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도전(7)

by Loxias

* 정도전의 성격


《태조실록》은 정도전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이방원)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어떤 이들은 정도전이 최후의 순간에 비굴하게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을 리 없다며 《태조실록》의 서술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튼, 정도전의 최후가 저렇지 않았을 거라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드는 것이 그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절명시이다.

『조존 성찰 두 가지에 공력을 다 기울여 / 操存省察兩加功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노라 / 不負聖賢黃卷中

삼십 년 이래에 근고를 다한 업이 / 三十年來勤苦業

송정에 한 번 취해 허사가 되다니 / 松亭一醉竟成空』 (《삼봉집》 칠언절구, '자조(自嘲)')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송정(松亭)'을 송현(松峴)의 정자, 즉 정도전이 죽은 남은의 첩의 집으로 해석하면 당시의 상황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절명시라 일컬은 듯한데, 난 이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삼봉집》도 마찬가지고,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작품을 모아 놓은 문집은 작품의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르면 정도전의 시 '자조'는 1383년 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즉, 정도전이 죽기 훨씬 전에 지은 시라는 뜻이다.

그리고 '송정'을 송현의 정자라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소나무로 지은 정자, 소나무 숲에 있는 정자가 모두 송정이다.

현재에도 '송정'이라는 지명이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있다.


'자조'가 절명시가 아니라면 마지막 구절은 뭐란 말인가?

이제부터는 내 나름대로 해석이다. 완전 추측, 근거 없는 얘기라는 뜻이다.

저 시를 지은 시점은 1383년경, 즉 정도전이 아직 복직하기 전이다.

10여 년에 걸친 야인생활에 좌절한 정도전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 1383년 가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지옥 같은 야인생활의 시작은 정도전이 원의 사신을 접대하라는 이인임의 지시에 반발하고 나서면서라고 설명했다.

『우왕 초 북원의 사신이 오자 이인임과 지윤이 그들을 맞아들이려 하자 정도전이 김구용·이숭인·권근과 함께 도당에 글을 올려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인임과 경복흥이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도전에게 원 사신을 맞이하라고 명령하자,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을 찾아가서 이르기를, “제가 마땅히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明)에 묶어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경복흥이 성내며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반신인 김의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꾸짖으니 정도전이 이해득실을 자세히 늘어놓았는데 그 말이 매우 불손하였다.

또한 태후에게도 사신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하자 경복흥이 더욱 노하여 이인임과 함께 정무를 보지 않으니, 이에 정도전을 회진현에 유배를 보냈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


왜 정도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고생을 했는지, 이 기록에서 약간 유추할 수 있다.

정도전은 화를 잘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거칠게 반응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부류는 대체로 트러블 메이커로, 처세가 별로다. 정도전이 아마 딱 그런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경복흥을 찾아가 얼마나 불손하게 굴고 난리를 피웠으면 그와 이인임, 둘이 모두 정무를 거부했겠는가?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정도전 저 녀석, 안되겠어. 나 쟤랑 같이 일 못해. 쟤를 자르던, 나를 자르던 둘 중에 선택해."


그런데 그 뒤에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이어진다.

『대성(臺省)의 시종관들이 동쪽 교외에서 전송하는데, 염흥방이 배상도를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시중에게 말씀드려 화가 조금 풀리셨으니 가지 말고 조금 천천히 기다리게나.”고 하였다.

정도전이 바야흐로 술을 마시다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정도전이가 말한 것이나 시중이 노한 것이나 각자의 견해를 지킨 일로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내린 터에 어찌 공의 말을 듣고 중지하리까?”하고 말을 타고 떠나버렸다.

재상이 그 말을 듣고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장(杖)을 때리려 하였는데, 마침 석기의 난이 일어나서 그만두었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정도전의 잘못된 처신이다. 아마 이때 경복흥과 이인임 모두 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오죽 열받았으면 정도전을 장을 치려고까지 했겠는가?

이걸 보면 정도전의 오랜 유배 및 야인생활은 어느 정도 자초한 부분도 있다.

당신이 이인임이라고 가정해 보자.

상관에게 저런 불손한 행동을 해 놓고도 사과 한 번 안 하는 자를 내가 왜 복직을 시켜준단 말인가?


