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친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하는 교서를 내리며,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밝혔다.
갑자사화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교서를 내리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회묘께서 처음에 덕으로 뽑혀 초위(椒闈)에 자리를 정하셨다가, 나중에는 참소를 만나고 소인들에게 시달리게 되고, 정유년에는 폐위되려다가 중지되어 도로 금슬의 화목이 있고 아들을 보는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만일 참으로 덕을 잃었다면 어찌 이 일이 있었겠는가? 그뒤 꾸미고 얽어맴이 날로 심하여져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폐위되어 사삿집에 계시다가 그만 큰 변을 만나셨다.
당초 내간에서는 안에서 저지하고, 대신과 대간이 밖에서 다투었다면, 선왕의 성명하시고 또 이 몸이 있으니, 반드시 상의 마음을 돌리는 힘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북[杼]을 던지는 의심이 있었겠는가?
내가 어린 나이로 듣고 봄이 없으면서 외람되이 큰 전통[大統]을 계승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 연유를 캐물어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니,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그 슬픔이 어찌 끝이 있으랴?"
이래서 널리 여러 의논을 모아 제헌왕후로 추존하고, 묘도 높여 능으로 한다. 그 큰일을 얽어만든 자가 아직도 선왕 후궁의 반열에 있으므로 곧 죄주고, 산 자나 죽은 자를 서인(庶人)으로 하니, 거의 간사함을 다스리는 법을 바로잡고 하늘에 계신 원한을 씻어, 나의 애통하고 그립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을 펴게 되었노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1504년 3월 25일)
이어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과정에 관여했던 대신들을 본격적으로 처벌했다.
『전교하기를, "폐비 때에 이파가 옛일을 인용하여 찬성했으니 그 죄가 난신과 다름이 없다. 널을 쪼개 시체를 베고 가산을 적몰하며, 자손을 금고(禁錮)하여야겠다... 윤필상이 전에는 그렇게 의논하고, 지금 추숭할 때에는 의논을 이렇게 하여 반복하며 뜻을 순종하니, 그 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정창손 등은 힘써 간하지 아니하여, 북을 던지는 의심을 이루게 하였다. 그 몸은 이미 죽어 장사지냈지만 서인의 준례에 의하여 그 아들들을 나누어 정배하는 것이 가하다."』 (《연산군일기》 1504년 4월 18일)
이때 많은 조정 신료들이 연산군의 복수에 동조했다.
그들은 아마 “왕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나면 분노가 누그러질테고, 우린 괜찮겠지.”라 생각했을 것이다.
『유순·허침·강귀손·신준·이계동·박숭질·이집·정미수·안처량·신용개·장순손·한형윤·허집·윤구·유빈·노공유·이복선·남궁찬·성희안·이과·정광필·손주·이중현·윤은보·심정·정붕이 의논드리기를,
"이파는 널을 쪼개 시체를 베며 가산을 적몰하고 자손을 금고하고, 윤필상은 고신을 다 빼앗고 가산을 적몰하며 아들과 함께 외방에 부처하며, 정창손·한명회·심회·정인지·김승경은 고신을 추탈하고, 장사를 서인의 준례에 의하여 묘의 석물을 제거하며, 그 아들도 고신을 빼앗고 나누어 정배하는 것이 사세에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 1504년 4월 18일)
그러나 연산군의 복수는 조정이 상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윤필상은 사사되었고, 죽은 자는 무덤에서 끌려 나와 목이 잘렸다.
그리고 이 광풍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사실상 명태조 주원장을 방불케 했다. 눈 밖에 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제거되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승정원에 어서를 내리기를, "한충인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족속이니, 특히 장 1백에 처하여 제주에 종으로 삼으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 7일)
한충인은 인수대비의 부친 한확의 동생 한전의 아들로, 인수대비와 사촌지간이었다. 더구나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자 측근인 신수근의 장인이었다.
