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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6)

by Loxias

* 재조지은(再造之恩)


법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한 끼의 밥을 먹도록 한 은덕을 베푼 사람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갚았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 정도전은 법정처럼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복수한 내용만 나오고, 은혜를 갚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나는 정도전 역시 법정처럼 확실하게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정도전이 누구에게 은혜를 갚았냐고? 바로 이성계다.


1375년 5월 이인임 등에게 제대로 찍혀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무려 10여 년에 걸친 야인생활이 정도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배신감을 주었고, 이로 인해 스승과 동문에 대한 원망이 생겼을 것이라고 서술했었다.

그 비참한 생활을 끝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준 것이 바로 이성계다.

나는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재조지은을 베푼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이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만난 것이 1383년 가을, 그가 아직 야인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계해년(1383, 우왕9) 가을에 공이 아태조(이성계)를 따라 함주막(咸州幕)에 갔으니 그때에 태조는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었다.』 (《삼봉집》 부록, 사실)

'왜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갔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당시는 아직 정도전을 내쫓은 이인임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정도전은 아마 죽으면 죽었지, 이인임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짓은 차마 하지 못 했던 듯 싶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미 8년 가까이 이어진 야인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여름 정도전이 다시 한번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간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갑자년(1384, 우왕10) 여름에 또 함주에 갔었다.』 (《삼봉집》 부록, 사실)


1384년 7월, 정도전은 마침내 복직에 성공했다. 정몽주와 함께 명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년에 하성절사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삼아 경사에 갔다가...』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당시 고려와 명은 긴장상태에 있었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 조정은 다시 원과 접촉했으며, 명 또한 아직 우왕을 책봉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 이미 주원장은 고려의 사신들을 두들겨 팬 후 귀양을 보내는 짓을 하고 있었다.

『본국과 〈명〉 조정 사이에 분쟁이 잦아지자 황제가 노하여 장차 우리에게 병사들을 보내려 하면서 세공(歲貢)을 늘려 정하였다. 이에 5년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고 하면서 사신 홍상재·김보생·이자용 등을 장(杖)을 치고 먼 땅으로 유배 보내었다.

이렇게 되자 하성절사를 파견해야 할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피하려고만 하였다. 최후에는 밀직부사 진평중이 거론되었는데,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를 임견미에게 뇌물로 주고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


명에 사신으로 가길 꺼려 하는 것이 이 정도였다 보니, 결국 정도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던 것이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복귀시키는 데 반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 대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명에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마 울며 겨자 먹기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을 추천한 것은 정몽주였을 테지만, 그 결정의 배후에는 이성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외교는 대성공이었다.

『즉시 떠나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절일(節日, 황제의 생일)에 맞춰서 표문을 올렸다...

예부(禮部)에 명하여 예를 후하게 하여 전송하도록 하였으며 홍상재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

정도전은 이 공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조정에 복귀했다.

『을축년(1385, 우왕 11) 4월, 사신 갔다 돌아오는 날로 즉시 성균 좨주·지제교를 제수받았다.』 (《삼봉집》 부록, 사실)


조정에 복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도전은 큰 공을 세웠다.

『5월에 우(禑)는 사신을 보내어 승습 및 시호를 청할 때에 공으로 하여금 표문을 짓게 하였다. 황제는 그 표문을 보고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시책사 장부와 주탁 등을 보내어 우를 책봉(冊封)하고, 사시(賜諡)했는데 그 제(制)에,

“표(表)의 말이 간절하다.” 하였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

정도전이 10년 넘게 끌어온 우왕 책봉 문제를 마무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이에 이르러서 우왕은 공으로 하여금 의주(儀注, 나라의 전례의 절차를 적은 것)를 초하여 익히게 하니 행동이 조금 예절에 맞았다.

장부의 무리들은, “예의가 훌륭하여 보는 것이 듣던 것과는 다르다.” 하니,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였다.』 (《삼봉집》 부록, 사실)


그런데 정도전은 돌연 남양부사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가 되었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황제의 극찬을 받은 표문을 짓고, 우왕을 보좌하여 훌륭히 사신을 맞이하는 공을 세웠는데 뜬금없이 외직이라니... 더군다나 자원이라니...

『외보(外補, 지방관)를 요청하여 남양부사로 나갔으니, 어떤 뜻이 있어서였다.』 (《삼봉집》 부록, 사실)

도대체 정도전은 한창 잘나갈 수 있는 시점에 왜 굳이 외직을 자청했단 말인가?


남양부사로 부임한 후 정도전은 우왕에게 감사의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정도전은 이렇게 설명했다.

『돌아보건대 신은 생활을 영위하는 꾀가 졸렬하여 먹을 것은 적은데 식구는 많습니다. 그래서 외임을 구하여 남은 세월이나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삼봉집》 남양부사로 도임하여 상께 감사하는 전(箋))

그러나 나는 이것이 정도전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정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나는 정도전의 남양부사 부임은 이인임 일파의 공격으로부터 피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정도전이 복직한 후 이인임은 지속적으로 그를 공격했을 것이다.

