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3)

by Loxias

* 문정왕후 vs. 경빈 박씨


개인적으로 배우 전인화의 오랜 팬이다.

그래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그녀가 맡은 문정왕후와, 도지원이 맡은 경빈 박씨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드라마에서는 문정왕후가 죽기 직전 경빈의 환영을 보는 장면을 넣어 둘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꽤 의미 있는 해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드라마의 문제라면, 배우들의 뛰어난 외모로 인해 오히려 혼란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문정왕후와 경빈이 모두 미인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달랐다.

문정왕후는 외모에 대한 묘사가 남아있지 않은 반면, 경빈은 절세미인이었다.


앞서 중종과 인종에 대한 글에서도 모두 이 기록을 언급했었으니, 이번이 세 번째다.

『중종의 빈 박씨를 개장(改葬)하였다. 빈은 복성군 이미(李嵋)의 어머니인데, 본디 상주 민가의 딸로서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름다운 자태가 후궁을 압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1년 8월 1일)


앞선 파트에서 말했듯이, 경빈은 1505년 채홍사 임숭재에 의해 발탁되었고 실은 연산군 치세에 이미 궁에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근거가 바로 다음 기록이다.

『전교하기를, "채홍준사가 뽑아 온 사람의 나이와 자색을 상·중·하로 나누어 개록(開錄)하여 아뢰고, 또 무리로 나누어 예궐시키라. 스스로 가려 뽑으리라."』 (《연산군일기》 1505년 8월 14일)

실록에 이렇게까지 기록될 정도의 미인을, 외모를 평가하는 데는 '매의 눈'을 지녔던 연산군이 놓쳤을 리 없다.


나는 경빈이 연산군 몰락 이후 중종의 후궁이 된 과정이 대략 이러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읽어주면 된다.


박원종은 연산군이 뽑아둔 여인들 중 마음에 드는 이들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

『연산이 쫓겨나자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비(婢)를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참람하기가 한도가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중종실록》 1510년 4월 17일, 박원종 졸기)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경빈이 박원종의 수양딸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는 아마 박원종이 연산군이 궁에 들인 여인들을 차지하는 와중에, 경빈을 눈여겨보고 중종에게 데려갔다고 상상한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신씨를 축출하고 자신의 조카딸을 차기 왕비로 세우려던 박원종이, 굳이 자기 손으로 조카딸의 경쟁자가 될 미녀를 바친다? 굳이 왜?

더구나 당시 박원종의 권력은 중종을 압도했다. 그가 이씨였다면,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 인물이 중종에게 잘 보이려고 미인을 바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나는 오히려 박원종 또한 경빈에게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명목상 국왕인 중종을 의식해 “주상께서 먼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취하시지요.”라며 양보했는데, 중종이 냉큼 초이스한 이가 바로 경빈이었던 것은 아닐까?

《삼국지》에서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킨 후, 미인으로 소문난 원희의 부인 견씨를 아들 조비가 먼저 데려가자 “이번 원정은 저놈 좋은 일만 시켰구나.”라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른다.

경빈이 궁에 들어와 누린 압도적인 입지와 문정왕후를 포함한 모든 후궁을 제친 권력의 원천은, 그녀의 압도적인 미모에 반해 중종이 기꺼이 ‘바친’ 사랑이었다.


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복성군, 혜순·혜정옹주)를 낳았는데, 모친의 외모를 물려받았던지 이들의 용모도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제훈도 최억령이 상소하였다. "지난번 왕빈(王嬪) 박씨는 일찍이 후궁의 선발에 참예하여 여러번 웅비의 상서로움을 꿈꿨고, 금지옥엽의 왕자군과 옹주의 빼어난 광채는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르던 바입니다."』 (《중종실록》 1529년 8월 15일)


중종은 그런 경빈과 복성군을 가장 아꼈다.

그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미 중종과 인종 시리즈에서 충분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겠다.

