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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Aug 10. 2024

편지는 연필로 써주세요



검은색의 오후 11시.

연락이 뜸해진 Y의 SNS를 보다가 휴대폰을 닫고 편지를 쓰기 위해 필통을 뒤적인다. 딱딱한 텍스트로 보내는 편지는 결코 편지가 아니라는 작은 고집이 있다. 성별도 나이도 상관하지 않고 보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얇은 편지를 건네는 순간과 종이를 잡는 촉감과 함께 예상할 수 없는 그들의 반응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건네주지 않을 것이다. 우체통 안을 얇고 긴 팔로 휘적이는 Y를 상상하며 떠다니는 말들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슬그머니 Y가 나에게 써준 편지들을 서랍에서 꺼내본다. 사실 나의 편지 쓰기는 Y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만 같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세운 모든 가설들과 미래가 완벽하게 무너졌던 그 시절 어떤 것보다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은 타인들의 말이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라는 위선 섞인 말들을 귀로 받아먹고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억지로 삼켰다. 너무 많이 삼킨 말들을 다 소화시키지 못한 채로 더부룩한 하루를 살았다기보다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 Y는 편지를 써주곤 했다. 늘 보고 싶다고 연락하는 Y에게 뒤틀린 자기 경멸이라는 늪에 빠진 내 귀에 좋게 들릴 리가.


왜 자꾸 날 귀찮게 해?

만나서 뭐 해?

나를 만나서 너한테 얻는 이득이 뭐야?

그렇게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수익과 손실로 수치화시켰다. Y는 그런 나의 하루를 어김없이 궁금해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과 차가운 외모와 상반된 귀여운 그림과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너'라는 주어가 가득하다.

네가 좋아할까 봐...

네가 생각나서....

네가 나는...

손가락으로 툭 건들면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낡은 감정에 편지를 급하게 닫아버린다. 그런 Y에게 늦게나마 편지를 써 내려간다.


너의 하루는 어땠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괴로웠던 나의 삶에 너는 어떤 존재였는지,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너를 통해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나의 행운을 본인의 행복처럼 기뻐해주며 나라는 존재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던 너, 나보다 나를 사랑해 줬던 너에게 나는 몇십 통의 편지를 보내도 부족하겠지.


하찮은 편지를 너무 늦게 보낸 나는 Y에게 사과를 했지만 Y는 끊임없이 화를 냈다.



“택배도 별로 안 기다리는 내가
우체국 아저씨가 언제 오시는지 하루에
두세 번씩 밖을 쳐다봤어.
하찮은 게 아니라 국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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