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다스 베이더'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의 메인 빌런은 그 유명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다.
압도적인 강함, 그리고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으로 제국에 반항하는 세력들을 토벌, 제다이 기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철천지원수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Anakin Skywalker)'라는 이름의 제다이 기사였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살해되었고,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지 못했으며, 스승의 칼에 사지(四肢)를 잘렸다.
그에게 주어진 시련과 아픔이 분노와 원망으로 뒤섞이며, 결국 아나킨은 다스 베이더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조선 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
조선판 '다스 베이더,' 바로 중종의 왕비이자 명종의 모후, 그리고 사림의 철천지원수로 기록된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다.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그날 《명종실록》에는 어김없이 그녀에 대한 평가가 실렸다.
조금 길지만, 그 내용을 충분히 인용해 본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를 알았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윤원형의 무리가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과 틈이 벌어져, 윤씨와 세자의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소윤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三朝, 하루 세 번 문안드림)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 인종)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 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주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당시 제공들이 그의 강한함이 반드시 나라를 해칠 것을 근심하여 임조(臨朝)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대개 그 시세가 부득이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곧 화를 부를 뿐이었다. 얼마 못 가서 문득 큰 옥사를 일으켜 전에 인종을 부호한 사람을 모두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슬프다! 윤임 같은 사람은 소윤에게 미움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무지한 무부(武夫)로서 혹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지만 반역한 형적이 또한 나타나지 않았고, 유관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디 청직하여 왕실에 마음을 다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또한 무슨 죄인가? 대개 윤왕후가 전에 감정이 쌓이었고 뒤에 화를 얽어 만들었는데, 이기의 무리가 또 따라서 이를 도와 이룩하였다. 그래서 그 화가 길게 뻗치어 10여 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사림을 짓밟고 으깨어 거의 다 쳐죽이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말하자니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의 아우 윤원형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또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명종실록》 1565년 4월 6일)
먼저 호칭부터 짚고 넘어가자.
문정왕후는 명종의 모후이므로 ‘대비’라 해야 옳다. 그런데 실록에는 단지 ‘윤씨’라고만 적었다.
이 대목에서 이미 사림이 그녀에게 품었던 적대감이 드러난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악평의 극치다.
특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 두 문장에 이르면, 독자는 저절로 ‘뜨악’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로 실록에서 직격탄을 맞았다는 건, 사림이 문정왕후를 정말 싫어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문정왕후는 원래 윤임과 사림 세력의 편이었다.
즉, 그녀 역시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윤임에 의해 ‘제다이 기사’로 선택된 존재였다.
현대에도 정치가나 재벌들은 사람들 알게 모르게 혼인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공고히 한다.
조선시대는 그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이 이야기는 한명회(1415-1487)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에서 출발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대체로 한명회를 ‘빌빌대다가 권람의 천거로 운 좋게 세조의 눈에 들어 공신이 된 인물’로 묘사한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글을 읽어 자못 얻은 바가 있었으나, 여러 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에 권남과 더불어 망형우를 맺고, 아름다운 산이나 수려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함께 가서 구경하고, 간혹 해를 마치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권남이 한명회가 한 말로써 아뢰니, 세조가 한명회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한 번 만나보고 의기가 상통하여 마치 옛날에 사귄 친구와 같았다.』 (《성종실록》 1487년 11월 14일, 한명회 졸기)
그런데 이 설명에서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관계는 쏙 빠져있다.
정희왕후는 파평 윤씨(坡平 尹氏)로, 조선 초 문신 윤번(1384-1448)의 일곱째 딸이었다.
윤번의 여섯째 딸, 즉 정희왕후의 바로 윗언니는 한계미와 혼인했는데, 한계미의 조부 한상경과 한명회의 조부 한상질은 형제였다.
그리고 윤번의 사촌형제 중에 윤곤(?-1422)이 있는데, 그의 후처가 바로 한상질의 딸이었다.
이 시기는 개인의 능력보다 배경이 더 큰 힘을 발휘하던 시대였다.
물론, 한명회가 무능했다는 말은 아니다. 실록의 평가만 봐도 그는 능력자가 맞다.