관심 있는 독자는 내가 쓴 ‘중종(2) My Queen. My Wife. My Love,’ ‘중종(3) 경국지색, 경빈 박씨,’ ‘중종(4) 상께서 원자를 바꾸려 하시니 나라가 장차 날로 기울 것이다’를 참고하길 바란다.


여기서는 하나의 기록만 인용하겠다.

1533년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될 때, 그 순간 남겨진 중종의 말이다.


『미(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상이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는데,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미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로 실어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중종실록》 1533년 5월 26일)


예전에 좋아했던 정재욱의 노래 ‘잘가요’ 한 소절이 떠오른다.

"잘가요, 내 소중한 사랑. 행복했어요. 그래도 이것만 알아줘요... 결코 내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얕지 않음을..."

나는 중종의 사랑이 결코 부족하거나 얕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강요받은, 너무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1517년, ‘제다이 기사’처럼 발탁되어 궁에 들어온 문정왕후는 경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중종과의 사이에서 첫아이, 의혜공주를 낳은 것은 1521년.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이걸 들여다보면 ‘첫아이가 조금 늦었네’라고 간단히 치부하고 넘길 일이 아니다.


문정왕후가 궁에 들어올 당시, 세자 인종은 겨우 세 살이었다.

그 시절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고, 왕가의 자제들이 죽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즉, 문정왕후가 중종과의 사이에서 왕자를 낳지 못한 상태에서 인종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의 위치는 단숨에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인종의 지능 문제가 아직 드러나기 전이었으므로, 윤임 등 사림세력 역시 문정왕후의 왕자 출산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가 왕실의 미래를 책임질 존재로 주목받던 초기 국면이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문정왕후가 4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그 단서는 바로 반정 직후 중종이 박원종 등의 압박을 무려 열 달 가까이 버티며 받아냈던 그 특약,

“중전에게서 왕자를 얻지 못하면 후궁 소생의 아들이 대통을 이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경빈이 복성군을 낳기 전까지 장경왕후를 포함해 어떤 여인도 임신하지 못했다.

그동안 중종이 경빈에게 보였던 집착과 애정을 고려하면, 나는 이 시기 문정왕후가 겪은 '쩌리' 취급은 경빈의 입김과 중종의 의지가 결합된 ‘의도적 따돌리기’의 산물로 본다.


그렇다면 문정왕후의 첫 출산이 왜 1521년이었을까?

갑자기 중종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1520년, 중종은 대신들의 압박 끝에 결국 인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왕세자를 책봉하였다... 그 교명문은 이러하였다.

"세자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큰 근본을 위함이며, 조종을 봉사하며, 제기(祭器)를 맡는 것은 원량(元良)에게 맡겨야 마땅하므로, 이제 너 이호(李峼)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도(道)를 즐거워하고 스승을 높이며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삼선(三善)의 가르침에 잘 따라서 일국의 평안을 길게 하라."』 (《중종실록》 1520년 4월 22일)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모든 건 변한다. 이건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인 사이가 항상 좋을 수도, 항상 나쁠 수도 없다.

가깝다가도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가 또 멀어졌다가를 반복한다.


당장 우리의 주변만 봐도 그렇다.

세상 둘도 없이 사랑하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틀어져 헤어진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한 건 뭘 모르고 한 소리다.

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always,' 'never,' 'forever' 같은 말은 함부로 쓰면 안 된다.


1515년 이후, 중종과 경빈의 관계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장경왕후 사망 이후, 경빈은 ‘이번에야말로 중전 책봉’을 요구했지만 중종은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거기에 1520년 인종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경빈 입장에서는 그동안 기대했던 것들이 사실상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 시기 경빈의 실망감과 중종을 향한 배신감은 정말 컸을 것이다.


그러니 경빈이 중종에게 좋은 말이 나갔겠는가?

'넌 맨날 말뿐이지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이럴 거면 다 때려쳐라' 같은 말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처음엔 중종도 미안하다고 달랬겠지만, 좋은 소리도 세 번 들으면 지겹다고 했다.

