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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가요!

by Loxias

한때 인터넷 각종 커뮤니티에서 대유행했던 짤이 있다.

MBC ‘세바퀴’ 출연진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흥국이 뜬금없이 조세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흥국) "안재욱 결혼식 때 왜 안 왔어?"

(조세호) (억울한 표정으로)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이것이 이른바 조세호 '프로불참러' 짤이다.


물론 조세호는 이것이 이슈가 되어 인기도 얻고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모르는 사람 결혼식을 왜 간단 말인가?

둘의 관계는 묻지도 않고 난데없이 왜 안 왔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상당히 억울했을 것이다.

다짜고짜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이유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는 이만 차치하고, 조선에도 유명한 '프로불참러'가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의 장수, 신립(申砬, 1546~1592)이다.

임진왜란 비호감 인물 설문조사를 실시한다면, 압도적인 1, 2위를 차지할 게 확실한 선조와 원균에 가려서 그렇지, 신립 역시 만만치 않은 비호감 인물일 것이다. 아마 그가 3등이지 않을까?

그는 조령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포기하고 충주에 배수진을 쳤다가 일본군에 몰살당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낙인찍혔다.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계략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징비록》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사람들이 신립을 둘러싸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사람들) (질책하듯이) "일본군 쳐들어왔을 때, 왜 조령에 안 갔어?"

(신립) (억울한 표정으로)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가요!"


이 대목에서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신립이 조령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충주에서의 야전을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은 모두 새재[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안 간 게 아니다. 못 갔다.


* 신립이 충주에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당일 부산진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수도 한양을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부랴부랴 군대를 동원, 일본군에 대항코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가 적변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당시 조선의 군대 동원 체제는 제승방략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지방군을 동원함과 동시에 중앙에서 지휘관이 파견되는 형태였다.

그래서 경상 감사 김수는 문경 이하 모든 수령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순변사를 기다렸다.

한편, 한양에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 소식이 전해진 것은 4월 17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변보를 듣고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는 한편, 기타 지휘관을 임명하여 일본군을 막게 했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에 내려보내고,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에 내려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 변응성을 기복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그러나 첫 번째 비극이 발생했다.

순변사 이일이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들이닥치는 바람에 대구에 모여 있던 군대가 와해된 것이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저절로 무너졌다는 것을 보면 지휘관이 없으니 제대로 된 교전조차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린 듯하다.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에 도착한 것은 이 이후였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조령을 넘어 문경에 도착한 시점에 이일이 거느리고 있던 병력은 4천 명이었던 것 같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근처 백성들을 모집하여 병력을 6천 명까지 늘렸다.

『판관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이일 휘하의 병력은 6천 명이라고는 하나, 일반 백성들을 급하게 끌어모으다 보니 수준이 형편없었다.

상주 북쪽 냇가에서 군사들을 습진(習陣, 진법 훈련) 시켜야 했으니 말이다.

그때 두 번째 비극이 벌어졌다.

접근해 온 일본군과 교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6천 병력이 궤멸되었다. 이것이 상주 전투, 4월 25일의 일이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호·윤섬,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그럼 그때 신립을 무얼 하고 있었나?

신립은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임명되어 8천의 군대를 이끌고 이일을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위험한 임무를 자청했다.

『(류)성룡이 신립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류성룡)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청대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로 삼았다.

성룡이 즉시 모집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 신립과 이일의 만남


신립이 군대를 이끌고 충주에 도달한 것은 4월 26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한 다음 날이었다.

그는 단월역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조령으로 정찰을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령을 넘어 도망쳐 온 이일을 만났다.

실록 이외의 몇몇 기록에서도 신립이 이일을 만났다는 것이 교차 검증되므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신립과 이일이 만난 장소와 대화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립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립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자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4월 26일 충주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상촌집》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


『신립이 달려 충주를 지나서는 조령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에 주둔하다.』 (《난중잡록》 임진년 상)


보다시피 신립이 이일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세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신립과 이일이 어디에서 만났느냐?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신립이 몇 사람을 이끌고 조령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만났다고 되어 있다.

《상촌집》에서는 단월역에 진을 쳤을 때 만났다고 되어 있고, 《난중잡록》에서는 신립이 조령을 정찰하고 충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만났다고 한다.


이 세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난 신립이 김여물 등 휘하 장수 몇 사람과 함께 조령으로 향하던 중에 이일을 만났을 것으로 본다. 즉, 조령까지는 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립이 조령의 상황을 직접 보지 못한 상황에서 마침 이일을 만났으니 당연히 정찰을 멈추고 이것저것 물었을 것이다.

조령까지 더 나아갔다가 혹시라도 일본군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낭패니 말이다.

실록 등에는 신립이 적의 형세에 대해 물어본 기록밖에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신이 신립이라면 적의 형세 말고 뭘 물어봤겠는가? 나라면 이일에게 이것부터 물어봤을 것이다.

