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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4)

by Loxias

* 쌍성총관부 수복의 뒷이야기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관기(官妓)를 두고 상관과 트러블을 일으키고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 170여 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야반도주한 인물이다.

『처음에 전주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이 안렴사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이안사)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의 삼척현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태조실록》 총서)


둘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산성 별감이 다시 이안사가 있는 곳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는 또다시 동북면으로 도망치게 된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 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의 의주(宜州) 【곧 덕원이다.】 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태조실록》 총서)


평시라면 바로 토벌대가 쫓아왔을 상황이지만, 때는 마침 대몽항쟁기였다.

병사 한 명이 아쉬웠을 고려 조정으로서는 이안사의 과거를 문제 삼기보다 그의 병력을 활용하는 쪽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이안사는 의주 병마사로 임명되어 최전선에서 원과 맞서 싸우게 된다.

『이에 고려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삼국지》의 유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사에서 유비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독우를 때려 죽이고 도주했다.

그럼에도 대장군 하진은 유비를 용서하고 다시 기용하는데, 이는 순전히 유비 휘하 병력을 써먹기 위해서였다.


『군의 독우가 공적인 일로 현에 왔을 때, 유비가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했으므로 직접 안으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곤장 2백 대를 때렸다. 이어 관인 끈을 풀어 그의 목과 말뚝에 걸어 두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갔다.

오래지 않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파견하여 단양으로 가서 병사를 모집했다. 유비는 그와 함께 가서 하비현에 이르러 적을 만났다. 힘껏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하밀현의 승에 임명되었다.』 (《삼국지》 소열제기)


그렇지만 이안사는 다시 한번 고려를 배신했다. 원군이 진격해 오자 냅다 항복해 버린 것이다.

『이때 쌍성(雙城) 이북 【쌍성은 곧 영흥(永興)이다.】 지방이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길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말이 좋아 '마지못해' 항복한 거지, 조그마한 교전이라도 있었다면 《태조실록》에서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실상은 그냥 저항 없는 투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55년, 이안사는 원으로부터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임명되었다.

재빠른 항복이 좋은 조건의 채용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터.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등처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1258년, 조휘와 탁청이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들어 원에 항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원에 귀속된 지역이 바로 쌍성총관부다.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이 화주 이북 지방을 몽고에 넘겨주었다. 몽고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1258년 12월 14일)


쌍성총관부가 고려로 환원될 때까지, 조휘·탁청 가문이 직위를 세습했고 이후 이안사 가문 역시 이 체제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안사가 죽자 아들 이행리가 직위를 물려받았다.

『목조의 배위(配位)는 효비 이씨이니, 같은 이씨가 아니다. 천우위 장사 이공숙의 딸이다. 이행리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익조이다. 지원 12년(1275) 을해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태조실록》 총서)


이행리가 관직을 계승할 즈음, 고려 역시 오랜 대몽항쟁을 끝내고 원에 항복한 상태였다.

결국 고려 조정은 과거의 ‘배신자들’과 한 체제 안에서 공존하게 된 셈이다.

이행리는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에 참여하며 충렬왕을 직접 만나 부친의 과거에 대해 사과한다.


『18년(1281) 신사에 세조(쿠빌라이)가 일본을 정벌하니, 천하의 병선이 합포에 모였다. 익조가 상사의 문자를 받아, 본소의 인호(人戶)에 군인을 기명하여 뽑아서 쌍성총관부의 삼살 천호와 몽고의 대탑실 등과 함께 정벌에 나아갔다.

마침내 고려의 충렬왕을 뵈옵고 두세 번에 이르러 더욱 공손하고 더욱 삼가하면서 매양 사과하기를, "선신(先臣)께서 북방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의 아가리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고, 감히 군부를 배반한 것은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디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지금 경의 거지(擧止)를 보니 마음이 있는 바를 알겠다."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성계 가문은 이행리 시대에 다시 한 번 중대한 변곡점을 맞는다.

여진 천호들과의 갈등 끝에 협공을 받아 알동의 본거지를 버리고 도주하게 된 것이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하기를, "이행리는 본디 우리의 동류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기는 손 부인과 함께 가양탄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알동의 들에 적병이 가득히 차서 오고, 선봉 3백여 명은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 보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물이 갑자기 약 백여 보 가량이나 줄어들어 얕아져서 건널 만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를 같이 타고 건너가고, 종자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이르니,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후 이행리는 적도에 머물며 사실상 거점을 상실한 방랑 장수의 처지가 된다.

