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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5)

by Loxias

* 홍건적의 침입


원나라는 공민왕의 ‘배신’을 일단 한 번은 봐줬다.

기황후로서는 자기 친족을 죽인 공민왕을 갈아 마시고 싶었겠지만, 당장 내부의 소란을 수습하기에도 힘이 부치는 판국에 고려를 상대로 정벌군을 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건 ‘울며 겨자 먹기’에 가까웠다.


공민왕 역시 겉으로는 딴생각 안 한다며 꼬리를 내렸지만, 속으로까지 그랬을 리는 없다.

관계는 진작 파탄 났는데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지 못하는 부부, 이 시기의 원과 고려의 관계가 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고려와 원, 양쪽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1357년 6월 유복통이 변량(북송의 수도였던 변경)을 공격하면서 군대를 나눴고, 그중 관선생·사유·파두반 등이 이끄는 일단의 군대가 북진하여 원의 여름 수도 상도(上都)를 함락시킨 뒤, 1359년에는 요양에 이르렀다.

『관선생, 파두반 등이 상도를 함락시키고 궁궐에 불질렀다. 7일을 머물다가 옮겨 공격하여 요양으로 갔다가 마침내 고려에 이르렀다.』 (《원사》 순제8, 1358년 12월 9일)


홍건적은 고려에 노골적인 협박 서신까지 보냈다.

『홍건적이 우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백성들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들어가 있던 것을 통탄하여 우리들은 의(義)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켜 중원을 회복한 후, 동쪽으로는 제(齊)와 노(魯)를 넘고 서쪽으로는 함진(函秦)에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민광(閩廣)을 지나고 북쪽으로는 유연(幽燕)까지 이르니, 마치 굶주린 자가 산해진미를 얻고 병든 자가 좋은 약을 만난 것과 같이 모두 기뻐 귀부해 왔다.

이제 장수들에게 사졸을 엄중히 타일러 민(民)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했으니, 귀순한 민들은 어루만질 것이며 어리석게도 반항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1359년 2월 22일)


같은 해 12월, 홍건적은 마침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했다.

12월 8일 의주, 9일에는 정주와 인주를 함락시키고 28일에는 서경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홍건적 괴수로 평장을 사칭한 모거경이 군사를 40,000명이라고 떠벌이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시킨 후 부사 주영세와 의주의 민(民)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고려사》 1359년 12월 8일)

『적도들이 서경을 함락시켰다.』 (《고려사》 1359년 12월 28일)


고려군은 반격을 개시했고, 1360년 1월 19일 서경 탈환에 성공했다.

『아군이 서경으로 진격하자 먼저 진입한 보병 가운데 밟혀 죽은 자가 1,000명이 넘었고 홍건적의 전사자도 수천 명을 헤아렸다. 이에 적들은 용강·함종으로 퇴각하여 진을 쳤다.』 (《고려사》 1360년 1월 19일)


이어 2월 15일, 고려군은 함종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홍건적은 압록강 너머로 물러났다.

『아군이 다시 함종에서 싸웠는데 판개성부사 신부와 장군 이견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0,000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元帥)인 심자·황지선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홍건적 10,000여 명이 증산현으로 퇴각하여 수비하였다.』 (《고려사》 1360년 2월 15일)


고려는 일단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며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이후에도 홍건적과의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다.

『홍건적의 배 70여 척이 서해도 풍주 벽달포와 서경의 덕도·석도로 들어와 정박한 후 봉주에 들어와 성문을 불태웠다. 또 100여 척이 안악군 원당포에 들어와 재물을 노략질하고 민가를 불태우자 아군이 며칠을 싸웠으나 3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적들이 다시 황주 비파포를 침략하였다.』 (《고려사》 1360년 3월 22일)


이 무렵, 원에 승전을 보고하러 간 고려 사신이 요양에서 길이 막혀 되돌아왔다.

이로 미뤄, 관선생 등이 이끄는 홍건군 주력이 요동 일대를 아직 장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황지선을 참형에 처한 후 호부상서 주사충을 원에 보내 홍건적을 평정한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요양에 이르러 길이 막혀 돌아왔다.』 (《고려사》 1360년 3월 28일)


고려 입장에서는 홍건적의 재침입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공민왕은 원에 다시 기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는 ‘홍건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고 적지만, 사신이 길이 막혀 돌아오자 공민왕이 격분하며 재차 보낸 대목을 보면, 실상은 원에 SOS를 친 것에 가깝지 않았을까?

