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시간에서 먼저 내려왔다

by 김민석

제주에 내려온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바람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곳의 바람은 늘 무언가를 잊게 만들고, 또 이상하게도 잊지 못하게 한다. 공항을 나서는 순간부터 알았다. 내가 잊으러 온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올리러 왔다는 걸.


야자수가 서 있는 길을 걸었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고, 햇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 우리는 예전에 이런 날씨를 좋아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 서로의 옆에만 있어도 충분했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몰랐을까.


이 섬에는 우리가 함께 걸었던 장면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카페 창가에 앉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 별 의미 없는 대화를 길게 이어가던 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웃었던 그 시간들.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나 혼자 기억하게 되었을 뿐이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그리움은 어떤 방향도 갖지 못한 채 머무르고, 후회는 이미 지나간 시간 위에서만 선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곳을 걷는다. 마치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기대를 품고서.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잃은 게 아니라, 서로의 시간에서 조금 일찍 내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길을 걷다가, 각자의 이유로 다른 정류장에 서버린 것처럼. 그래서 다시 만난다 해도, 예전과 같은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섬에 와 있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기억이 남아 있는 쪽으로. 그리고 여전히,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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