『모두 섬 가운데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직도·추도·초도의 재목을 베어 배 10척을 만들어 지원 27년(1290) 경인에 다시 수로로 해서 의주에 돌아와 거주하니,...』 (《태조실록》 총서)


이행리는 안변(安邊)의 호족 최기열의 딸에게 새장가를 간 것을 계기로 안변에 정착, 점차 세력을 회복한다.

『(손) 부인이 돌아가자 두 번째로 장가든 배위 정비 최씨는 등주 【곧 안변이다.】 호장 최기열의 딸이다. 드디어 등주의 협촌에 영업전을 두고 거주했으며, 또 백성 30호를 등주 서쪽 15리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뒤에 그 땅을 일컬어 삼십호평(三十戶平)이라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마침내 이행리는 원 조정으로부터 다루가치로 임명되며 정치적 입지도 되찾았다.

『성종 대덕 4년(1300) 10월에 칙명으로 승사랑(承仕郞)을 제수하여,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행리가 죽자, 그와 최씨 사이에 태어난 이춘이 관직을 물려받았다.

이행리·이춘 부자는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한 뒤, 그들의 옛 근거지인 알동의 군민들을 빼오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군사력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처음에 익조는, 함주의 토지가 평탄하고 넓고 비옥하기 때문에 알동의 백성들로서 남으로 오는 사람을 함주의 귀주·초고대·왕거산·운천·송두·도련포·아적랑이 등에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함주를 일컬어 알동 일언(斡東逸彦) 【여진에서는 백성을 일언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조가 안변 이북의 땅을 다 차지하였으나 함주로 옮겨 거처한 것은, 남방으로 온 백성과 가까이 하고, 또 목축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태조실록》 총서)


이춘 역시 이행리처럼 두 번 장가들었는데, 그의 후처 조씨는 쌍성총관 조양기의 딸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춘의 세력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배위는 경비 박씨니, 알동백호 증 문하시중 박광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자흥이니, 몽고 이름은 탑사불화(塔思不花)이고, 다음 아들은 곧 우리 환조(이자춘)이다.

박씨가 돌아간 후에 화주에 옮겨 거주하여 조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쌍성 총관의 딸이다.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완자불화(完者不花)이고, 다음 아들은 나해(那海)이다.』 (《태조실록》 총서)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쌍성총관 조양기는 왜 ‘굴러온 돌’에 불과했던 이춘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을까?

나는 이것이 단순한 회유책을 넘어선, 분명한 정치적 계산이 깔린 선택이었다고 본다.

즉, 자신의 외손자로 하여금 이씨 가문의 후사를 잇게 함으로써, 쌍성총관부 내에서 조씨 가문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곧바로 현실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예상대로, 이춘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이복형제들 간의 분란이 발생하게 된다.

『순제 원통 2년(1334) 갑술에 도조가 풍질을 앓아 탑사불화에게 관직을 전하고자 하니, 조씨는 그의 아들 완자불화에게 이어 지키게 하기를 청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1342년, 이춘이 죽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의 맏아들 이자흥이 관직을 이어받았으나, 불과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지정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탑사불화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니, 아들 교주가 어리었다.』 (《태조실록》 총서)


이 틈을 타 조씨 부인 소생 아들들이 행동에 나섰다.

『나해가, 그 어머니 조씨가 고려의 왕족임으로써 그의 형 완자불화와 함께 모두 원윤과 정윤이 되고, 또 조 총관의 세력을 믿고 드디어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내어, 그 애고(哀苦) 중을 틈타 선명(宣命)과 인신(印信)을 훔쳐 가니,...』 (《태조실록》 총서)


이 혼란 속에서 이자춘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형수 박씨와 협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조카 교주가 장성할 때까지 임시로 관직을 맡기로 한다.

『환조가 탑사불화의 아내 박씨에게 이르기를, "형수께서 스스로 개원로에 가서 변명하십시오." 하였다...

