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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3)

요동 정벌의 진실

by Loxias

1388년 5월, 우왕과 최영의 독촉으로 요동(遼東) 원정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바로 '위화도 회군'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조정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직접 왕위에 올라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했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워낙 크다 보니, 그에 비해 군사·외교적 측면은 일반적으로 깊이 생각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이성계라면 요동 정벌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그가 결국 잿밥, 즉 역성혁명에만 관심이 있어 칼끝을 돌렸다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당시 요동은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가까웠다는 점.

둘째, 이성계는 이미 요동 정벌에 성공한 경험이 있고, 더구나 불패(不敗)의 명장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위화도 회군이 벌어지기 전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위 두 전제조건이 '과연 타당한가' 의문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요동은 무주공산이 아니었고, 이성계는 요동에서 패한 적이 있다.


* 고려-원(元) 관계의 변화와 이성계의 등장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원은 고려를 복속시킨 뒤 그들 맘대로 고려 국왕을 갈아치웠다.

충렬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을 세웠다가 다시 충렬왕을 복위시키는 등, 고려 국왕의 위치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충(忠)’ 자가 들어가는 몇몇 고려 국왕들의 재위 기간이 1기와 2기로 나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은 1351년 10월, 원 조정에 의해 조카 충정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원이 강릉대군 왕기(王祺)를 국왕으로 임명하고, 단사관 완자불화(完者不花, 울제이부카)를 보내 모든 창고와 궁실을 봉쇄하고 국새를 회수하여 돌아갔다. (충정)왕은 강화로 물러났다.』 (《고려사》 1351년 10월 6일)


그런데 공민왕 즉위 무렵, 원나라에서는 민중 반란이 일어났다.

바로 유명한 홍건적의 난이다.

1351년 한산동과 유복통이란 자들이 가장 먼저 원나라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이후 원나라 각지에서 성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들 중에는 훗날 명(明) 태조가 되는 주원장도 있었다.


원은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봉기가 워낙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어려움을 겪었다.

『평강부원군 채하중이 원에서 돌아와 승상 탈탈(脫脫, 톡토)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니 국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보내어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원의 정치가 쇠퇴하자 하남(河南)에서 요망한 도적인 한산동과 한교아 등이 처음으로 반란을 선동하였는데, 영천(穎川)의 요망한 인물 유복통도 또한 군사를 일으켜 홍건(紅巾)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도당인 관선생과 사유이, 왕사성 등과 함께 중원을 노략질하고 산동(山東) 지방에 나누어 거점을 잡아서 그 기세가 크게 떨쳤다. 도적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는 바람에 천하가 크게 시끄러웠다.』 (《고려사》 1354년 6월 1일)


급기야 원은 고려에 파병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의미다.

『원이 이부낭중 합자나해(哈刺那海, 카라노카이)와 숭문감소감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바얀테무르), 이용감승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 임뭉쿠부카)를 보내어 유탁·염제신·권겸·원호·나영걸·인당·김용·이권·강윤충·정세운·황상·최영·최운기·이방실·안우 등과 서경의 수군 300명을 불러들이고 또한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燕京)에 집결시켜 장사성을 토벌하라고 지시하였다.』 (《고려사》 1354년 6월 13일)


이때 원에 파병 간 고려군은 고우성(高郵城) 공략에 투입되었는데, 매우 잘 싸웠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인안이 원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태사 탈탈이 군사 8,000,000명을 이끌고 고우성을 공격하면서 유탁 등 〈우리나라에서 간〉 원정군과 연경에 거주하는 본국인 총 23,000명을 선봉으로 삼았습니다. 성이 곧 함락될 즈음에 달단의 지원노장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꺼려서 명령하기를,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이 성을 취하자.’라고 하면서 군사를 지휘하여 퇴각시켰습니다. 그날 밤에 적이 성을 굳게 지키면서 방어 설비를 하였기 때문에 다음 날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탈탈을 참소하여서 황제가 회안(淮安)으로 유배보냈습니다."』 (《고려사》 1354년 11월 30일)


고려군의 선전 여부와는 별개로, 당시 원의 정벌군은 톡토가 해임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세력을 키우던 반란군은 1355년 2월, 실질적 리더 유복통이 이미 죽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고려사에서는 한교아)를 옹립하여 송(宋)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대륙의 정세는 고려 조정에도 모두 전해졌다.