하물며 몇 년 동안 이런 분위기라면, 아무리 중종이 경빈을 사랑했다 해도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 경빈은 1514년 혜정옹주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결국 이 시기 중종은 솔직히 경빈에게 '질린' 상태였을 것이다.

이때 그 틈을 알아챈 문정왕후가 움직였던 것이 아닐까?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녀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중종의 마음이 경빈에게서 조금 멀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그 기회를 붙잡았다. 임신에 성공한 것이다.

임신에 성공한 그녀의 입지는 말 그대로 '떡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은 상처받았을 것이다.

이성(理性)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외도가 왜 사람을 망가뜨리겠는가?

머리로는 자녀 양육, 재산 문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용서하고 참아야 한다”고 이해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졌다,' '나는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정왕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나는 경빈만큼 사랑받지 못한다,' '꿩 대신 닭에 불과하다'는 감정은, 정치적 입지 상승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문정왕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경빈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만약 문정왕후가 왕자를 낳는다면, 그야말로 끝이다.

경빈 입장에서는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부터 경빈이 음사(淫祀)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앞선 장경왕후 시절부터 이미 그랬을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문정왕후는 연달아 공주만 출산했다.

1521년 의혜공주, 이듬해 혜순공주.

그리고 운명의 1525년이 되었다.


앞서 중종 시리즈에서 설명했듯이, 문정왕후는 1522년 혜순공주를 낳고 무려 8년간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530년 경현공주를 낳았다.

그녀의 나이 22~30세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한창나이에 8년이나 공백기가 있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어 기록을 찾아봤더니, 그 사이에 임신과 출산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중궁도 잠시 감기 증세가 있고 또한 평소와 같은 때가 【3월이 임박했음을 말한다.】 아니기 때문에 이달 13일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해 단속해 놓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6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중궁이 해산했으니 7일 안에는 경연을 열기를 품하지 말고 문묘의 별제 날짜도 10일 후로 물려서 정하고, 문무과의 별시도 차례차례 물려서 정하라."』 (《중종실록》 1528년 8월 30일)


1528년의 기록은 문정왕후가 해산했다고 명시했으며, 1525년의 기록 역시 그녀가 임신 중(=평소와 같지 않은 때)이었으며, 이듬해 3월이 출산 예정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저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1525년 문정왕후의 임신·출산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25년 윤12월 13일, 문정왕후가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 대사헌 박호 등이 차자 올리기를, "전일에 중궁께서 이어하실 때를 당해 바로 길 곁의 광천위 김인경의 집에 무당들을 모아놓고 북 울리는 소리가 길을 덮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었습니다.

시위하는 관원들이 거의 모두 놀라서 그 사람들에게 따져 묻자,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고 중궁을 위해 비는 제사를 차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어찌 전하께서 아실 일이겠습니까?"』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16일)


이때 음사가 벌어진 집의 주인 광천위 김인경은 바로 경빈의 장녀, 혜순옹주의 남편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문정왕후 편에 앞서 썼던 중종과 인종에 대한 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둘 중 중종에 대한 글을 먼저 썼는데, 그때는 인종의 지능 문제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문정왕후가 경빈의 사위의 집에서 벌어진 음사로 인해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가 경빈을 가만 두어선 안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불과 1년 후, 작서의 변이 벌어졌다고 봤었다.


그런데, 이후 인종 시리즈를 쓰면서 그의 지능 문제를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1524~25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홍문관 부제학 채소권 등이 상소하였다.