『익산군 이공수, 호부상서 주사충, 환자(宦者) 방도적을 원에 보내 홍건적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탕참(湯站)까지 갔다가 길이 막히자 압록강을 건너 되돌아왔다. 왕이 크게 화가 나서, “비록 죽게 되더라도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하며 굳이 다시 보내었으나 심양까지 가서 몇 개월 있다가 역시 목적지까지 못 가고 되돌아왔다.』 (《고려사》 1360년 7월 17일)


얼마 후 공민왕은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했다.

『우리 환조(이자춘)가 판장작감사로서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자 어사대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자춘은 동북면 사람이고 또 그 지역의 천호이니 그를 병마사로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잔치를 베풀어 〈동북면으로〉 가는 것을 위로하였고 재추들도 또한 회빈문에서 전송하였으며 그가 부임길에 오르자 호부상서를 제수하였다.』 (《고려사》 1361년 2월 15일)


동북면 전문가인 이자춘을 여태까지 개경에 박아두고 뭐 한 거냐부터, 어사대는 왜 그의 동북면 부임을 반대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귀순한 장수에게 근거지의 군권을 주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태다.

만약 이자춘이 자신이 이끌던 군대와 함께 동북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가 다시 고려를 떠나 원으로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전 파트에서 살펴봤듯, 공민왕은 쌍성총관부 수복 이후 지역의 기득권층을 탄압했고, 이자춘 등에게 병권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그런 공민왕이 끝내 이자춘을 동북면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고려의 사정이 그만큼 다급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자춘은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환조가 사망하여 그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크게 애도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예에 따라 부의하였다.』 (《고려사》 1361년 4월 30일)


이성계는 이자춘 사후에도 동북면에 계속 머물렀던 듯하다.

1361년 9월 독로강 만호 박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동북면상만호 이성계가 진압에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우리 태조가 금오위상장군으로 동북면상만호였는데 왕이 가서 김진을 도우라고 명령하자 태조가 친병 1,500인을 인솔하여 가니 박의가 이미 일당을 인솔하여 강계로 도망가 들어갔는데, 이들을 모두 잡아 처형하였다.』 (《고려사》 1361년 10월 18일)


이윽고 관선생·사유·반성 등 홍건적 지도부가 총동원, 이번에는 제대로 각 잡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군세가 십만에 이르렀다.

『홍건적의 자칭 평장인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0,000여 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노략질하였다.』 (《고려사》 1361년 10월 20일)


홍건적은 안주 등지에서 고려군을 격파하며 남하했고, 11월 16일에는 절령 방어선이 무너졌다.

『홍건적이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절령의 목책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져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고려사》 1361년 11월 16일)


이에 공민왕은 11월 18일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같은 달 24일 개경이 함락되었다.

『이날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하였다.』 (《고려사》 1361년 11월 24일)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한 뒤에도 주변 지역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안변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보면, 동북면 일대까지 진출한 부대가 있었던 듯하다.

『홍건적 300여 기가 원주를 함락시켜 목사 송광언이 전사하였다. 홍건적 29인이 다시 안변부(安邊府)에 당도하자 고을 사람들이 거짓 투항하며 음식을 대접하다가 술이 세 순배 돈 후 이들을 모조리 쳐서 죽였다.』 (《고려사》 1361년 12월 30일)


그런데 그 뒤로 불가사의한 전개가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1362년 1월 1일 공민왕이 피난지 안동에서 새해를 맞았다는 기사 다음에 한동안 공백이 있다가, 갑자기 “20만 고려군이 개경을 포위했다”는 기록이 튀어나온다.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구수, 최영 등이 병사 200,000명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 진을 치자, 총병관 정세운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진격시켜서 개경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고려사》 1362년 1월 17일)


뜬금포도 이런 뜬금포가 없다. 이 기록은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우선 병력부터가 무려 20만이다. 물론 과장일 수는 있다.

하지만 홍건적 십만 명이 버티고 있는 개경을 ‘포위’하려면, 최소한 그보다는 수적으로 우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병력을 도대체 어떻게 긁어모았단 말인가?


절령 방어선이 무너지고 공민왕이 피난을 떠나던 당시를 묘사한 기록을 보면 상황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적의 선봉이 흥의역에 이르자 왕과 공주가 장차 남행(南行)하려고 하였다. 김용·안우·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경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며, 최영이 더욱 통분하여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원컨대 주상께서 잠시 머물면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묘사직을 지켜야합니다.”라고 하니 재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어가가 민천사에 행차하여 근신들을 큰 네거리로 보내어 의병을 크게 불러 모았으나, 도성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응하는 자가 겨우 몇 사람이었다. 안우 등이 어쩔 수 없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여기에 남아 적을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떠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안우 열전)


백번 양보해, 고려가 전 국민을 탈탈 털어 치안유지까지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밀어 넣었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개경 포위’는 또 다른 문제다. 병력이 순간 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홍건적은 고려군이 개경까지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는 동안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단 얘긴가?