『한명회는 성품이 관홍(寬弘) 하고 도량이 심침(深沈)하여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항상 주장하는 이론은 화평에 힘쓰고, 일을 결단함에 있어서는 강령(綱領)을 들어서 행하였으므로,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명회는 나의 자방(子房)이다.’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1487년 11월 14일, 한명회 졸기)
하지만 한명회에게 저런 배경이 없었다면 권람이 그를 세조에게 천거했을 리도, 세조가 곧바로 ‘내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리도 없다.
세조가 한명회를 불러 만났다는 건 이미 신원 검증과 호구 조사가 끝난 뒤, '이 정도면 믿을만하군'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일종의 최종 확인 절차였다고 봐야 한다.
나는 더 나아가, 한명회가 권람의 천거를 받기 전부터 이미 정희왕후를 매개로 세조와 연줄이 닿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맥락을 알아야, 계유정난 이후 한명회의 딸들이 잇따라 왕비가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국혼(國婚)'이 설명이 된다.
한명회의 딸들 중 무려 두 명이 중전이 되었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다.
『아들은 한보이고, 딸은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이다.』 (《성종실록》 1487년 11월 14일, 한명회 졸기)
장순왕후는 8대 국왕 예종의 왕비, 공혜왕후는 9대 국왕 성종의 왕비다.
예종과 성종은 숙질(叔姪)관계이니, 한명회의 이런 행보는 사실 말이 안되는 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부조리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1460년, 한명회의 셋째 딸이 세자(훗날 예종)와 혼인했다.
『병조판서 한명회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정하였다.』 (《세조실록》 1460년 3월 28일)
그런데 이듬해인 1461년, 세자빈이 아들을 낳고 곧 세상을 떠났다.
곧, 장순왕후는 실제로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
그러자 한명회는 이번에는 넷째 딸을 죽은 의경세자(세조의 장남이자 예종의 형)의 차남 자을산군과 혼인시켰다.
『자을산군이 영의정 한명회의 딸을 영응대군 이염의 집에서 친영(親迎)하니, 내종친과 상정소 당상에게 명하여 위요(圍繞)로 가게 하였다.』 (《세조실록》 1467년 1월 12일)
그리고 예종이 죽자, 한명회는 이 자을산군을 차기 국왕으로 밀어올렸다. 이건 단순한 공신의 행보가 아니다.
나는 이 과정이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정치적 야합의 결과라고 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예종이나 성종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1474년, 성종 즉위 5년째 되던 해.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사시(巳時)에 왕비가 구현전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성종실록》 1474년 4월 15일)
공혜왕후가 원체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후궁을 미리 뽑아놓는 등 왕비의 사망에 대비한 흔적이 보인다.
『고(故)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을 숙의로 맞아들였다.』 (《성종실록》 1473년 3월 19일)
『병조참지 윤호의 딸을 들게 하여 숙의로 삼았다.』 (《성종실록》 1473년 6월 14일)
이 중 윤호의 딸이 훗날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가 되는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다.
그런데 여기서도 흥미로운 인물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정희왕후의 부친 윤번의 사촌형제 윤곤이 한명회의 조부 한상질의 딸과 혼인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윤호는 바로 그 윤곤과 한씨의 손자였다.
즉, 정현왕후는 정희왕후·한명회의 인척 라인에 속한 인물이었다.
뻔히 보이지 않는가? 공혜왕후가 죽자, 정희왕후와 한명회는 당연히 정현왕후를 새 왕비로 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뜻밖의 선택을 했다.
윤기견의 딸, 즉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를 중전으로 앉힌 것이다.
『의지(懿旨, 정희왕후의 명)로 일찍이 의정을 지낸 사람과 의정부·육조 참판 이상과 대간을 불러 전교하기를,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이며 나의 의사도 또한 그가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 만하다. 윤씨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서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四殿)에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하므로
정인지 등이 대답하기를, "중망(衆望)에 매우 합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매우 기쁘다. 경 등의 의사도 알 만하니 한 잔 마시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476년 7월 11일)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 그리고 폐비 윤씨를 둘러싼 갈등 또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어왔다.
