방의·무안군 이방번·영안군 양우·영안군 이방과·순녕군 지·흥안군 이제·정안군 이방원은 왕실의 지친이고, 유만수와 정신의 등은 원종 공신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그리고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은 8월 26일이었다.


정도전의 몰락의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그의 보신 주의적 처신에 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주원장이 일단 지목하면 명나라에 갔다.

이 부분에 있어 그는 너무나 확연하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권근은 주원장이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자원해서 다녀왔다.

그리고 정도전의 비교 대상이 한 명 더 있다.


조선이 건국하고 불과 2년이 채 못된 1394년, 주원장은 조선 외교문서의 용어 등을 문제 삼아 ‘왕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성계가 누구를 보냈을까? 그렇다. 이방원을 보냈다.

정몽주 살해 사건 이후 이성계에게 찍혀 세자 자리도 빼앗기고, 찬밥 신세였던 그 이방원을 말이다.

매몰차게 외면해 왔던 아들에게, 이성계는 모양 빠지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이에 이방원이 같은 해 6월, 명나라를 향해 떠났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방원의 말에 이성계조차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이를 두고 훗날 왕자의 난과 결부시켜 이방원의 큰 그림이었으니, 지극히 계산된 행동이었으니 하는 의견들이 있는데, 이건 결과를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주원장은 한번 찍히면 공신이고 뭐고 없었다.

'남옥의 옥'이 벌어져 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쓸려나간 것이 1393년,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주원장이 조선의 왕자 따위의 안위를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당장 명나라에 가면 옥에 갇혀 인질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는데, 거길 왜 간단 말인가?

아마 다녀오면 세자를 시켜주겠다고 해도 거절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한다. 이때 이방원의 행동은 정말 대인배의 그것이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보신 주의적 행태로 인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명에 대항할 명분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사실 주원장이 정총, 김약항, 노인도를 죽인 것은 아무리 대국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선이 명의 신하국이라고는 하나 엄연한 독립국가인데, 사신으로 온 타국의 관리들을 함부로 억류하는 것도 모자라 죽여버린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주원장에 대한 분노로 온 나라가 끓어올라 복수를 하자며 들고일어났을 터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처럼 이성계와 정도전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1398년 윤 5월부터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8월까지, 이성계와 정도전은 계속해서 '진도'를 훈련하고 익히라고 다그치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오히려 반감이 거세졌다.

사람들도 다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정총 등이 명에 끌려가 죽은 것도 어찌 보면 정도전 저 자가 가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벌어진 일 아닌가?'

'저 자만 명나라로 보내면 끝날 일을 가지고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요동을 쳐들어 간다고? 제정신인가? 내가 왜 저 자 때문에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그것도 모자라 훈련 제대로 안 한다고 끌어다가 곤장을 50대, 100대씩 치고 왕족과 공신들을 망신을 주니,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이방원의 권력욕에 희생된 것이 아니다.

냉정히 얘기해서, 난 정도전은 제 무덤을 자기가 팠다고 본다.

정도전만 사라지면 훈련도 안 해도 되고, 끌려가 맞을 일도 없고, 요동 가서 개죽음 당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합심해서 정도전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정도전은 주원장의 소환 명령 거부라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중하긴커녕 폭주하여 왕족과 공신들을 윽박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밀어 넣으려 함으로써 인망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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