"동궁을 교양하는 방도는 더욱이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연(書筵)의 진독(進讀)은 음의(音義)만 해석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반드시 묻고 막히는 데가 있으면 반드시 바루어야, 점점 진전하여 날로 성취를 보여 덕성(德性)을 보태니, 이것이 어찌 교양하여 선도하는 급무가 아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4년 8월 14일)


『집의 황효헌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나이 어리지만 학문을 거의 통했습니다. 다만 빈객이나 요속들이 예모(禮貌) 갖추기를 한결같이 상의 앞에서처럼 하므로, 세자께서 비록 의심나는 데가 있다 하더라도 하문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의혹스러운데가 있으면 반드시 풀어버린 다음에야 환히 알게 되는 법이오니, 논란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중종실록》 1525년 4월 24일)


『전교하기를, "비록 나이 어려 글뜻을 해득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평소에 논란하여 귀에 익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논란한 말들을 서계(書啓)하도록 했던 것은 논란한 말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서연에서 부지런히 하는지 태만하게 하는지를 알려고 한 것인데, 2월 이후로는 한 번도 서계하지 않았으니 이는 일찍이 논란하지 않은 것이다.

빈객 및 서연관들을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한 것은 깊이 죄를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다소라도 이를 징계삼아 힘써서 강론하게 하려는 것이다."』 (《중종실록》 1525년 8월 8일)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문정왕후가 왕자를 낳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경빈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종에게서 이상한 조짐이 감지되자, 윤임 역시 문정왕후의 왕자 출산을 바라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복성군은 서자(庶子)지만, 문정왕후가 낳은 왕자는 적자(嫡子)다.

정통성 차원에서 복성군은 인종을 대체할 수 없지만,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는 인종을 대체할 수 있다.

즉, 이 시점에서는 경빈과 윤임, 모두가 문정왕후의 왕자 출산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다.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16일의 기록에서 중요한 대목이 있다. '자전의 분부를 받고 중궁을 위해 비는 제사를 차린 것.'

사건을 보고 받은 중종은 모후 정현왕후(자순대비)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는데, 그녀의 답은 이러했다.

『전교하였다. "그 뒤에 자전의 분부이신지를 품하니 ‘이는 곧 행행(行幸) 때면 으레 하는 일로서 아랫사람들이 품하기에 내가 단지 그대로 들었을 뿐이다. 어찌 그처럼 외람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하시었다."』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18일)


정현왕후가 정말 경빈이 제사를 치르면서 저럴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천만에,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경쟁자였던 폐비 윤씨가 어떻게 궁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았던가?

성종의 후궁 정소용과 엄숙의가 자신을 저주하는 음사를 행했단 걸 알게 된 윤씨가 사적으로 복수하려다 오히려 역으로 걸려 파국을 맞았다.


『문중선이 언문 한 장을 꺼내어 의지(懿旨)를 선시하기를, "이달 20일에 감찰(監察) 집에서 보냈다고 일컬으면서 권숙의의 집에 언문을 던지는 자가 있었는데, 권숙의의 집에서 주워 보니 정소용과 엄숙의가 서로 통신(通信)하여 중궁과 원자를 해치려고 한 것이다. 생각건대, 정소용이 한 짓인 듯하다."』 (《성종실록》 1477년 3월 29일)


난 이때 정현왕후가 경빈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면서 그녀가 자원하고 나선 걸 별말 없이 승인했을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윤임이 정현왕후를 통해 문정왕후와 경빈, 둘이 박터지게 싸우라고 이간계(離間計)를 걸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즉, 정현왕후가 직접 이 일을 지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때 중종의 처신은 더 큰 문제다.

생각해 보라. 중전이 이어하는 와중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면, 아무리 자전의 허가가 있었다고 해도 경빈이나 김인경을 불러다 추궁을 해야 정상이다.

심지어 저 사건 이후 결국 문정왕후가 유산(혹은 사산)을 했음에도, 아무도 책임지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중종이 문정왕후와 경빈 사이에서 명백히 경빈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마치 그의 부친 성종이 음사가 발각된 두 후궁은 가만히 두고 폐비 윤씨만 내쫓았던 것처럼 말이다.


유산 후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때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과 절망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 그녀는 모두에게 철저히 버림받았다.

스승 오비완 케노비에게 사지를 찢긴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그녀의 마음은 경빈, 중종, 정현왕후에 의해 갈가리 찢겼던 것이다.


난 바로 이때가 문정왕후가 '제다이 기사 아나킨 스카이워커'에서 '다스 베이더'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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