『이 달에 정남만호 권겸과 원호, 인당이 원에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남쪽 지방의 적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으며, 우리 군대는 육합성을 함락시킨 후에 회안로로 이동해 방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1355년 5월)


이에 공민왕은 원이 더 이상 고려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반원(反元)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1356년 5월, 공민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반원 정책 세 가지를 전격 단행했다.


첫 번째, 공민왕은 기황후라는 '빽'을 믿고 권세를 떨치던 기씨 일족을 숙청했다.

『대사도 기철·태감 권겸·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고 그 친당(親黨)은 모두 도주하였다.』 (《고려사》 1356년 5월 18일)


두 번째,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 理問所)를 폐지하였다.』 (《고려사》 1356년 5월 18일)


여기서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민왕이 정동행성을 폐지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가 폐지한 것은 정동행성의 하부조직인 ‘이문소’다.


원 세조(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당시 고려 국왕이던 충렬왕을 행성의 좌승상으로 임명했다.

『조인규가 원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왕을 책봉하여 정동중서성좌승상으로 삼고, 부마 고려국왕의 관작은 이전과 같으며, 아탑해와 함께 〈정동행성의〉 업무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고려사》 1283년 6월 1일)


원이 일본 원정을 포기한 후에도 정동행성은 없어지지 않고, 고려 내정 간섭 기구로 남았다.

이 당시 고려 국왕의 정식 명칭은 '정동행성좌승상 고려국왕'이었다.


『충선왕이 전위하겠다고 아뢰어 청하자 원의 황제가 바로 책봉하여 말하기를, “아! 너 고려의 왕세자 왕도는 우리의 훈척(勳戚)으로서 대대로 제후의 나라[藩維]가 되었도다... 이에 성대한 전례(典禮)에 따라 인장을 하사하고 특별히 금자광록대부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을 내리노라.”』 (《고려사》 충숙왕 총서)


『원이 상가(桑哥, 셍게)를 보내와서 조서를 반포하여 말하기를, "이에 그 아들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 바스마도르지)에게 정동행성좌승상 고려국왕의 직위를 물려받게 하여, 짐의 덕과 은혜를 널리 펴서 나의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고려사》 1344년 4월 27일)


이문소의 역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군사정권 시기의 중앙정보부나 안기부를 생각하면 얼추 비슷할 것이다.

즉,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거나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잡아다 가두고 조지는 비밀경찰·정보기관에 가까웠다.


『이문소가 환관과 호강(豪强)한 사람들의 전장(田莊)을 철거시켰다는 이유로 밀성부사 이손경, 여흥부사 이몽정, 서주부사 조동휘를 가두었다.』 (《고려사》 1347년 10월 4일)


『내인 최안계가 참소하여 말하기를, “정오는 왕이 나이가 어려서 나랏일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노하여 〈정오를〉 정동행성 이문소에 가두고 장(杖)을 치게 하였다.』 (《고려사》 정오 열전)


『당시 기삼만의 죽음으로 행성 이문소에서 정치관 서호와 전녹생 등을 가두자 김영돈이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고려사》 김영돈 열전)


공민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군사행동에도 나섰다.