무오사화에서 살아남았던 연산군의 또 다른 측근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 역시 이때 목숨을 잃었다.
『승지 권균과 윤순을 명하여, 임희재의 능지처사와 이수공의 참형을 가서 감독하게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임희재의 처를 전일에 이혼시키도록 명한 것은 법에 부당하니, 즉시 관청에 천역으로 정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라." 하였다.
희재는 임사홍의 아들이요, 영응대군 이염의 외손자 사위이다.』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 28일)
임희재는 구수영의 첫째딸과 혼인했는데, 구수영의 넷째 아들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혼인했다.
이 정도면 봐줄 만도 한데, 연산군은 임희재를 죽여버렸다.
내가 말한 ‘연산군이 멈출 줄 몰랐다’는 건 바로 그의 이런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임희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의 지배층은 혼맥으로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숙청을 한다 해도 정교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너 마음에 안 들어. 죽어!” 하는 식으로 무차별 숙청을 단행했다.
처음엔 두려움에 떨던 신료들도 결국 분노와 반발심으로 돌아섰다.
실록은 중종반정 즈음의 조정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육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 1506년 9월 2일)
이게 바로 중종반정이 일어난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다.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숙청이 몇 년째 지속되자 연산군의 '친위 세력'마저 그를 버렸던 것이다.
박원종 등은 이 틈을 파고 들었고, 실제로 반정 공신 명단에는 유자광, 구수영, 민효증 등 연산군이 중용했던 대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제 시선을 중종 반정의 리더, 박원종(1467-1510)에게 눈을 돌려보자.
그 역시 조선 왕실의 심장부에 깊숙이 뿌리내린 명문가 출신이었다.
『박중선의 자는 자숙이고 순천 사람이다. 부지돈녕부사 박거소의 아들이며, 그 어미 심씨는 곧 소헌왕후의 아우이다... 한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박원종이고, 딸은 월산대군 이정에게 출가했다.』 (《성종실록》 1481년 8월 27일, 박중선 졸기)
실록에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에게 시집간 맏딸만 기록되어 있지만, 박중선에게는 딸이 더 있었다.
그와 혼인관계를 맺은 인물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하다.
넷째 딸은 한확의 손자이자 인수대비의 조카 한익과, 다섯째 딸은 윤여필(1466-1555)과, 마지막으로 일곱째 딸은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1466-1525)과 혼인했다.
이 가운데 가장 네임밸류 떨어지는 인물이 윤여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보통 레벨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증조부가 바로 정희왕후의 부친 윤번으로, 윤여필은 윤번-윤곤으로 이어지는 파평 윤씨 외척 세력이었다.
게다가 박원종의 정실부인 역시 파평 윤씨였다.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는 정현왕후의 증조부 윤곤이 한씨 부인과 재혼하기 전 첫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윤희제의 손자인 윤사로와 혼인했다.
윤사로와 정현옹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차남 윤린의 딸이 박원종과 혼인했다.
참고로, 장남 윤반은 한명회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이번엔 연산군의 혼맥을 살펴보자.
성종은 1487년, 신승선의 딸을 연산군의 배필로 삼았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병조판서 신승선의 딸로 세자빈을 삼으라." 하였다.』 (《성종실록》 1487년 3월 1일)
신승선은 세종의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사위였다.
『거창부원군 신승선이 죽었다... 승선은 젊었을 때에 용모가 아름다워서 뽑혀 임영대군의 사위가 되었다.』 (《연산군일기》 1502년 5월 29일, 신승선 졸기)
신승선의 배경을 살펴보면, 성종의 정치적 계산이 분명해진다.
임영대군의 차남 귀성군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8세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었다.
귀성군의 아내는 한백륜의 둘째딸이었는데, 그녀의 바로 윗언니가 바로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가 사망한 후 예종과 혼인한 안순왕후(安順王后, 1445-1499)였다.