이 기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걸 설명하는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급격한 전환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주장한다.

원나라 군대가 홍건적을 쫓아 고려 영토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뭘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느냐고?

우선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1363년 3월, 공민왕이 원 황제에게 보낸 진정표(陳情表)를 들 수 있다.


『찬성사 이공수와 밀직제학 허강을 원에 파견하여 진정표를 올려 이르기를, “재앙 같은 도적들의 노략질을 만나 갑자기 조정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앞에서는 평양이, 뒤에서는 개성까지 전쟁의 불길이 번질 것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매번 교전할 때마다 약세를 보여주는 것은 진실로 계책이 많은 자가 할 바가 아니므로,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연합하여 공격하여 마침내 도적들을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고려사》 1363년 3월 2일)


특히 '매번 교전할 때마다...'로 이어지는 대목의 《고려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每交鋒而示弱, 固非多筭之所爲, 不旋踵而合攻, 竟使隻輪之無返.'

여기서 핵심은 바로 '합공(合攻)'으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힘을 합쳐 함께 공격했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개경에 대한 포위공격은 고려군 단독이 아니라 타 세력과의 연합 작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한 후 취했던 행동 역시 힌트가 된다.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건 전형적인 농성 준비다.

이미 고려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점거한 후, 주변 지역까지 정리하고 있던 홍건적이 고려군의 반격이 두려워 농성을 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홍건적은 고려로 추격해 올 게 뻔한 원군에 대비해 농성을 준비했다는 해석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원군이 고려 영내로 진입하여 고려군과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수복했다고 볼 여지를 주는 근거는 또 있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앞둔 1361년 9월, 잠시 원-고려 간 교통로가 재개된 정황이 포착된다.

공민왕은 원에 사신을 보내며 표문에 이렇게 적었다.


『호부상서 주사충을 원에 보내 양국 간의 도로가 다시 통하게 된 것을 하례하면서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저희들은 오직 상국의 도움을 믿고 어떻게 강포한 도적들이 침구해 올 줄을 꿈에라도 생각했겠습니까?... 이제야 폐하께서 계신 먼 곳으로 사신을 급히 보내어 다시금 성덕을 입게 되니 목마름이 해소되어 저도 모르게 기뻐 춤추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1361년 9월 12일)


그리고 곧이어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정동성(征東省)에 관리를 다시 배치하였다.』 (《고려사》 1361년 9월 25일)

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한다.

홍건적의 이동으로 길이 잠시 열리면서 원·고려 간 사신 왕래가 가능해졌고, 홍건적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하는 과정에서 정동행성에 관리를 재배치하는 등 대비 조치가 뒤따랐던 것이다.


아무튼 "20만" 대군은 개경을 포위하고 바로 이튿날 총공격에 나서 홍건적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했다.

홍건적은 비록 개경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궤멸된 것은 아니었다.

파두반 등이 이끄는 다수의 무리가 탈출에 성공, 압록강을 건너 도주했다.


『동틀 무렵에 여러 장수들이 사방에서 전진하여 공격하니, 우리 태조가 휘하의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여 먼저 〈성에〉 올라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괴수 사류, 관선생 등을 베어 죽였다. 적이 달아나면서 서로 짓밟아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성에 가득 찼으며, 머리를 베어 죽인 것이 무릇 100,000여 급(級)이었고, 원 황제의 옥새와 금보(金寶), 금·은·동으로 만든 도장, 병장기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잔당인 파두반 등 100,000여 명은 도주하여 압록강을 건너 가 버리니, 적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고려사》 1362년 1월 18일)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홍건적 잔당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이어졌다.

1362년 4월, 원의 고가노가 파두반을 생포했다.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 고가노가 홍건적의 나머지 무리를 공격하여 4,000여 명의 목을 베고, 그 괴수인 파두반을 생포한 뒤에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려왔다.』 (《고려사》 1362년 4월 1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건적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애초에 상도를 함락시키고, 요양을 지나 고려의 수도까지 함락시켰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그저그런 '도적떼'가 아님을 보여준다.


1362년 7월, '재침략 우려' 보고가 올라오기에 이르렀다.

『서북면병마사가 홍건적이 다시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고려사》 1362년 7월 7일)

다음 달에는 원이 사신을 보내와 고가노와 함께 홍건적 잔당을 협공하라고 지시했다.