『평리 인당, 동지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병마사로, 사윤 신순·유홍, 전 대호군 최영, 전 부정 최부개를 부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전 대호군 공천보, 전 종부령 김원봉을 부사로 임명하여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 (《고려사》 1356년 5월 18일)


고려군은 결국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공민왕의 반원 운동의 대표적 성과다.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화주·등주·정주·장주·예주·고주·문주·의주 및 선덕진·원흥진·영인진·요덕진·정변진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함주(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고려사》 1356년 7월 9일)


우리 역사서들은 이 세 가지 ‘성공 사례’만을 강조한 채 공민왕을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개혁군주로 묘사하지만, 나는 이 서술에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원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태가 조금 불리하게 돌아가자 공민왕은 다시 원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뿐 아니라 압록강 서쪽도 공격했다.

그런데 압록강 서쪽으로 진격한 인당의 군대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당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개의 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고려사》 1356년 6월 4일)


기록에는 없지만, 난 이때 압록강 건너 진군한 인당의 군대가 패전했을 것으로 본다.

5월 18일 공격을 개시할 때 분명 8개의 참을 공격 목표로 했다고 기록했는데, 6월 4일 기록에는 3개의 참만을 격파했다고 한 걸 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원은 사신을 가두고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원이 본국에서 보낸 절일사 김구년을 요양성(遼陽省)에 가두고 800,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에 나선다고 말하니, 서북면병마사 인당이 군사를 늘려 대비하자고 청하였다.』 (《고려사》 1356년 6월 26일)


공민왕은 식겁했던지 남경(서울)의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판서운관사 진영서를 시켜 남경(南京)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고려사》 1356년 6월 28일)

여차하면 남쪽으로 튈 궁리를 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백성들까지 도성을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할 정도로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국왕이 남경의 지세를 살펴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인심이 동요하여 살 곳을 찾아 짐을 꾸려[男負女戴]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행렬이 마치 저자에 가는 듯 〈많아서〉 이를 금지시킨 것이다.』 (《고려사》 1356년 7월 4일)


이때는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 개경을 떠나지 않았지만, 몇 년 후 홍건적이 쳐들어 오자 공민왕은 개경에서 항전할 것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안동으로 튀었다.

임진왜란 당시 제 한 목숨 건사하고자 도성을 버리고 튀었다고 두고두고 까이는 선조나 공민왕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원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황제의 조서를 전했다.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고려는 우리 세조가 천하를 통일하신 초기부터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아 온 나라가 신하로 복속하고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온 것이 지금까지 100년이다. 〈그러나〉 근래에 간사한 민(民)들이 변란을 일으켜 우리 영토로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어지럽히며 우리 객사[傳舍]를 불태우고 우리 행인들의 길을 막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실정의 진위(眞僞)를 따지지 않고 많은 군사를 출동시키면 옥석(玉石)의 구분 없이 모두 섬멸되어 버릴 것이니 이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이에 특별히 살적한 등을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딴 마음을 먹지 말고 그대의 군대를 출동시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투항하게 하거나 체포할 것이며, 아니면 우리 군대와 약속하여 힘을 합쳐 협공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지금까지 우호를 길이 도탑게 지켜나가도록 하며, 이후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하라.”』 (《고려사》 1356년 7월 19일)


황제의 조서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쯤 되겠다.

'네가 잠시 딴 생각 한 모양인데, 이번 한 번만 봐줄 테니 똑바로 해라.'


황제의 조서에 공민왕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공민왕은 '바짝 기었다.' 인당을 처형한 후, 한 번만 봐달라는 반성문을 작성해서 원에 보냈다.


『“아래의 어리석은 자가 목숨만을 보전하려 하니 황제께서 저희의 사정을 헤아리고 또한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제넘게 사정을 설명하니 부디 들어주십시오...

뜻밖에도 역적 기철이 노책·권겸과 반역 음모를 꾸며 나라의 화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기철 등은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어 상국의 위엄을 빌려 권세를 떨치면서 임금을 협박하였고, 남이 소유한 인민(人民)을 끝없이 빼앗았으며, 남이 소유한 토지는 탈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상국의 조정을 두려워 한 나머지 한 번도 감히 문책하지 못했으니, 백성들의 원한이 어찌 밝게 드러날 수 있었겠습니까?...