"조령을 지키고 있는 우리 군사가 있냐? 지금 일본군 어디쯤 있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그 뒤에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립이 조령에 가지 못한 사정


먼저 당시 조령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이 있었는지, 병력은 얼마였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난 그 당시 조령을 지키는 병력이 없었다고 본다.

앞선 두 번의 비극으로 인해 조령 밑의 고을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1차로 경상 감사 김수가 대구에 집결시켰던 병력이 와해되었고, 2차로 이일이 영끌해서 마련했던 비정규 병력마저 탈탈 털려버렸다.

그리고 조령의 상황 역시 다른 경상도 고을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 이일을 순변사로 파견하면서 조령을 방어하는 조방장으로 변기를 임명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실록 등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종사관 이경류가 상주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역시 상주 전투에 참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말은 곧 상주 전투에서 변기 휘하 병력 또한 몰살되었을 것이란 얘기다.

『상이 경함에게 하문하기를, "이경류가 그대의 동생인가?"하니, 경함이 자신의 아우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하여 내가 매우 애도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구나. 누구의 종사였으며 어디서 죽었는가?" 하니,

경함이 아뢰기를, "변기의 종사관이었고, 영남에서 전사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일)


그리고 조령이 텅 비어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일이다.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한 후 조령을 넘어 충주로 도망쳐 왔다.

만약 변기의 수비 병력이 조령을 지키고 있었다면 순변사로서 거기에 합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병력이 없이 텅 비었으니 그냥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왔던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에 더해 《난중잡록》에 기록된 이일의 말에 결정적 힌트가 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추측건대, 신립과 이일이 만난 당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은 없었을 것이다.

'나무위키' 등에서는 신립이 조령에 있던 변기의 병력을 충주로 철수시켰다고 서술하는데, 그런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지금 당장 조령을 지키는 병력이 없는데 거기에서 적을 맞아 싸우려면 방법은 단 하나, 신립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조령에 가야 한다.

4월 26일 그 당시, 신립의 군대는 충주 단월역에 있었다. 이건 세 기록에서 모두 일치한다.

군인들은 장기판의 말이 아니다. 그냥 '너 저기로 가'라고 명령했다고 휙~ 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게 아니다.

네이버 지도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한 충주 단월동에서 문경새재까지의 거리는 약 38 킬로미터.

그 얘기는, 신립이 조령을 수비하려면 군대를 이끌고 38 킬로미터를 행군해서 가야 한다는 뜻이다.

기병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보병이 섞여 있었으니 하루 만에 도달할 거리는 아니다.


김여물을 비롯한 휘하 제장들은 그래도 조령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우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기록된 김여물의 말과 《상촌집》에 기록된 말이 대동소이한 것을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립은 망설였을 것이라고 본다. 조선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한 게 25일이고, 네이버 지도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한 상주 시청에서 문경새재까지의 거리는 약 44 킬로미터.

거리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반면,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하루 먼저 출발할 수 있었다.

신립은 일본군이 조선군보다 조령에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문경에서 조령을 넘는 길이 험한 만큼, 당연히 반대쪽 충주에서 조령으로 가는 길 역시 매우 험한 산길이다.

내 생각에, 신립은 조령을 향해 진격했다가 산중에서 일본군과 조우,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을 걱정했던 것 같다.

산에서 교전이 벌어진다면 일본군이 유리했을 것이다. 기병은 산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구나 일본군이 먼저 조령에 당도하여 요새나 고지와 같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라도 하는 날엔 몰살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바에야 평지에서 싸우는 게 나을 수 있다.

신립의 바보 같아 보이는 주장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게 내가 신립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변명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4월 27일,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신립의 상황 판단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고 조선군은 궤멸, 신립은 전사했다.

『이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는데,...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김)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 맺음말


생각해 보면, 당시 그 누구보다 전장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이일은 신립에게 조령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조령을 지킬 수 없다고 신립에게 말했고, 신립 역시 이에 동의하고 조령에 가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조령에 가지 않은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일반적인 분위기상, 신립이 탄금대에서 박살나는 순간 그의 모든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사람들이 대부분 조세호가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라고 대답하는 부분까지만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김흥국이 뒤에 한 마디 더하고, 서장훈이 거들었다.

(김흥국) "왜 몰라! 같은 연예인 동료인데!"

(서장훈) "무조건 갔어야지! 잘못했네."


이것까지 종합해서 다시 써보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 "일본군 쳐들어왔을 때, 왜 조령에 안 갔어?"

(신립)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가요!"

(사람들) "왜 못 가! 걔네보다 먼저 가면 되지!"

(사람들) "무조건 갔어야지! 잘못했네."


뒤이어 신립이 이렇게 대답했을 수도 있다. "하아...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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