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자뷔 그 이상, 법정과 정도전
정도전이 '삼국지' 유비의 명참모, 법정(法正)과 유사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둘 사이에는 비슷한 부분이 매우 많다.
먼저 법정이 유비와 만나는 장면부터 보자.
『법정은 유장의 뜻을 전한 후, 은밀히 유비에게 계책을 바쳤다.
"장군의 영웅다운 재략에 의지하고, 유목(유장)의 유약함을 틈타도록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익주의 풍부한 자원에 의지하고, 하늘로부터 받은 험준한 기세에 기대십시오.
이것으로써 사업을 성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삼국지》 촉서, 법정전)
이번에는 정도전이 이성계와 만나는 장면을 보자.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법정은 유비에게 유장을 배신하고 익주를 취하라 권했고, 정도전 역시 이성계에게 혁명을 암시했다.
유비는 가맹관 회군을 감행, 유장을 제압하여 익주를 차지하고 한중왕을 거쳐 결국 제위에 올랐다.
이성계 역시 위화도 회군을 감행, 권력을 장악하고 고려를 무너뜨려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유비와 이성계가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법정과 정도전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법정의 공적에 대한 평가다.
『제갈량이 대답하여 말했다. "법효직(법정)은 주공을 보좌하여 하늘 높이 날도록 하고 다른 사람에게 또다시 압박을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삼국지》 촉서, 법정전)
정도전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번 보자.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법정의 능력은 뛰어났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것은 그의 지분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위의 명장 하후연을 죽이고 한중을 차지하는 계략이 그에게서 나왔다.
『제갈량은 항상 법정의 지모와 책략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법정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으며, 기이한 계획과 책술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삼국지》 촉서, 법정전)
법정에 비해 문(文)에 치우쳐 있긴 하지만, 정도전 역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할 때 정도전을 시켜 그림을 살펴 악기를 만들게 하였다.
예의정랑·예문응교·성균사예를 지냈으며 문학으로 이름이 나 왕이 그를 매우 아꼈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그리고 둘은 모두 권력을 잡은 후 개인적 보복을 감행했다.
『법정은 그에게 한 끼의 밥을 먹도록 한 은덕을 베풀거나 작은 원망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갚거나 보복을 했으며, 자신을 헐뜯고 다치게 한 사람들은 여러 명이나 살해했다.』 (《삼국지》 촉서, 법정전)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법정의 행각이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정도전에 대해서는 그의 이런 모습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보복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 《태조실록》 등에 떡하니 등장한다.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정도전의 개인감정에 근거한 보복 행각이 처음 나타나는 건 1391년 5월,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려 이색과 우현보를 죽일 것을 청하면서부터이다.
상소에서 정도전은 이색과 우현보가 왕씨가 아닌 우왕과 창왕을 왕위에 앉혔고, 우왕 복위를 꾀했기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를 견제해야 했던 공양왕은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평양부윤으로 내보냈다가 1391년 9월에는 봉화로 추방하기까지 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즉위 교서가 배포되었다.
즉위 교서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다.
『유사가 상언하기를, ‘우현보·이색·설장수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해상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강회백·이숭인·조호·김진양·이확·이종학·우홍득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태조실록》 1392년 7월 28일)
당일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교서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한산군(이색)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
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태조실록》 1392년 7월 28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392년 8월, 이들 중 8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최을의와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이숭인·김진양·우홍명과 양광도에 귀양간 이확과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 등 8인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장 1백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도전이 남은 등과 몰래 황거정 등에게 이르기를,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
하니,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태조실록》 1392년 8월 23일)
정도전이 계속해서 죽이라고 주장했던 이색과 우현보는 이성계가 절대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손대지 못했지만, 8명의 사람들이 맞아 죽은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도전과 원한 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우홍수, 우홍명, 우홍득. 이들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형제간으로, 우현보의 아들들이다.
《태조실록》에서는 우씨 가문과 정도전의 악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 현보의 족인인 김전(金戩)이란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김전의 족인들은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오직 김전만은 자기의 딸이라고 하여 비밀히 사랑하고 보호하였다.
김전이 후일에 속인이 되자,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를 삼고, 그 딸을 사인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는 노비와 전택을 모두 주었다.
우연이 딸 하나를 낳아서 공생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는데,... 운경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곧 정도전이다.
그가 처음 벼슬하매 현보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경멸하므로, 매양 관직을 옮기고 임명할 때마다 대성에서 고신에 서경하지 않으니, 도전은 현보의 자제들이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태조실록》 1392년 8월 23일, 이숭인·이종학·우홍수 졸기)
이에 대해 정도전은 다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직접 부친 정운경의 행장을 썼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해 겨울 12월 18일에 부인 우씨가 돌아가서 선생과 부장하였는데, 우씨는 영주의 사족 산원 우연(禹淵)의 딸이다.』 (《삼봉집》 정운경 행장)
《태조실록》과 《삼봉집》을 비교해 보면, 외조부의 이름이 '우연'이라는 것은 일치하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렇다고 정도전의 말이 맞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가 모친의 신분을 감추려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역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정도전이 천민 출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우현보 등은 정도전이 천민 출신이라는 주장을 퍼뜨렸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고려조 정도전의 관직 생활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서경(署經)'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국왕이 관리를 임명하더라도 대간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정도전의 '고신이 지체되었다'는 것은 결국 고려의 대간들이 우씨 가문의 주장을 보다 신뢰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핑계 삼아 정도전의 임명을 방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정도전은 자신이 핏줄을 이유로 정통성을 집요하게 공격했던 우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태조실록》의 첫 문장을 이렇게 바꿔 보겠다.
'공민왕이 그의 신하 신돈의 첩을 몰래 간통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오직 공민왕만은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여 비밀히 사랑하고 보호하였다.'