이것을 정도전 본인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염흥방이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말렸을 때, 못 이기는 척 참고 넘어갔으면 10여 년의 야인생활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사람들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술김에 화를 제어 못하고 들이받은 것이 그런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송정에 한 번 취해 허사가 되다니 / 松亭一醉竟成空'는 이것을 일컬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시의 제목도 '자조'라고 지었던 것이리라.


이때 고생이 얼마나 싫었던지, 정도전은 잠시 그답지 않게 굽히는 모습을 보였다.

1384년 복직 이듬해인 1385년, 정도전은 남양부사로 나갔다.

기록에는 정도전이 자청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이인임 일파의 공격을 받아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가 바로 그가 남양부사로 나간 이후 당시 국왕인 우왕에게 보낸 전(箋) 때문이다.

『신 도전은 은혜를 입어 남양부사를 제수받아, 금월 17일에 이미 도임을 마쳤습니다. 신이 공경히 윤음(綸音)을 받잡고 해향에 나아가 지키게 되니 부끄럽고 감격됨이 서로 얽혀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그 알아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말을 숨김없이 하다가 재상의 뜻에 거슬려서 남쪽 변방으로 쫓겨가서 더위와 장기(瘴氣)에 시달려 죽을 뻔한 생활을 거의 3년을 하고서... 또 4년을 지나서 서울 밖에서 편리한 대로 살기를 허락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신에게 재생(再生)의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신은 우둔하지만 더욱 힘써 상의 덕의(德意)를 펴서, 기아와 질병으로 헤매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그 큰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어찌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삼봉집》 남양부사로 도임하여 상께 감사하는 전)


정말 자진해서 외직으로 나갔던 것이라면 이런 편지를 국왕에게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전체적으로 '파직을 면하고 남양부사로 남게 해 줘 정말 고맙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정도전은 이걸 반드시 우왕에게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밀직사에게 보내는 계(啓)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도전은 이에 감사하는 전을 삼가 써서 계에 붙여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합하께서는 전하를 한가한 시간에 모시게 되오면 조용히 말씀을 드려 주소서. 그리하오면 매우 다행하겠기에 삼가 계를 올립니다.』 (《삼봉집》 남양부사로 도임하여 밀직사에게 올리는 계)

다시 야인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정도전의 눈물겨운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난 원래 이런 거 못해.'라고 할 때, 그들이 정말로 다급하지 않기에 그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라. 천하의 정도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결국 '눈물의 똥꼬쇼'를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정도전이 우왕에게 보낸 글에서 매우 놀라운 부분이 있다.

『그 후 선왕께서 세상을 버리셨을 적에는 신이 그때 예의랑(禮儀郞)으로서 예무를 관장하였고, 조정의 명령을 받아 백관(百官)을 규합하여 대업(大業)을 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업'이란 바로 우왕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민왕 사후 우왕을 세울 것을 주장한 이는 이인임이다. 즉, 정도전은 이인임의 뜻에 따라 백관을 규합하여 우왕을 세우는 데 앞장 섰다는 얘기다.

물론 그의 서술에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저렇게까지 말한 것을 보면 우왕을 세우는 데 동조했거나, 최소 반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정도전이 훗날 우왕을 신돈의 자식, 신우, 가짜 왕이라 부르며 죽이라고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 정치의 비정함이 씁쓸할 따름이다. 정치판은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곳이 못 된다.


위화도 회군이 1388년 6월의 일이고, 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8월에 일어났으니 둘 사이의 기간 역시 10년이다.

이 10년 동안 정도전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이성계의 지원을 받아 사실상의 2인자로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정도전은 원래 성격을 드러냈다.

화를 참지 못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용서치 않았으며, 오만했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했던지, 같은 편인 남은 조차 이렇게 말했다.

『남은은 도망하여 성의 수문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에 숨으니, 최운·하경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태조실록》 1368년 8월 26일)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남은의 집에서 도망쳤다가 결국 사로잡혀 이방원 앞에 무방비 상태로 끌려 나왔을 때,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했고, 우왕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빌었던 그때의 모습을 말이다.


* 맺음말


사람들이 정도전 하면 떠올리는 조선을 세운 혁명가, 나라의 500년 기틀을 세운 설계자의 이미지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격변의 시기였던 여말선초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였고, 이와 관련된 많은 드라마,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에서는 대부분 정도전을 명이 다한 고려를 끝장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다 이방원의 욕심에 의해 제거된 비운의 혁명가로 그렸다.