금년 5월 18일에는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일시에 모두 일어나 배에 무기를 싣고 강어귀까지 들어왔으며, 또한 일당 몇 명을 시켜 상국의 사신이라 속이고 조서를 가지고 있다고 사칭하면서 궁문까지 도달하여 장차 우리 임금과 신하들을 몰살시킴으로써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니, 국가의 안위와 저희들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황제폐하의 성덕 덕분에 겨우 임기응변의 조치를 취해 역적들을 체포하였으며, 또 다른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미처 보고드릴 겨를도 없이 법에 따라 그 모두를 처단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그 소속관리와 군사가 강을 건너가 〈원의 백성들을〉 약탈한 것은 진실로 본의가 아니었으며, 그 죄인을 가려내어 우리나라의 법전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같은 인덕으로 넓히시고 부디 진노를 거두시어 바다같이 넓은 은혜를 내려 불쌍하기 짝이 없는 미미한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4,000여 리의 〈우리나라가〉 영원히 바닷가 울타리가 될 것이며, 억만 년을 두고 오로지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습니다.”』 (《고려사》 1356년 7월 30일)


2개월 뒤, 원에서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다'는 조서를 보내왔다.

『"만약 그대가 처음 그 우두머리를 체포하여 죄상을 갖추어 보고했으면 짐 또한 천하와 함께 선을 장려하고 악을 미워함에 따라 처리하였을 것이고 어찌 사사로움을 따라 천하의 큰 법을 무시했겠는가? 또한 워낙 갑자기 변란이 발생하여도 보고할 겨를이 없었겠는가? 일이 진정된 뒤에도 어찌하여 먼저 우리에게 급히 보고하지 않았는가?

일이 이미 지나간 데다 죄를 뉘우치며 진정하게 말해 왔으므로,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그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바이니, 지금부터는 근신하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규범을 잘 따를 것이며 우리의 백성들을 위무하여 동쪽 변방을 잘 지키도록 하라. 짐의 명령을 어기지 않으면 그대에게 경사가 있을 것이니, 아아! 그대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커다란 은덕[大造之心]을 베풀 것이고, 먼 변방을 위무하여 지극히 어진 덕을 펼 것이다.”』 (《고려사》 1356년 10월 8일)


이 일을 두고 공민왕이 쓸데없는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굽히고 들어가려고 어쩔 수 없이 인당을 처형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인당을 해임하고 옥에 가둔 후, 원 황제에게 "분란을 일으킨 자를 잡아 놨으니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고만 했어도 충분했다.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정도가 있다.

이때 공민왕은 나쁘게 말하면 '정말 쫄아서,' 자기 명령대로 움직인 장수를 제 손으로 죽여버리는 '쓰레기짓'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때, 쌍성총관부에 있던 원의 무장 이자춘은 공민왕의 움직임에 호응해 쌍성총관부 수복에 일조했다.

『처음에 우리 환조(이자춘)께서 쌍성 등지의 천호들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니 왕이 영접하며 말하기를, “어리석은 민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환조를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경은 마땅히 돌아가서 우리 민을 진정시키고, 만일 변란이 일어나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유인우가 머뭇거린다는 말을 듣고 환조를 소부윤에 임명하고, 병마판관 정신계를 보내어 환조에게 내응할 것을 지시하였다. 환조께서 명령을 듣고 곧 군사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하고 행군하여 유인우와 합세한 이후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더니, 조소생과 탁도경이 처자를 버리고 이판령 북쪽 입석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고려사》 조돈 열전)


이 공로로 이자춘은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 달에 우리 환조를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임명하고 집 1구(區)를 내려주었다.』 (《고려사》 1356년 9월)


그리고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 역시 함께 고려 조정에 출사하였다. 당시 나이 22세였다.

『고려 공민왕 5년(1356) 병신 태조의 연세가 22세인데 비로소 벼슬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성계가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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