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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5)

by Loxias

* 유비·제갈량·법정, 그리고 이성계·조준·정도전


'삼국지'에 법정의 보복 행각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어떤 사람이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은 촉군에서 지나치게 종횡무진하고 있으니, 장군께서 주공께 말씀을 올려 형벌과 은상을 내리는 그의 권한을 줄이게 해 주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하여 말했다.

"법효직은 주공을 보좌하여 하늘 높이 날도록 하고 다른 사람에게 또다시 압박을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법정이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국지》 촉서, 법정전)


이 일화를 두고 어떤 이는 '제갈량이 유비가 자신보다 법정을 더 아끼고 있음을 알았기에 입을 꾹 닫고 외면한 것'이라고 폄하하고, 또 어떤 이는 '제갈량이 법정과 분란을 일으킨다면 주군 유비에게 불충하게 되는 것이라 여겨 참은 것'이라고 좋게 평한다.

개인적으로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유튜브 '손찬이형' 채널에서 이에 대한 색다른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다음은 그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제갈량이 법정의 행동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건 은밀한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다.

법정이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면 과거 자신을 차별했던 토착세력이라든지, 유장에게 붙어 자신을 비방했던 이들일 것이다.

법정이 이들을 잡아 족치면, 그 자체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토착세력들을 유비가 직접 숙청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크다.

즉, 유비와 제갈량이 법정의 행위를 묵인한 것은 그에게 손에 피 묻히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의 해석을 듣고, '고평릉 사변 = 1차 왕자의 난'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의 해석을 정도전의 사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무슨 소리냐고? 이성계와 조준이 정도전의 폭주를 내버려둔 것은 그에게 손에 피 묻히는 역할을 맡긴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준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신기하게도, 정도전이 때려죽인 8인들은 조준과도 원한관계에 있었다.

『또 조준이 이색·이숭인과 틈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내 이색과 종학·숭인 등을 무함하여 원례로 삼고자 하였다.』 (《태조실록》 1392년 8월 23일, 이숭인·이종학·우홍수 졸기)

『또 조준이 대사헌이 되어 우현보를 논죄하였으므로, 우씨의 당이 모두 그를 미워하였는데, 왕도 우씨를 편들었고, 이로 인해 조준을 미워하였다.』 (《고려사》 조준 열전)

『<김진양이〉 우상시 이확 등과 함께 삼사좌사 조준, 전 정당문학 정도전, 전 밀직부사 남은 등을 논죄하며 말하기를, “조준은 1, 2명의 경상(卿相)과 뜻하지 아니하게 서로 싫어하게 되면서 정도전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농단하면서 여러 사람을 꾀어내어 협박하였습니다.』 (《고려사》 김진양 열전)


앞서 《태조실록》의 이 서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처음 이것을 접했을 때는 정도전이 이성계도 아니고 고작 조준과 교제하고자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위의 조준의 기록을 알고 난 후에,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

나는 정도전이나 조준 모두 당시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필요에 의해 한 편이 되었으며, 고려를 뒤집어 엎는 과정에서 이색, 우현보 등 기존 고려의 주류 세력과 원수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이색 밑에서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과 함께 공부하긴 했지만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다.

반대로 조준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이색의 문하가 아니었다. 요샛말로 하면 학벌이 별로였다.

정도전은 이인임에게 제대로 찍혀 10여 년을 야인생활을 하였으며, 조준 역시 권간(權姦)들이 설치는 고려 조정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자리에서 물러나 4년을 두문불출하였다.

나는 이것이 결국 정도전과 조준이 고려 조정 내 주류 세력에 속하지 못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전 이성계에 대한 글에서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보다 조준의 공이 컸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려 조정 내 반(反) 이인임 세력이 힘을 모아 그를 쫓아낸 것이 1388년 1월이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마저 제거되고 우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것이 1388년 6월이었다.

불과 6개월 만에 이인임과 최영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 시점부터 조선이 건국되는 1392년 7월까지, 4년 기간 동안 조준이 맹활약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조준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조준 열전에는 이성계가 조준을 대사헌으로 천거했다고 되어 있는 반면,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조민수가 조준이 자기 편이 될 것이라고 오판해서 대사헌에 임명하고 이성계 세력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고 그렸다.

개인적으로 둘을 절충하여, 이성계가 조준을 천거했고, 조민수가 동의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민수가 조준을 자기 편이 될 것이라고 오판한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헌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조준을 앉히는 데 동의했을 리 없다.

현대 사회에도 행정 조직의 수장이 바뀌었을 때 가장 먼저 자기 사람으로 교체하는 자리가 인사와 감찰 라인이다.

조직을 통제하는 데 사실상 이 두 자리가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사헌은 감찰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달 후, 대사헌 조준은 조민수를 탄핵했고, 창녕에 유배 보내는 데 성공했다.


사전을 혁파하는 것도 조준, 정도전 등이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조준의 역할이 훨씬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정도전 본인이 직접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1391년 1월, 삼군총제부 우군총제사에 임명된 정도전이 공양왕에게 사직을 청하며 했다는 말이다.

