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가 정도전을 버리지 못한 이유
1차 왕자의 난으로 끝나는 정도전의 몰락 과정을 보면서, 난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일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이성계는 왜 정도전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냐는 점이다.
흔히 이성계와 정도전은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서는 '내건(內揵)'의 관계이며, 이성계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그의 말을 따랐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주원장이 정도전을 보내라고 하자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나아가 전쟁까지 각오할 만큼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관계가 내건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건 아니다.
《태조실록》 정도전의 졸기에 나오는 문구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훗날 이방원 측에서 저술한 내용인데도 이 정도다.
이것 말고도 둘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기록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정도전을 버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이성계에 대한 글에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었다.
'이성계는 세자를 세울 당시 참모의 리더 격인 조준이 이방원을 지지하자, 그 대신 정도전을 택해 힘을 실어 주었다.'
내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인데, 어떤 사건을 볼 때 관계자들의 나이를 함께 보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하고 다음 달에 세자를 정했는데, 당시 왕가 주요 인물들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 - 1335년생, 당시 58세
이방우 - 1354년생, 당시 39세
이방과 - 1357년생, 당시 36세
이방원 - 1367년생, 당시 26세
이방번 - 1381년생, 당시 12세
이방석 - 1382년생, 당시 11세
이성계는 죽은 한씨 부인이 낳은 장성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강씨 소생인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방원이야 찍혀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적장자 이방우도 아직 살아 있었고, 전쟁터를 따라다닌 이방과도 있었다.
이방석은 적장자라는 정당성도 없을뿐더러, 11세에 불과했으니 조선 건국에 기여한 바도 없다.
이성계의 결정은 한씨 소생 왕자들은 물론 대신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결정이었다.
이방석을 세자로 삼을 때 배극렴, 조준 등은 모두 반대했는데, 이성계가 이들을 찍어 눌렀던 것이다.
다시 한번 그 때의 기록을 보자. 《태종실록》 조준 졸기의 기록이다.
『극렴이 말하기를, "적장자로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義)입니다."
하매, 태상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준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하였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준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무리한 결정이었다는 걸 이성계가 몰랐을 리 없다.
혹자는 이성계가 사람들이 그의 권위를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결정을 받아들일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고 말하는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당장 이성계 본인이 쿠데타로 집권했다.
더군다나 당시 그의 나이 58세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자기가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후속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후속 대책이 바로 정도전을 픽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권력 다툼에 있어 총구, 즉 무력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권력 = 무력',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진리다.
《태조실록》 1393년 9월 1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군 총제부(三軍摠制府)를 고쳐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삼고, 중방을 폐지하였다.』
조민수에 대한 글에서 언급되었던 삼군 총제부를 기억하는가?
『오군을 줄여서 삼군으로 하고, 도총제부에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할하도록 하였다.
우리 태조를 도총제사로 삼고 배극렴을 중군총제사로 삼았으며, 조준을 좌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우군총제사로 삼았다.』 (《고려사》 1391년 1월)
그렇다. 바로 그 삼군 총제부가 의흥 삼군부가 된 것이다.
《정종실록》 1400년 4월 6일의 기록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태상왕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정도전은 바로 이 의흥 삼군부의 장(長), 즉 '판의흥삼군부사'가 되었다. 병권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가 군사행정을 총괄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태조실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도전이 군사를 구정(毬庭)에 모아 진도(陣圖)를 설치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고각·기휘·좌작 진퇴의 절차를 익히게 하였다.』 (1393년 11월 12일)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을 보내어 태뢰로써 둑에 제사지내게 하니, 도전과 제사에 참여한 장사들이 모두 철갑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 (1394년 1월 27일)
『임금이 임진의 수미포에 거둥하여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오군진도를 연습하게 하고는, 또 말하였다.
"내일에 내가 장차 친히 관람할 것이다."』 (1394년 3월 11일)
이에 반해 한씨 소생 왕자들은 병권에서 배제되었다.
조선 건국과 함께 이성계는 '의흥 친군위'라는 친위부대를 창설했는데, 최고 지휘관인 도절제사에 이복동생 이화를, 정도전, 이지란, 이방번, 이제(강씨 소생인 경순공주의 남편)를 절제사로 임명했다.
이에 반해 한씨 소생 왕자들 중에는 이방과만이 절제사로 임명되었다.
《태종실록》 1403년 6월 5일 기록에 등장하는 이방원의 회고도 참고한다.
『부왕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용병을 모두 내게 위임하시고, 매양 인견(引見)하고 일을 의논하였는데, 정희계가 매양 나를 부왕께 참소하므로, 뒤에는 입궐하려고 하면 문지기가 힐난하여, 비록 고할 일이 있어도 내가 들어가지 못하였다.』
앞선 《태종실록》 1403년 6월 5일 기록에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남은 역시 이방석의 지원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상전께서 계룡산의 터를 보고 돌아오실 때에 내가 남은의 장막에 들어가니, 은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장막에 들어오지 마시오.’ 하기에, 내가 드디어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었다.