대부분은 인수대비가 윤씨를 싫어해 내쫓은 것으로 그려지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윤씨를 내쫓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오히려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윤씨를 중전에 앉히며 발표했던 전교와 달리, 처음부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정승들에게 전교하기를, "중궁을 책봉한 뒤에 대비전에 상수(上壽)하려고 하는데 허락하지 않으시니, 경들도 청하라." 하였다.
한명회·윤자운이 아뢰기를, "중궁을 책봉하는 것은 국가의 커다란 경사입니다. 청컨대 상수를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대왕 대비가 끝내 허락하여 주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1476년 7월 28일)
『승지 등이 대왕대비전에 아뢰기를, "왕비가 친잠(親蠶)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행하지 못한 바인데, 지금 이를 거행하니, 이것은 큰 경사입니다. 중궁께서 어찌 진연하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청컨대 윤허하소서." 하였으나,
대왕 대비가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3월 4일)
결국 1477년, 윤씨 폐출 논의가 시작되었다. 주도자는 다름 아닌 정희왕후였다.
『문중선이 언문(諺文) 한 장을 꺼내어 의지(懿旨)를 선시하기를, "세상에 오래 살게 되면 보지 않을 일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주상이 중궁에서 보니 종이로써 쥐구멍을 막아 놓았는데, 쥐가 나가자 종이가 보였고, 또 중궁의 침소에서 작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려고 하자 중궁이 숨겼는데, 열어 보았더니 작은 주머니에 비상(砒霜)이 들어 있고, 또 굿하는 방법의 서책(書冊)이 있었다. 이에 쥐구멍에 있는 종이를 가져다가 맞춰 본즉 부절(符節)과 같이 맞았는데, 이것은 책이 잘린 나머지 부분이었다. 놀라서 물으니, 중궁이 대답하기를, ‘친잠(親蠶)할 때 종[婢] 삼월(三月)이가 바친 것이라.’고 하고, 또 삼월이에게 물으니 삼월이 모두 실토하여 모두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당초에 사람을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중궁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또한 원자가 있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할까?"』 (《성종실록》 1477년 3월 29일)
1479년, 윤씨는 결국 폐출되어 사제(私第)로 쫓겨났다.
『정승과 승지들이 그래도 계속하여 다시 생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성을 내어 일어서면서 이르기를, "경들이 물러나지 아니하면 내가 마땅히 안으로 들어가겠다." 하고, 또 내관에게 명하여 승지를 불러 나가도록 재삼 말하니, 이에 모두 다 나갔으나, 홍귀달·김승경·이경동·김계창만이 머물러 나가지 아니하고, 다시 요청하다가 오래 되어서 나갔다.
얼마 있다가 중궁이 소교(小轎)를 타고 나가서 사제로 돌아갔다.』 (《성종실록》 1479년 6월 2일)
이때 윤씨 폐출에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을 찍어 누른 것 역시 정희왕후의 언문 전교였다.
『정승·대간·육조의 당상관들이 물러나서 빈청에 있었는데, 대비가 내관 안중경으로 하여금 의지 및 윤씨가 만든 바 글을 가지고 와서 보이게 하였는데, 모두 다 언문이었다.
정승·대간 등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양진(禳鎭)하는 방술을 윤씨가 어찌 능히 알았겠습니까? 반드시 지도한 자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추국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만약 이를 추국하려고 하면, 그 말이 만연하여 장(杖) 아래에서 그릇되게 죽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 하였다.
채수가 아뢰기를, "청컨대 한자(漢字)로 번역해서 사책(史策)에 쓰게 하소서." 하니, 채수 및 이창신·정성근에게 명하여, 그 글을 번역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1479년 6월 5일)
윤씨가 폐출된 후 자연스레 정현왕후가 중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명하여 부원군과 의정부·육조·대간 등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내가 배필을 택하기를 삼가지 못해서 궁위(宮闈)가 실덕하였으니, 후회함이 이를 데가 없다. 숙의 윤씨가 매우 숙덕(淑德)이 있으니, 곤위(坤位)를 바룰 만하다. 경들은 그리 알라."』 (《성종실록》 1480년 10월 4일)
1482년, 성종은 끝내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기에 이른다.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과 대간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성종실록》 1482년 8월 16일)
실록에 나타나는 성종의 행보는 매우 혼란스럽다.