현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전의 이미지는 이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 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개인 저작에서도 정도전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정도전에 대해 평가한 몇 개의 글을 소개한다.


『그 후에 태조가 근신을 보내어 침전으로 불러서 여러 신하와 장수들의 어짊과 불초함에 대해 물었다.

공(이지란)이 인하여 말하기를, “정도전은 간사하여 반드시 종말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도전이 주벌되니 비로소 공에게 선견지명이 있음을 알았다.』 (《강한집》 이지란 신도비)


『태조가 등극하자 정도전이 권력을 쥔 신하가 되어 자기의 사인(私人) 황거정을 도은(이숭인)이 귀양가 있는 고을의 원으로 보내서 도은을 매질하여 죽이게 했으니, 소인(小人)의 마음씀이 심하기도 하도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정도전은 이방석의 난리에 관여해서 자기의 몸은 두 동강이 났고,... 정도전이 받은 화는 이숭인보다 더 심했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까지 빛나니 천도(天道)가 어긋남이 없다.』 (《상촌잡록》 * 신흠 作)


『정도전은 능히 말만 잘하고 능히 행하지는 못하여, 마침내는 기지가 꺼지고 당우가 꺾였으며, 몸도 또한 능히 보존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정도전은 비록 사람으로 보아서는 죽일 만하지만,...』 (《성호사설》 도평의사기 * 이익 作)

『비록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합해져서 온당한 형편으로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고려에 있어서 정도전은 충신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제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으니, 때문에 끝내는 몸이 살륙당함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부귀만을 생각하여 그의 지혜가 어두워져버렸으므로 자신의 공로만을 자부하여, 바로 또 임금에게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우자는 계획을 권하여 자신의 세력을 굳히려고까지 했었다.

그거야 자신을 편안하게 하려던 것이었지만 자신을 위태롭게 해버린 것이었다.』 (《성소부부고》 정도전과 권근에 대한 논(論) * 허균 作)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박했던 이유는 이성계를 비난할 수 없기에 그를 대신 타깃으로 삼은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주원장이나 후대 청나라 황제들을 가리켜 문자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일으켜 사람들을 죽였다고 비난하지만, 조선이라고 다를 것 없다.

김종직이 '조의제문' 한 번 잘못 썼다가 연산군 시절 그 난리가 난 것만 봐도, 이성계에 대한 비난은 곧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이성계에게 굽히지 않은 정몽주와 이색과 달리, 권근조차 조선 건국 이후 조정에 출사, 결국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 하여 대차게 까는 판에, 이성계는 건드리지 않는 것은 매우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난 이해한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마지막으로 짚어볼 부분은 정도전의 죽음에 대한 이성계의 반응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정도전의 죽음을 알게 된 이성계가 충격에 빠지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실제로는 《삼봉집》 말고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상왕(이성계)이 함흥에 가 있다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탄식하기를, ‘나의 원훈(元勳)을 죽였구나.’ 하였다.』 (《삼봉집》 부록, 사실)


그러나, 이성계가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서 정도전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그날, 정도전이 죽은 것을 알았다.

『조금 후에 도당(都堂)에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도당을 결합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 제거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정도전이 죽고 난 후, 이방석과 이방번이 차례로 끌려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다.

『도당에서 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주안(奏案)을 윤가(允可)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도당에서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번에게 일렀다.

"세자는 끝났지마는 너는 먼 지방에 안치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이성계가 정도전을 애도했다고 해도, 이방원이 실록에 그것을 기록하게 내버려뒀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이성계 입장에서 봤을 때, 결국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은 정도전인 셈이다.

정도전이 그를 대신해 명에 다녀온 권근을 탄핵했을 때,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었다.

『도전이 힘써 국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가 진노하였을 때를 당하여, 자청하여 가서 능히 천위(天威)를 풀리게 하여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데 도리어 죄주기를 청하는가?"』 (《태조실록》 1397년 4월 20일)

웬만해서는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의 청을 들어주던 이성계도 이번만큼은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성계의 속마음은 이렇지 않았을까?

'아이고, 이 양반아. 내 이럴 줄 알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도전(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