어떤가? 똑같지 않은가?
우왕의 정통성을 공격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정도전 역시 비슷한 이유로 공격받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정몽주가 1392년 4월 이성계가 부상당한 틈을 타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하고 장을 때려죽이려 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김진양과 이확은 그때 간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몽주에 협조했다.
『정몽주가 간관 김진양 등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의 지위를 훔쳤으며 미천한 근본을 감추려고 본래의 주인을 제거하고자 꾀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일을 이룰 수 없자 그럴싸한 죄를 엮어내어 많은 사람에게 연좌시켰습니다.
청컨대 유배된 곳에서 형벌을 주어 뒷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
하필이면 정도전이 민감해 했던 출신 성분 문제를 들먹여 그를 탄핵했다는 점에서, 이로 인해 정도전이 김진양, 이확 등에게 우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앙심을 품게 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정도전이 정몽주에게도 앙심을 품게 되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이전부터 이미 멀어지기 시작했던 둘의 관계는 이 시점에 이르러 완전히 파탄 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전 글에서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 이후, 정도전이 이방원을 찾아가 비난하는 드라마의 연출은 실제와 달랐을 거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정도전은 틀림없이 정몽주도 죽이자고 했을 것이다.
이제 8인 중 이종학, 최을의, 이숭인이 남았다.
이 중에서 기록이 빈약하여 이유를 추정하기 힘든 최을의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남는다. 이종학과 이숭인.
나는 정도전이 왜 이들을 미워했는지가 가장 의문이었다.
이종학은 스승 이색의 아들이었고, 이숭인은 이색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친구였다.
《태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이색, 이숭인을 미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태조실록》의 이 서술은 숨겨진 의미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다만 정도전이 조준과 교제하려고 그들과 원수가 되었다는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전이 스승 이색을 비롯한 이숭인, 정몽주 등 동문들과 틀어지게 된 이유는 이렇다.
그는 우왕 즉위 초,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원의 사신을 맞이하라는 지시에 격렬하게 반발했다가 파직된 적이 있다. 1375년 5월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이 모두 그와 뜻을 함께 했다.
『이때 이인임과 지윤이 원 사신을 맞이하려고 하니, 삼사좌윤 김구용, 전리총랑 이숭인, 전의부령 정도전, 예문응교 권근이 도당에 상서하여 이르기를,
“만약 원 사신을 맞이한다면, 한 나라의 신민이 모두 난신적자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현릉(공민왕)을 뵙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1375년 5월)
정도전에 이어 정몽주, 이숭인 역시 모두 파직되었다.
『지윤·이인임이 그를 크게 꺼리어 언양으로 유배 보내었다가 2년 쯤 되자 임의로 거주지를 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
『김구용·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가 연좌되어 유배되고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고려사》 이숭인 열전)
오직 권근만이 파직되지 않았다.
『권근이 정몽주·정도전 등과 더불어 도당에 상서하여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국정을 담당한 자들이 이들을 모두 무고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았으나, 권근은 나이가 어려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면할 수 있었다.』 (《태종실록》 1409년 2월 14일 권근 졸기)
그런데 함께 쫓겨났던 정몽주, 이숭인 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이었는데, 파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 사성이라는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정몽주는 1377년 사람들이 꺼려 하던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복직에 성공했다.
『〈우왕〉 3년(1377)에는 권신이 지난 번 일에 원한을 품어서 정몽주를 보빙사로 천거하여 하카타로 가서 왜구를 금지시켜줄 것을 청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전혀 어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왕〉 4년(1378)에 우산기상시에 제배되었고,... 〈우왕〉 6년(1380)에 우리 태조를 따라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제학에 제배되었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
이에 반해, 정도전은 1384년까지 근 10년을 야인으로 살게 되었다.
『정사년(1377, 우왕3) 7월, 예(例)에 따라 고향으로 옮기고, 또 4년이 지난 뒤에 서울 밖에서는 마음대로 살게 허가되었다.
그래서 삼각산 밑에 집을 짓고 글을 가르치니,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에 같은 고향 사람으로 재상이 된 자가 공을 미워하여 그의 서재를 헐어버려, 공은 제생(諸生)들을 거느리고 부평부사 정의를 찾아가서 부평부 남촌에 자리를 잡았는데, 재상 왕모(王某)가 그곳에 별장을 짓겠다고 서재를 헐어버렸다.
공은 할 수 없이 김포로 옮겼다.』 (《삼봉집》 부록, 사실)
이미 복직해서 잘나가는 동문들에 비해, 복귀는커녕 핍박을 받고 생활고를 겪고 있는 현실을 정도전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기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글이 현재에 전한다.
『내가 죄를 지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간 후부터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이 터무니없이 퍼져서 화가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내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하므로, 나는 답장을 아래와 같이 썼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 구름같이 흩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지고 은혜로써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삼봉집》 '가난')
아내에게 쓴 답장에서 정도전의 속내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이 돋보인다.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지고 은혜로써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함께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 내 비슷한 위치에 있을 때는 소위 '이색 문하'로 불리는 세력의 일원인 줄 알았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정도전은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복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 정몽주, 이숭인 등 동문들에게 깊은 아쉬움, 나아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흔히 이 10년의 야인 생활과 이때의 경험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했다고 한다.
나는 이와 별도로, 정도전이 요샛말로 친구들로부터 '손절'당했다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나아가 이들에게서 멀어지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스승 이색도 마찬가지였을 터.
정도전은 그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았고, 훗날 이색·이숭인 등이 그의 정치적 '보스' 이성계의 반대편에 서자 주저 없이 이들을 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정도전이 이색, 이숭인 등을 공격한 진짜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