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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 K jin Jul 22. 2020

2. 아, 맞다. 나 이제 암환자지

세상에 내가 암이라니!


상수동의 유방외과에서 나와 무슨 정신으로 합정역까지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러 걸었을 텐데 그 과정이 아득한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합정역 메세나폴리스 앞에서 인천 집까지 가는 광역 버스를 기다리며 헛웃음이 나왔던 건 기억난다. 평소라면 버스 도착 어플을 사용해 언제쯤 버스가 올지 지루하게 기다렸을 텐데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아, 맞다. 아빠.


그때 생각난 게 아빠였다. 그제야 가족들 생각이 난 거다. 멀쩡하게 살던 K-장녀가 갑자기 암에 걸렸다니. 게다가 가족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주위에 암환자라면 건너건너 먼 지인의 지인 정도의 일이던 우리 집에 암이라니. 그것도 20대인 내가 암이라니.


엄마가 말해. 지금 전화로 말해. ㅇㅇ이(남동생)한테도 엄마가 말해.


저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얼굴 보고 말하면 다같이 얼싸안고 펑펑 울까 봐. 그때 당시 나는 '울면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으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구나를 깨달았던 날이기도 했다. 놀라서 눈물이 안 나왔고 울면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끝일까. 울면 진짜 내가 죽을 거 같잖아.



광역버스에 올라타고 내가 했던 첫 번째 행동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거였다. 이 처지가 황당했고 사실 웃기게도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들에게 요청한 건 최대한 예전처럼 굴어라. 위로받고 싶지 않았고 나 때문에 분위기 가라앉는 것도 싫었다. 냉정하게 위로받는다고 암 걸린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여기서 제일 울고 싶은 건 난데 눈물도 안 나와.


딱 내 심정이었다.

그때 내가 보낸 카톡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 의사대로 반응해 줬던 거 같아서.
한 친구에겐 차마 그날 말할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정말 엉엉 울어버릴 거 같아서. 나름대로 나도 정리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전 직장 동료, 그동안 이런저런 루트로 알고 지냈던 지인들을 한 번에 정리했다. 일방적인 잠수를 탔다고 해야 되나. 사람들한테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해졌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진심으로 내 병을 가십거리가 아닌 마음으로 위로해 줄 사람들만 남겼다.


극단적인 성격 탓에 주변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만 남았지만 난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한순간에 잠수를 타버린 게 미안할 뿐. 가끔씩 꿈에 나오는 몇몇 지인들이 있다. 다들 잘 지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고.

진심이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린 후 유방암 카페에 가입했다. 그리고는 향후 생존율과 치료 방법을 검색했다. 나와 같은 처지인 2030 환우들이 모인 카톡방에도 초대를 받았다. 이곳에는 이미 치료가 끝난 사람들, 치료 중인 사람들, 호르몬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채팅방 인원에 놀라면서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안도감이 드는 나한테 실망도 했다.


-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느낀 공기는 참담했다. 평소와 다르게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혼잣말을 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냥 혹일 줄 알았지. 서울 간 김에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사람인, 잡코리아에 들어가서 취업 자리를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자소서를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 체력을 기르겠다고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럼 나는 이제 당장 뭘 해야 되지?


나는 살 수 있을까? 남들 취직 걱정, 회사 걱정할 때 나는 이제 살 걱정을 해야 되는 거지?


거봐,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반복되는 생각을 하다 잠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든 첫 생각.

아, 맞다. 나 이제 암환자지.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 생각을 가장 먼저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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