이때 우씨 가문의 주장, 즉 정도전의 출신 문제 역시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전의 정도전이었다면 그대로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을 세워 우왕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성계 등의 비호세력이 있었다.

정도전을 둘러싼 두 세력 간의 파워게임의 결과, 절충안으로 도달했던 것이 그의 외직 부임이었을 것이다.


1388년 1월, 드디어 최영과 이성계가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정도전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과 지공거로 승진되고,...』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같은 해 6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정성껏 보좌하여 조선 건국에까지 이르렀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성계가 일단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는 그 결정을 충실히 따랐다.

이성계가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무리한 결정을 했음에도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한양 천도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이성계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고는 이 역시 지지했다.


반면 조준은 이따금 이성계에게 반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창왕을 폐하고 이성계가 정창군(공양왕)을 세우자고 했을 때, 조준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조준이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서 재물을 다스릴 줄만 알지 나라를 다스릴 줄은 모르니, 왕위에 세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1389년 11월)

세자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성계가 붓과 종이를 조준에게 들이밀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도, 그는 이성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정도전과 조준의 이 차이가 이성계로 하여금 정도전을 보다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당신에게 두 명의 부하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모두 유능하며 능력에 있어 우월을 가리기 힘들다.

한 명은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다른 한 명은 이렇게 대답한다.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당신이라면 둘 중 누굴 고르겠는가? 이성계도 사람이다. 후자를 고르게 되어 있다.


내가 봤을 때,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단순한 정치적 보스가 아니었다.

이성계는 비참한 야인 생활에서 정도전에게 손을 내밀고 끌어올려 다시 쓰게 해 준, 말 그대로 ‘재조지은’을 베푼 존재였다.

그래서 정도전은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이성계의 대업을 위해 바쳤고, 그가 말하면 따지는 법 없이 따랐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을 아꼈다. 둘의 관계가 단순한 군신의 관계, 그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둘의 친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임금이 과주에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의 주최로 두모포 선상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리었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말하였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태조실록》 1395년 3월 4일)


이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정도전이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자신의 정적들에게는 천하의 악귀처럼 굴던 사람이, 흐느껴 울며 이런 아부성 발언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이것은 달리 이야기하자면 정도전이 이성계를 생각하는 게 진심이었다는 뜻이다.

정도전의 행동에 이은 이성계의 반응 역시 상대의 진심을 알고 그를 좋아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별다른 친분이 없을 때 저런 행동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고대 로마의 독재자 술라의 묘비에는 평소 그가 생각했던 문구가 새겨졌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술라의 이 비문은 정도전과 법정 모두에게 유효하다. 그들은 모두 은혜와 원한에 대한 구분이 확실했다.

정도전과 법정은 그들을 인정해 주고 은혜를 베푼 이성계와 유비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는 주군의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정도전과 법정의 칼춤을 이성계·조준, 그리고 유비·제갈량은 묵인했다. 어쨌든 이때까지 정도전과 법정의 적은 그들의 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이 상태에서 죽은 법정과 달리, 정도전은 더 오래 살았다.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의 무리한 희망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과거의 동지였던 조준과 이방원, 이방과 등을 적으로 돌려 버렸다.

정도전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이방원, 이방과 등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이방석이 왕이 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정도전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나는 《태조실록》에서 정도전, 남은 등이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 등을 불러들여 죽이기로 했다는 기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이성계의 상태는 정말 위중했다. 조준과 이방과가 소격전에서 이성계의 생명 연장을 비는 초례(醮禮)를 지냈을 정도다.

이성계가 죽으면 자연스레 왕위는 세자 이방석에게 가고, 정도전이 전권을 쥐게 될 것이었다. 그 후에 왕명을 내려 합법적으로 잡아다 국문하고 죽이거나 귀양보내면 되는데, 뭣하러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밤낮으로 송현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했다는 논의는 아마도 이성계 사후 권력 인수 및 이방원 등의 처리 방안에 대한 것이었을 터.

이방원 등을 죽이기 위한 군사 작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군사 작전을 일으키기로 했다는 사람들이 새벽까지 술자리를 갖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난 이방원 등의 '정도전, 남은 등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성계가 죽고 이방석이 왕이 되는 순간, 그들은 정도전의 손에 죽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랬기에 이방원 등이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라는 심정으로 '선빵'을 날린 것이 1차 왕자의 난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이성계는 어찌 보면 정도전의 방패막이가 아니라 이방원과 조준 등의 방패막이였다.


당연히 이성계도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정도전과 남은의 사병을 혁파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던 것이리라.

정도전의 말을 따르자니, 자기가 죽고 난 후 이방원, 조준 등이 그의 손에 몰락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이때의 이성계는 두 세력 간의 다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쇠한 국왕에 불과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방원과 조준 등 반대 세력이 모두 사라진 후, 어린 이방석이 과연 정도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미 국왕을 넘는 권력을 쥔 정도전이, 과거 자신이 했던 것처럼 허수아비 왕 이방석을 내치고 왕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이성계는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권력을 몰아준 그 사람, 정도전이 결국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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