한백륜은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의 부친 한확의 7촌 조카였고, 그의 막내딸은 신승선의 아들 신수영과 혼인했다.
이를 종합하면, 세조 사후 정희왕후로 대표되는 파평 윤씨와 인수대비로 대표되는 청주 한씨, 두 대표적 외척 세력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종은 정희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하고 정현왕후를 중전에 앉혔지만,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모후 인수대비와 손잡고 연산군을 신승선의 딸과 혼인시켜 세력 간 균형을 꾀했던 것이다.
연산군도 이런 배경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1499년 정현왕후 소생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중종)을 처남 신수근의 딸과 혼인시켰다.
난 이때 만약 중종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지 않았다면, 연산군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중종이 억울하게 쫓겨난 신씨를 평생 잊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정략과 감시의 결합,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이었다.
실제로 중종과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기까지 7년 동안 부부였음에도,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나는 중종이 신씨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본다.
1515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일부 사림들이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고 건의했다.
『담양부사 박상·순창군수 김정이 함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소(疏)에 이르기를, "지금 내정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를 곤후(坤后)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 (《중종실록》 1515년 8월 8일)
이 상소에 대해 중종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상이 소를 정원에 내리고 전교하기를, "이는 큰일이다. 어찌 소신의 말을 듣고서 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해조(該曹)에 내리더라도 또한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 소는 정원에 머물러두는 것이 가하다. 그리고, 옛적에 이르기를 ‘출납(出納)을 미덥게 한다.’ 하였다. 정원은 후설(喉舌)의 곳이어서 다만 위에서 전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래의 아뢰는 바도 분명히 살펴서 아뢰어야 한다...
만일 구언(求言)에 의하여 봉사를 올린 것은, 첫면에 ‘임금 앞에서 개탁(開拆)하소서.’라고 적혔어도, 심히 굳게 봉하지 않았으면 뜯어 보고 아뢰어야 한다. 이 뒤로는 비록 그 위아래 끝을 풀로 단단히 봉하여 뜯어 볼 수 없게 한 글이라도 모두 뜯어 본 뒤에 아뢰면, 출납을 미덥게 한다는 데에 합당할 것이다."』 (《중종실록》 1515년 8월 8일)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중종은 승정원에 "야, 아무리 왕이 뜯어보라고 해도, 너희들이 먼저 보고 이런 건 걸렀어야지. 앞으로 조심해."라고 했던 것이다.
중종의 신씨를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자.
월산대군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큰어머니이자, 박원종의 누이인 박씨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녀가 연산군과 간통했고, 이에 격분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왕이 박씨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銀)으로 승평부대부인이란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었다."』 (《연산군일기》 1506년 6월 9일)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506년 7월 20일)
『원종의 맏누이는 월산대군 이정의 아내로 폐주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의 가자를 주니 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 (《중종실록》 1510년 4월 17일, 박원종 졸기)
그러나 이 기록 역시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렵다.
박씨는 1455년생으로, 연산군보다 무려 스물한 살 연상이었다.
더구나 나이 오십을 넘긴 여인이 임신했다는 주장은 생물학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본다.
연산군은 박원종을 압박하기 위해 그의 누이 박씨를 ‘세자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실상 인질이었다.
누이가 볼모로 잡힌 박원종은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폭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박씨가 죽은 지 불과 40여 일 후, 박원종은 반정을 일으켰다.
이 흐름으로 보면, 《실록》이 전하는 ‘간통설’은 오히려 중종반정의 도덕적 정당성을 덧씌우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서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구라라는 얘기다.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반정을 성공시킨 박원종은 왜 중종을 왕으로 세웠을까?
그가 성종의 적차자로 정통성에서 앞서 있어서?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복잡하게 얽힌 혼맥 관계를 떠올려 보면, 중종반정은 정희왕후-한명회-정현왕후-박원종-윤여필로 이어지는 '파평 윤씨 윤번-윤곤 연합'의 '자기 편 사람 국왕 앉히기'였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아무튼, 박원종이 중종을 왕좌에 앉혀줬으니, 그다음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좋게 말하면 '논공행상,' 나쁘게 말하자면 '정산'의 시간이 온 것이다.