환조는 교주와 함께 박씨를 따라 개원로에 나아가서 진소(陳訴)하니, 본로에서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었다. 지정 3년(1343) 정월에 원나라에서, 조씨는 적실이 아니고, 교주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태조실록》 총서)


한편, 이 과정에서 반란을 시도했던 조씨 소생의 나해는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정황상 이자춘이 군사를 동원해 직접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내 사자를 보내어 나해를 목 베게 하였다. 나해가 이 소식을 듣고 선명과 인을 가지고 차인사에 숨으니, 잡아서 이를 죽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이자춘과 쌍성총관 가문 사이의 관계가 껄끄러워졌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자흥의 아들 교주가 성장함에 따라, 당초의 약속대로 관직을 돌려주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자춘은 끝내 그 자리를 조카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냥 '인마이포켓' 했던 것이다.

『교주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실록》 총서)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상, 이 대목은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주는 자신이 관작을 잇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처음에 환조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천계는 곧 교주이다.』 (《태조실록》 총서)


이 시기, 이자춘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인물이 있다. 바로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이교주에게 고려 관직을 내렸는데, 정황상 이는 이자춘과의 협력을 염두에 둔 ‘당근’으로 보인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군기윤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총서)


공민왕은 이 무렵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쌍성총관부 수복 과정에서 그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인물로는 조돈을 빼놓을 수 없다.

조돈은 초대 쌍성총관 조휘의 손자로, 젊은 시절 이미 고려 조정에 출사한 경력이 있었다.

『조돈의 초명은 조우이며, 쌍성총관 조휘의 손자이다. 대대로 용진에서 살았고 20세도 안 되어 충숙왕을 섬겼다... 왕이 훙서하자, 조돈은 용진으로 돌아갔다.』 (《고려사》 조돈 열전)


《고려사》 조돈 열전에는 쌍성총관부 수복의 전개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의 명을 받고 쌍성총관부로 향한 유인우는 즉각 공격에 나서지 않고, 쌍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지점에서 진격을 멈췄다.

이때 쌍성총관 조소생은 숙부인 조돈을 불러 사태를 논의한 뒤, 그를 감금했다.


『유인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을 지나 등주에 이르자 쌍성과의 거리가 200여 리였는데, 그곳에서 10여 일이나 머물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쌍성총관 조소생은 조돈의 조카였는데, 변고를 듣고 천호 탁도경과 함께 조돈을 불렀다.

조돈이 도착하자 조소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비할 계책을 세우고 조돈을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이에 탁도경과 함께 심복 중에 용감한 자 30명을 뽑아 조돈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실은 구속한 것이었다.』 (《고려사》 조돈 열전)


조돈이 붙잡히자, 이인임이 유인우를 설득해 조돈에게 돌아오라는 왕명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인임이 유인우를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조돈은 비록 조소생의 숙부이지만 마음은 조정에 있으니 반드시 역적들과 함께 반역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 왕명으로 그를 회유하면 반드시 올 것이오. 조돈이 오면 쌍성은 격문만 보내도 평정될 것이니, 역적의 우두머리는 벨 필요도 없을 게요.”라고 하였다.

유인우가 옳다고 여겨 마침내 밀랍으로 글을 써서 조돈에게 보내니 조돈이 글을 보고 숨기고서 기회를 엿보았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다.』 (《고려사》 조돈 열전)


그러나 이 설명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이인임과 유인우의 행동은 왕명조작이다. 훗날 공민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목이 날아갈 일인 것이다.

더구나 쌍성총관부에 사로잡혀 30여 명의 병사들에게 감시받고 있는 인물에게, 과연 서신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나는 이 기록에서 사건의 전후가 뒤바뀌었다고 본다.

즉, 쌍성총관부 원정을 시작하며 공민왕이 이미 조돈에게 밀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조돈이 스스로 쌍성총관부로 들어가 조소생과 협상을 시도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아마 협상이 결렬되자, 조소생이 조돈을 인질로 삼기 위해 감금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쌍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유인우는 조돈의 귀환을 기다리다 공격을 감행하려 했을 것이고, 이때 이인임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만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조돈은 조소생의 심복이었던 또 다른 조카 조도적을 설득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조도적이 백호(百戶)로서 조소생의 으뜸가는 참모였는데, 조돈이 조도적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역리를 버리고 순리를 따르며 위험을 버리고 편안함을 취하면 공명과 부귀를 얻을 것이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니 그대는 이 일을 도모하게.”라고 하였다.