정희왕후·한명회의 의중을 거슬러 윤씨를 중전으로 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폐하고는 다시 그들의 라인인 정현왕후를 중전에 앉혔다.
나는 이걸 성종의 왕권이 정희왕후·한명회 라인으로 대표되는 신권에 굴복한 것으로 해석한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즉위 3개월 만에 부왕(父王)의 묘지문을 보고 친모가 폐비 윤씨였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른바 판봉상시사 윤기견란 이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 윤호를 기견이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하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3월 16일)
연산군이 직접 폐비 윤씨의 기일까지 챙겼던 걸 보면, 그는 이미 친모의 죽음의 전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교하기를, "명일은 폐비 윤씨의 기일(忌日)이니, 사옹원으로 하여금 소찬을 들이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5년 8월 14일)
『어서(御書)로 승정원에 교시하기를, "폐후(廢后)가 덕이 부족하여 부왕의 버림을 받았으니, 나는 골육의 정을 잊지 못하여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여러 신하들이야 어찌 소식을 하려 하느냐."』 (《연산군일기》 1495년 8월 15일)
외조모 신씨가 연산군에게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건넸다는 야사의 기록이나, 그가 성종의 후궁을 때려죽이고 인수대비에게 난동을 부렸다는 실록의 기술은 모두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연산군이 혈연·지연·학연으로 얽혀 서로 끌어주고 땡겨주며 왕을 제어하려 드는 세력들, 그리고 그들의 압박 속에서 조강지처가 버림받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현실에 깊은 분노와 염증을 느꼈다고 본다.
그 분노의 폭발이 곧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같은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고려사》에는 평소 공민왕이 했다던 생각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공민)왕이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도 재상들이 뜻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일찍이 생각하기를, “세신대족이 가까운 무리끼리 뿌리깊이 얽혀 있어 서로 덮어주고, 초야의 신진은 교만하게 행실을 꾸며서 명예를 낚으려다가 현달하게 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들과 혼인하여 연결하려고 하니, 그 처음의 뜻을 다 버리게 된다. 유생은 강직하지 못하고 유약하며 또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칭하면서 서로 당파가 되어 사정에 끌리니, 세 부류 모두 등용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돈 열전)
나는 연산군의 생각이 공민왕과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즉, 그에게는 유생이든, 신진 사림이든, 고위 대신이든, 그냥 똑같은 척결 대상이었을 것이다.
1498년(연산군 4년),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문제 삼자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신진 사림을 숙청했다.
6년 뒤인 1504년, 그는 이번엔 고위 대신들을 대상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때 그가 이용한 것이 바로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이었다.
즉위 초에 이미 알고 있던 일을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들고나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입장에선 '억울하게 죽은 모친의 복수,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한 단죄'라는 일종의 '효자 프레임'까지 덧씌울 수 있었다.
폐비 윤씨를 내쫓고 죽이는데 동의했다는 원죄가 있었던 대신들에겐 그야말로 '가불기'였던 셈이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서주자사 도겸의 손에 살해당한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고도 의외로 까이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갑자사화의 대표적 피해자, 이세좌의 사례를 보자.
그는 1482년 당시 좌승지로, 폐비 윤씨의 사형을 직접 집행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497년(연산군 3년)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관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1503년 연회 자리에서 연산군에게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가 유배를 갔고, 1504년 어명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이외에도 갑자사화 초창기, 연산군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죽은 지 20년이 된 한명회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하기까지 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의금부 낭청이 청주에 가서 한명회의 관을 가르고 머리를 베어 왔다." 하니,
전교하기를, "죄명을 써서 저자에 효수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1504년 5월 11일)
나는 이렇게 본다.
만약 연산군이 적절한 시점에서 숙청을 멈췄다면, 겁에 질린 조정 신료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게 그의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