박원종은 반정을 일으키면서 신수근을 살해하고 이어 신씨마저 궐밖으로 내쫓았다.
『유순·김수동·유자광·박원종·유순정·성희안·김감·이손·권균·한사문·송일·박건·신준·정미수 및 육조 참판 등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宮壼)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하였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9일)
이제 그들 쪽 여인을 중전으로 삼을 차례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박원종은 윤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반정 후, 자신의 딸을 중전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이 타이밍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윤여필의 딸들이었다.
윤여필은 자식이 여럿 있었고, 박원종은 그중 넷째 딸(장경왕후, 1491-1515)을 골라 중종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내가 왕 만들어줬지? 그럼 내 조카를 중전으로 삼아.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19살 중종은 이때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비록 왕이 되었지만, 자기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걸.
그들의 진짜 목표는 당대의 왕권이 아니라 다음 왕이었다.
이것은 곧 격대지정(隔代指定)의 노골적인 시도였다.
그런데 이때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따로 있었다.
1505년 연산군은 채홍사(採紅使)를 파견, 미인들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이제 이계동을 전라도에, 임숭재를 경상도·충청도에 보내어 채홍준사라 칭하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계집을 간택해 오게 하라."』 (《연산군일기》 1505년 6월 16일)
임숭재가 경상도 상주에서 찾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훗날의 경빈 박씨(敬嬪 朴氏)다.
『사신은 논한다. 박수림은 대대로 상주에 살았다... 연산군 을축년(1505년)에 채홍의 일 때문에 비로소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반정한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이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6일)
기록에는 "반정한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으나, 난 그전에 이미 경빈이 궁에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연산군이 채홍사가 뽑은 여인들을 모두 궁으로 데려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채홍준사가 뽑아 온 사람의 나이와 자색을 상·중·하로 나누어 개록(開錄)하여 아뢰고, 또 무리로 나누어 예궐시키라. 스스로 가려 뽑으리라."』 (《연산군일기》 1505년 8월 14일)
반정 이후, 박원종 등은 연산군이 모아놨던 여인들을 궁에서 내보냈는데, 아마 경빈은 중종의 선택을 받아 궁에 남았을 것이다.
『박원종 등이 모두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러 원(院)의 가흥청·운평 등은 아울러 석방하소서. 오직 취홍원의 흥청만은 뇌영원으로 옮겨 내었다가, 총애를 받은 자를 분별한 뒤 석방하되, 내탕(內帑)의 보물로서 일찍이 흥청에게 주었던 것을 추심하여 반납하게 한 뒤에 내치소서."』 (《중종실록》 1506년 9월 3일)
새 중전 간택에 관해 정현왕후가 내린 전교에 이미 경빈을 견제하는 듯한 어조가 담겨 있다.
『대비께서 정승들에게 전교하기를, "후비(后妃)의 덕은 얌전하고 착한 것이 제일인 것이다. 지금 중궁을 간택하는 때에 한갓 용모만을 봐서는 안 된다. 내가 먼저 두세 처녀를 간택하여 후궁에 두었다가 서서히 그 행실을 보다 배필을 삼도록 하니 어떠한가?"』 (《중종실록》 1506년 9월 17일)
장경왕후보다 경빈에게 더 마음을 두었던 중종이 중전 책봉을 미루고 열 달을 버텼다는 사실은, 앞서 중종 시리즈에서 이미 언급했다.
중종은 결국 박원종으로부터 '중전에게서 왕자를 얻지 못하면 다른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다.'는 특약을 받아낸 다음에야 장경왕후를 맞이했다.
