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왔다. 육지에서는 눈이 흩날리고 있다던데, 제주는 비릿한 바닷바람만이 몸을 덮었다.
비행기로 고작 오십 분 거리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오늘 육지에서 눈을 맞았더라면 어땠을까.
눈 한 송이에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팠을 것이다.
별수 없이 찾아오는 굵직한 사건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던가. 그 장면들은 시간이 흘러도 또렷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훅 치고 들어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장면들.
내게도 그런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멈추지 않을 때면 제주에 온다. 그 장면의 배경에는 사람 하나와 제주가 있었으니까.
제주의 사방에는 바다가 있다. 파도는 한 번만 치지 않는다. 다음 파도가 밀어내고, 또 밀어낸다. 기억도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다른 기억으로 밀려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나는 그 장면의 장소를 찾아왔다.
오늘은 제주 서해안로에 위치한 폴바셋 1층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원래는 창가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자리지만, 오늘은 지워야 할 장면이 있어 골목길이 보이는 자리를 선택했다.
장면 하나.
골목길에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자전거의 속도에 맞춰 내 시선도 따라간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두 사람을 불러내고, 멀어지는 등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그때의 감정도 함께 멀어진다.
장면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태도로 남는다.
아프더라도, 미련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전부를 내어줄 용기를 쥐고 살아가는 삶도 괜찮겠다는 마음.
사람 하나.
장면에 포함된 사람 하나는 지금 제주도에 살고 있다. 인스타를 통해서도, 제주에 사는 친구를 통해서도 소식을 듣는다. 사랑하는 것들을 곁에 두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나가며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 하나는 장면을 태도로 남기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올바르고 현명한 사람이었으니까.
멀리서나마 그 사람의 태도를 배웠다. 미워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만큼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란다.
*
골목길이 보이는 자리에서 바다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
어김없이 파도는 치고 있다.
현무암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에
사람 하나와 기억 하나를 걸어둔다.
햇빛에 반사된 파도가 잠시 반짝인다.
부서진 것들도
저렇게 빛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