『원에서 집현원 시독학사 흔도(忻都, 힌두)를 파견하여 홍건적을 제거한 공로로 왕에게 옷과 술을 주었고, 아울러 고가노와 함께 〈중국〉 개주(盖州)와 해주(海州)에 있는 홍건적 잔당을 협공하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고려사》 1362년 8월 23일)


정세 보고와 원 황제의 지시에 고려 조정은 전국 각지에서 군사를 징발하며 대비에 나섰다.

『사신을 파견하여 경상도·양광도·전라도·강릉도·삭방도·교주도에서 병사들을 징발하였는데 모두 40,000여 명이었다.』 (《고려사》 1362년 8월 24일)


한번 된통 당해서인지, 홍건적의 재침 우려에 고려는 우왕좌왕했다.

『개경에 머물고 있던 재추들이 홍건적의 〈침략〉 소식 때문에 태묘(太廟)의 신주와 선왕들의 진영을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고려사》 1362년 10월 23일)

『개경 사람들 중 지난번의 〈홍건적의〉 변란 때 혼났던 것 때문에 강화로 피난하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이 10명 중 4~5명이었다.』 (《고려사》 1362년 10월 23일)


홍건적 잔당이 완전히 정리되는 것은 1363년 무렵의 일이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관선생의 남은 무리가 다시 고려로부터 돌아와서 상도를 침구하니,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보루테무르)가 그를 쳐서 항복시켰다.』 (《원사》 순제9, 1363년)

이들은 고려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다시 상도까지 쳐들어갔던 것이다. 이들의 어마어마한 원정 거리를 고려하면, 결코 만만히 볼 군대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개주와 해주의 홍건적 잔당 역시 격파되었다.

『또 〈원 황제에게〉 해주와 개주의 적들을 평정한 것에 대해 하례하는 표문에서 이르기를, "〈도적들은〉 미친 것같이 사납게 날뛰면서 먼 곳까지 달려와 바로 평양까지 쳐들어왔으며, 재차 모여 다시 송경(松京)을 더럽혔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번국(藩國)을 위임받은 몸이 되어 군주에게 적과 관련된 근심을 끼쳐 드릴 수 없었으므로, 모든 백성들을 군사로 징발하여 군사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적과 싸웠으며, 그 결과 이전 황제의 영령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추악한 무리들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무리들이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며 오히려 해주와 개주에서 깃들어 있으므로, 장수의 지휘에 따라 가서 원병이 되어 위력을 빛내고 보였더니, 간악한 적들은 녹아 없어지고 잔당들은 항복하였습니다."』 (《고려사》 1363년 3월 2일)


이 표문을 통해 고려군이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원군과 협력, 개주와 해주의 홍건적을 격파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홍건적의 침입과 관련해 공민왕이 보인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

대병력의 적이 쳐들어와 수도가 위태로워지자 공민왕은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안동으로 냅다 튀었다.

자력으로는 적을 격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를 전환, 원에 SOS를 쳤다.


더군다나 공민왕은 1362년 1월 18일 개경을 수복한 후에도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개경 환도는 1363년 2월의 일이었다.

『백관이 〈왕의〉 환도(還都)를 하례하였고, 개경에 머물러 있던 재추들이 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잔을 올리자, 왕이 재추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다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모두 경들의 공로이다.”라고 하며, 최대한 즐기다가 〈연회를〉 끝마쳤다.』 (《고려사》 1363년 2월 13일)


정황상 공민왕은 개주·해주 일대의 홍건적 잔당 소탕이 거의 확실해지고, 재침입 우려가 사라졌다고 판단한 뒤에야 개경으로 돌아온 듯하다.

가히 보신 주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아무튼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개경 수복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했다.

이때 이성계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 개경을 수복한 공을 기록하여, 찬성사상의 황상, 정당문학 한방신, 지도첨의 안우경,... 판내부시사 변안렬, 판종부시사 이성계,... 온양부원군 방절을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삼았다.』 (《고려사》 1363년 윤3월 15일)


마지막으로, 《고려사》의 애매한 서술 때문에 이성계가 홍건적의 수뇌부, 관선생과 사유를 죽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태조가 휘하의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여 먼저 〈성에〉 올라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괴수 사류, 관선생 등을 베어 죽였다."


그런데 《태조실록》 총서의 서술은 약간 결이 다르다.

『공민왕 11년(1362) 임인 정월에 참지정사 안우 등 9원수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와서 서울을 수복하고 적의 괴수 사유·관선생 등을 목베었으니, 적의 목을 벤 것이 대개 10여만이나 되었다. 이때 태조는 휘하의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에 올라 적을 크게 부수니, 위명이 더욱 나타났다.』 (《태조실록》 총서)


현존 사료를 종합할 때, 이성계가 관선생·사유를 직접 참수했다기보다는 연합군의 전과로 처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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