『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좌찬성 박안성·우찬성 송일·좌참찬 이손·우참찬 이즙이 아뢰기를, "왕비 책봉하는 일을 신 등이 전일에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이제까지 국모를 정하지 못하여 대체에 온당치 못하니, 바라건대, 속히 정하시어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맞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속히 국모를 정하는 일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이같이 큰일을 갑작스럽게 빨리 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선왕들께서도 후사를 중히 여기시므로 결연히 정하지 못하신 것이다. 이제 자전(慈殿)의 뜻도 그러시고 나 역시 그 때문에 어렵게 여긴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큰일을 갑자기 정하기가 온당치 못하다는 하교는 매우 당연합니다. 국모의 범절은 마땅히 덕행으로 으뜸을 삼는 것이요, 비록 뒤를 이을 후사가 없더라도 다른 분에게 아들이 있으면 역시 대통을 잇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곧 윤숙원 【윤여필의 딸】 으로 왕비를 삼도록 명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6월 17일)
그로부터 2년 뒤, 경빈은 중종의 첫 아들 복성군을 낳았다.
『이날 밤에 숙의 박씨가 아들 미(嵋, 복성군)를 낳았다.』 (《중종실록》 1509년 9월 15일)
이때까지 장경왕후를 포함해 중종의 그 어떤 여인도 출산은커녕, 임신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중종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가?
"결국 너희들끼리 끌어주고 당겨주면서 천년만년 해 먹겠다는 얘기 아니냐? 꿈 깨라. 난 사랑하는 경빈이 낳은 복성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아마 박원종과 윤여필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것이다.
『밤 초고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중종실록》 1515년 2월 25일)
윤여필과 윤임에게는 벅찬 기쁨의 순간이었지만, 경빈에게는 충격이자 절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상황은 또 급변했다. 장경왕후가 산후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삼경 오점에 중궁 윤씨가 승하하였다.』 (《중종실록》 1515년 3월 2일)
중종과 경빈은 다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경빈을 중전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복성군을 적장자로 올리려 했던 것이다.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 박씨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중종실록》 1517년 7월 22일)
박원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나, '유교꼰대' 조정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경빈의 중전 책봉을 반대했다.
그들에게는 중종의 감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겐 적장자의 왕위 계승이라는 '유교 질서의 회복'이 최우선이었다.
『유순이 아뢰기를, "국본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이처럼 염려한 것입니다."』 (《중종실록》 1515년 10월 3일)
윤여필과 윤임 입장에서는 조정 대신들이 앞장서 중종과 경빈을 제지해 주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멀리 봐야 했다.
만약 다른 명문가 출신의 여인이 중전에 오르고 왕자를 낳아 세력을 넓힌다면, 언젠가 자신들과 권력을 다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윤여필과 윤임은 친족인 파평 윤씨 가문 안에서 새 중전 후보를 물색했을 것이다.
그들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중전으로 세웠을 때 자신들이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는, 말하자면 ‘만만한 세력’이 필요했을 터.
윤번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윤여필은 차남 윤사윤의 손자였고, 문정왕후의 부친 윤지임은 삼남 윤사흔의 증손자였다.
정현왕후 또한 정희왕후가 폐비 윤씨를 내쫓고 그녀를 중전에 앉혔듯, 경빈을 끝내 외면하고 문정왕후를 새 왕비로 세우는 걸 승인했다.
장경왕후나 문정왕후가 중전에 오르는 과정을 보면, 그것은 ‘파평 윤씨 윤번–윤곤 연합’이 짜고 친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예조에 전교하기를, "자전께서 분부하신 가운데 ‘윤지임의 딸이 여러 대 공후(公侯)의 가문에 태어났고, 탁월한 덕행이 있어 중궁 자리에 가합하다.’ 하셨는데,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여 비로 삼기를 결정하였으니, 길일을 가려 아뢰라."』 (《중종실록》 1517년 3월 15일)
이때 문정왕후의 나이 고작 열일곱.
그러나 이팔청춘의 그녀에게 궁궐 생활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