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판대 앞에서의 한탄
생각과 경험을 글로 옮긴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의 에세이가 이토록 각광받은 시기는 없을 것이다.
유명한 오프라인 서점들만 가보더라도 에세이 섹션이 따로 있으며,
그 안에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이름이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출판물들의 생산을 고취하기 위해서
흔히 '독립 서점'이라고 불리는 곳들은 이런 류의 에세이들을 많이 취급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이뤄내고 있는 사유의 펼쳐짐과 전이,
그리고 작은 서점들과 출판사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귀중하다.
우리들의 사유 가운데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거니와
책 한 권도 내지 않은 자가 그들을 비하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추해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에세이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친구들에게 그러한 에세이들의 '양산'에 대해
줄기차게 비판해 온, 어찌 보면 추남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러한 에세이들'이란
그저 "괜찮아"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책들, 그리고 그저 "나처럼 살아봐"라고 잔소리하는 참견서들이다.
생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고된 육신의 상태에서
피자를 먹고 싶다고 호소하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나는 그저
'무언가를 욕구하는 것을 보니 죽을 정도의 상태는 아니구나'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서점의 가판대에 올려진 무수한 에세이들은 크게
"너대로 살아" 혹은 "나처럼 살아"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두 부류의 종합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결론은 '저것도 맞고, 이것도 맞다'이다.
즉, 무책임하게 잔소리하는
우리 내의 당연한 한탄처럼 들린다.
더욱이 나는 이런 류의 글을 볼 때면,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극히 우울한 감정이 든다.
보통의 에세이들은 우울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거나
기력을 잃은 사람에게 열정을 고취시켜주려고 하는 것과 대조된다.
"너처럼 살아도 돼"는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라며,
나의 우울한 상태를 강조해준다.
"나처럼 살아야 해"는 "너의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아"라며,
나의 미비한 상태를 직시해준다.
지금 상황에 의한 우울의 슬픔과
위로에서 느끼는 슬픔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전자는 차가운 슬픔이고,
후자는 뜨거운 슬픔
슬픔이라는 감정을
온도계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러한 에세이들은
그것을 다시 보게 하는 실로 에세이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양산된 에세이들은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우울의 종합이다.
그들이 하는 위로 자체가 나에게 변혁을 준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으나, 말없이 좋은 철학 책 한 권을 골라 선물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위로가 필요한 시점은
세상과 나의 간극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로보다는
그 간극을 어떤 식으로든 메울 수 있는 책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p.49.