『원수를 없애 삼군으로 하면서 저를 총제사로 삼으신다면 여러 원수로 직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반드시 앙앙불락하면서, ‘정도전이 원수를 없애고 스스로 총제가 되었구나.’라고 말하면서 원망이 자자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또 신은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익숙하지 못하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전(私田)을 없애고 관복(冠服)을 고치는 등의 일은 모두 제가 한 것이 아닌데도 좌우에서 모두 저를 지목하고 있으니,...』 (《고려사》 정도전 열전)


종합해 보자면, 창왕 즉위 이후 총대 메고 이색, 우현보 등 세력에 대한 공격 전방에 나선 이는 조준이었다.

대사헌으로써 반대 세력을 탄핵하고, 그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입안하여 밀어붙였던 것이다.

조준은 이들과 별 연관이 없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색, 우현보 등과 원수가 되었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도전도 마찬가지였을 터.

우씨 가문과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고, 10년여의 야인 생활 동안 쌓인 서운함과 배신감에 동문들을 적으로 돌리는 데 별다른 동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준과 정도전의 행태에 결국 반(反) 이성계파로 돌아선 것이 정몽주라고 생각한다.

정몽주는 사실 정도전과 비슷한 케이스다. 이색 문하이긴 했지만,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몽주는 정도전과 달리 사회생활을 대단히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우왕이 정몽주의 집으로 갔다. 정몽주가 마침 기로(耆老)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최영이 술잔을 받들어 올리니 우왕이 말하기를, “나는 술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부왕 때의 연로한 재상들이 모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왕을 뵙는 것 같아 온 것이오.”라고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꿈에 경과 함께 적과 맞서 싸워서 이기고 내가 타고 있는 말을 보니 나귀였는데,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윤환이 이인임·홍영통·조민수·이성림·이색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고려사절요》 1385년 4월)


정몽주의 집에서 이인임, 최영, 이색 등 당시 주요 권신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는 자리에 우왕까지 왔던 것이다.

이랬던 정몽주가 불과 3, 4년이 지나지 않아 이인임, 최영, 우왕 등을 날리는 데 동조한 것을 보면, 그 역시 보통은 넘는 사람이다.

아무튼, 정몽주가 날리는 데 동조한 이들은 모두 그와 별 인연이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몽주야말로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이인임의 명대사를 실천한 사람일 것이다.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그러나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이 이색 등을 공격하고 나선 때부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 태조께서 조준·정도전과 함께 사전(私田)을 혁파할 것을 논의하고 조준이 동료들과 함께 창왕에게 상소하여 강하게 논하였는데,... 시중 이색은 옛 법을 가벼이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그 의견을 따르지 않았고, 이림·우현보·변안열 및 권근·유백유는 이색의 의견을 따랐다.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의견을 따랐으며, 정몽주는 그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고려사》 조준 열전)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에게는 스승과 동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색은 창왕을 옹립한 죄에 윤이·이초 사건까지 더해져 공양왕 즉위 후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다.

이숭인, 권근 등도 모두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러던 와중에 정도전마저 이색을 죽이자고 나서자, 결국 정몽주도 돌아섰던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정도전에게)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조준에게) "이보쇼, 거 너무 심한 거 아뇨!"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다시 정도전과 조준에게로 돌아오자.

결국 제갈량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법정의 행동을 묵인했던 것처럼, 조준 역시 정도전의 복수를 묵인하거나 방관했을 것이다. 정도전의 원수가 자신의 원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난 더 나아가 조준 역시 저들을 죽일 것을 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태조실록》에는 왜 저렇게 기록되었을까? 훗날의 정치적 상황이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정도전과 조준은 각각 이방석과 이방원을 지지하다가 정도전이 주원장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이후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방석과 이방원의 싸움의 최종 승자는 이방원이었으므로, 《태조실록》을 작성할 때 손에 피 묻히는 역할을 정도전에게 몰아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관계자가 아직 한 명 남았다. 이성계다.

그 역시 정도전의 복수 행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시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에는 이성계를 변호하려는 서술을 찾아볼 수 있다.

『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태조실록》 1392년 7월 28일)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장 1백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태조실록》 1392년 8월 23일)


그렇지만 결국 유비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계도 묵인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게, 정도전·조준과 저들의 관계를 이성계가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정말 저들을 보호하고 싶은 생각이었다면 이색, 우현보, 설장수의 사례처럼, 더 이상 손대지 말라고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

저들에게 장형을 가하는 것을 허락한 순간, 사실상의 처형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저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면, 일이 벌어졌을 때 정도전을 가만두면 안 되는 것이다.

저건 이성계의 명령을 정도전이 대놓고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했는데, 그걸 내버려둔다?

최소한 정도전으로 하여금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던가 정도의 조치는 취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계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조준과 정도전은 그의 중요한 참모이자 공신이며, 개인적으로는 친구였다.

반면 죽은 이들은 어쨌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정도전이 그들을 죽여 원한을 갚겠다는데, 그게 뭐 그렇게 못할 일이라고 끝까지 제지하겠는가?

솔직히 이성계도 '본보기로 반대파 전면에 섰던 인물들 중 몇 명은 죽이는 것도 괜찮겠군.'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정도전의 피 묻은 복수극은 단지 그의 개인적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당시 신흥 국가 조선이 필요로 했던 권력 정비의 일환, 즉 신상필벌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계와 조준은 정도전의 칼춤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그들은 제갈량과 유비처럼, 정도전에게 정치적으로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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