조도적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숙부가 저를 살렸습니다. 공께서 먼저 하시면 제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조돈 열전)


탈출에 성공한 조돈은 유인우를 찾아가, 아들 조인벽을 쌍성총관부로 들여보내 민심을 다독일 것을 건의했다.

『하룻밤에 200리를 달려 날이 밝아올 적에 유인우의 진영에 나아가 유인우에게 이르기를, “이제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반드시 놀래어 항복하지 않고 들판을 비워 먹을 것을 없앨 것입니다. 공을 위한 계책은 내 아들 조인벽을 먼저 보내어 그들을 회유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인우도 그렇게 여기고 조인벽과 지통주사 장천핵으로 하여금 쌍성을 두루 다니게 하였다.』 (《고려사》 조돈 열전)


여기에 이자춘까지 협력하면서, 결국 조소생과 탁도경은 축출되고 쌍성총관부는 고려의 수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수복 후의 ‘후처리’ 과정에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유인우가 처음 이르자 단주 이북 천 수백 리가 순순히 고려로 향하였는데, 유인우는 재물을 탐하여 살육을 자행하였다. 조도적이 와서 알현하자 왕이 호군(護軍)에 임명하였고 금부(金符)를 하사하여 동북면천호로 임명하였으며 가서 여진을 어루만지게 하였는데, 유인우가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장천핵은 유인우의 휘하에 있으면서 죄 없는 이를 함부로 죽이고 우마(牛馬)와 재산을 노략질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은 것이 무려 9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북쪽 사람들의 귀부할 마음을 막았으니, 조돈이 깊이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조돈이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예빈경으로 올려 임명하였고 개경에 집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조돈 열전)


이 대목에서 나는 조돈과 이자춘 모두 공민왕에게 제대로 '뒷통수'를 맞았다고 본다.

공민왕이 이들을 포섭할 때 무엇을 약속했을까?

고려에 충성하면 쌍성총관부의 기존 지휘부를 몰아내고,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유지하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돈은 원래 초대 쌍성총관 조휘의 손자였다.

조소생을 내쫓고 조돈을 쌍성총관으로 세워주겠다는 말이 오갔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 정도의 실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목숨을 걸고 군사행동에 나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쌍성총관부 수복 이후, 기존의 지역 기득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돈이 작전에 끌어들여 핵심적인 역할을 맡겼던 조도적은 결국 유인우에게 살해됐다.

이를 단순히 ‘유인우의 시기’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유인우가 공민왕의 의지에 충실히 따랐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장천핵 역시 유인우 휘하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고분고분하지 않은 현지 세력을 숙청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정도가 심했기에, '마침내 북쪽 사람들의 귀부할 마음을 막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공민왕은 유인우와 장천핵을 앞세워 항복한 쌍성총관부를 박살내 버렸던 것이다.

이러니 조돈이 '깊이 원망스럽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조돈과 이자춘은 모두 개경에 집을 하사받고 중앙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던 보상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아직 뒷이야기가 남아 있다.

1356년 당시 쌍성총관부에 들어가 선무 작업을 펼쳤던 조돈의 아들 조인벽은, 이성계의 동복누이 정화공주를 후처로 맞이했다.

즉, 조돈과 이자춘은 사돈지간이었다.

둘의 혼인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인벽이 1328년생이고, 정화공주가 1335년생인 이성계보다 먼저 태어났음을 감안하면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당시에 이미 혼인한 상태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성계 가문의 역사를 살펴본 소감이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나는 《태조실록》의 서술을 읽으며 《삼국지연의》의 유비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삼국지연의 속 유비는 대의를 앞세워 민심을 얻고, 끝내 촉나라를 세워 제위에 오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떠한가?

공손찬, 조조, 원소 등과 상황에 따라 협력과 결별을 반복했고, 마침내는 유장을 거하게 통수쳐 홀라당 익주를 차지해버린 노회한 권력가가 바로 유비였다.


이성계 가문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생존과 세력 확장을 위해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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