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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 K jin Jul 17. 2020

1. 악성이에요.

아홉수의 시작-

2018. 04.



29년 동안 참 평탄하게 살아왔다.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남들 놀 때 같이 놀았다. 남들 대학 갈 때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고, 남들 졸업할 때 같이했다. 취직은 살짝 늦었지만 이후 밥벌이는 했다. 이정도면 '평탄'이라는 단어랑 잘 어울리지 않나.


보통의 "한국식" 가정에서 자랐고 교우관계는 가끔 삐거덕거릴지언정 골머리 썩을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게 이렇게 완만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사회 생활하면서 힘든 건 대부분의 사회초년생들도 이렇게 살겠지~ 하면서 이겨냈고.


그런데


어떡해요, 악성이에요.


2018년, 서울 상수동에 위치한 유방외과 의사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이 바꼈다. 그 소리에 지독히도 회피형인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제발 꿈이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했고 엄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의사선생님은 세상 안타까운 목소리로 조직검사 결과를 전달하곤 곧바로 나이가 너무 어리니 하루 빨리 대학병원 예약을 해서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요. 이 속도면...


그 소리를 듣고도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멍때리던 나를 뒤로 하고 엄마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병원 예약을 도와달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생명의 은인 중 한 명인 그분이 연계 병원인 서울의 모 대학 병원에 긴급으로 예약을 잡아줬다. 긴급이라고 잡아줘도 2주를 대기해야 했다. 세상에 암환자가 이렇게 많았구나. 그와중에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각해 봐라, 제정신인 게 이상하지 않나.

조직검사 결과지와 CD를 바리바리 들고 병원 문을 열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처음 알았다. 대학 병원 예약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 조직검사 자료를 환자가 직접 들고 가야 한다.


괜찮아, 살 수 있어.


엄마는 뭐에 홀린듯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반복해서 그런 말을 했다. 그제야 아, 나 정말 죽을 수도 있는 병에 걸렸구나 느꼈다. 그 다음엔 그냥 이 자리에서 가루가 되고 싶었다. 그게 대낮에 차도에 뛰어들고 싶다고 느낀 첫번째 날이었다.


-


너는 29살을 조심해.


몇 년 전 친구들과 인사동에 사주를 보러간 적이 있었다. 사주 카페를 처음 간 날, 내 머릿속에 남은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가 26살이었나, 25살이었나. 사주를 정확하게 보려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 엄마를 졸라 겨우 알아냈다. 엄마도 기억 못하는 시간은 장롱을 뒤지고 뒤지니까 발견된 산모수첩에서 알 수 있었다.


당시엔 29살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고 사주를 딱히 맹신하진 않아서 깊게 생각 안 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은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28살에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정확히 29살 1월 1일부터 백수가 됐을 때 그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취업활동을 시작하게 된 나의 처지를 그 사람이 예언한 건가? 사주에도 이런 게 나오나? 신기했다. 그때는 몰랐지.

참고로 지금도 나는 그 이후로 사주를 보지 않는다. 별자리도 보지 않는다.



나란 사람 믿지는 않으나 굉장히 신경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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