이때에 태상전께서 세자를 남은에게 부탁하시었다.』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을 갖고 있던 상황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는 여론이 있었다. 《태조실록》 1394년 11월 4일의 기록이다.
『당초에 변중량이 병조 정랑 이회와 말하였다.
"예로부터 정권과 병권을 한 사람이 겸임을 못하는 법이라, 병권은 종친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실로 좋지 못하다."
〈그후〉 임금이 중량을 불러서 물은즉, 중량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였다.
"박포도 또한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하여 여러 번 별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정도전이 조선의 병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주원장이 사신을 보내 그를 지명하여 잡아 오라고 한 것이 1396년 6월이었다.
이전 회에서 이야기했듯, 주원장이 정도전이 명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했다는 말, 『(명과 사이가) 좋아지면 좋은 것이고, 안 좋아지면 와서 부딪치겠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판의흥삼군부사'가 되어 병권을 잡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그를 표문을 핑계 삼아 소환한 것이다.
이성계가 이때 조준 등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을 보내지 않은 것은 이성계 본인이 그를 매우 아꼈으며, 주원장의 무리한 요구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이유도 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본다.
정도전이 병권을 잡은 것은 세자 이방석을 지원하는 목적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강씨에 대한 총애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기라성 같은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은 행실에 문제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등장하는 이방석의 문제 있는 행동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간관이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언하니, 임금이 세자에게 분부하여 매일 서연에 나아가 강습을 게을리 말라고 하였다.』 (1395년 9월 18일)
『판사복시사 여칭을 불러 분부하였다.
"내가 나가서 거둥한 뒤에, 세자가 비록 나가서 놀려고 하더라도 너는 말[馬]을 올리지 말라."』 (1396년 1월 19일)
『함부림이 말하였다. "창기(娼妓)가 궁중에 출입한다는데 참말이옵니까?"
세자가 무안한 얼굴로,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소." 하였다.』(1396년 1월 24일)
자신이 세자가 된 것이 적절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이방석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주원장이 정도전 잡아오라고 사신을 보냈던 1396년 6월은 미묘한 시기였다.
그 달 26일, 신덕왕후 강씨가 병이 나서 두 달 후인 1396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세.
강씨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성계에게 이방석을 신신당부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강씨를 정말 아꼈던지, 그녀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줬다.
그렇다 보니 이방석을 지원할 핵심 인물, 정도전을 더더욱 명에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도전을 명에 보내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번엔 조선 내부적으로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이때를 기점으로 정도전, 남은, 강씨 소생 vs 한씨 소생, 종친, 조준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이다.
《정종실록》 1399년 8월 3일, 조준이 이방과에게 올린 글의 일부에서 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도전이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서부터 남은과 결탁하여 요동을 치자고 꾀해서 한 몸의 화를 면하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과 신 사이에 시기하고 틈이 생겨, 형세가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입니다.』
우정승 김사형 역시 반대했다.
『처음에 남은이 정도전과 더불어 친근하여 몰래 요동을 공격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남은이 임금에게 비밀히 말하였다.
"조준과 김사형이 매양 이의가 있습니다."』
이방과 역시 정도전과 대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전이 병이 아직 낫지 않으므로 그대로 있게 되었다.
지금은 병이 나았으므로 장남 이방과가 나에게 고하기를, ‘도전을 마땅히 보내어 경사에 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도전이 그 말에 원한을 품고... 』
정도전, 남은은 한씨 소생 왕자들 및 조준 등과 틈이 벌어지자 요동 정벌을 구실 삼아 사병을 빼앗으려 했다.
《태조실록》 1398년 3월 20일의 기록이다.
『남은이 진언하였다.
"상감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일찍이 군사를 장악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사오며, 신 같은 자도 또한 보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국하는 처음을 당하여 여러 공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맡게 한 것은 가하였지마는, 지금 즉위하신 지가 이미 오래오니, 마땅히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을 만들면 거의 만전할 것입니다."』
절제사를 혁파하자는 남은의 말에 대한 이성계의 첫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누가 남은을 무실(無實)하다 하는가? 이 말이 진실로 시종(始終)의 경계이라."』
그런데 이것과는 배치되는 다른 기록도 있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 변중량을 사주하여 소를 올려 여러 왕자의 병권을 빼앗기를 청함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이방원)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계속해서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주던 이성계는 결정적 순간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를 나는 이렇게 추측한다.
이성계는 두 세력의 대립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정도전에게 원했던 건 병권을 가지고 이방석을 보좌하라는 것이었지, 한씨 소생 왕자들과 조준을 탄압하라는 건 아니었을 터.
이방석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들 역시 사랑하는 아들들이었고, 정도전만큼은 아닐지라도 조준 역시 아끼는 신하였다.
이성계는 한씨 소생 왕자들로부터 사병마저 빼앗는다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정도전에게 해코지를 당할 가능성이 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도전이 보여준 행적을 보면, 이성계의 우려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